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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보캅> 영화 포스터

▲ <로보캅> 영화 포스터 ⓒ 소니픽쳐스 릴리징 월트디즈니 스튜디오스 코리아


로봇들이 화려하게 모습을 바꾸는 <트랜스포머>나 거대 로봇의 위용을 자랑하는 <퍼시픽 림>은 요즘 로봇 영화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로봇이라고 부르기는 힘들지만, 슈트가 보여주는 사이보그적인 느낌을 고려한다면 <아이언맨>도 로봇 영화의 최전선에 선 작품군에 넣을 수 있다.

시간을 거슬러 1980년대로 돌아가면 지금의 로봇 영화와는 양상이 달랐다. 강력한 로봇의 힘을 통해 기계화된 문명을 경고한 <터미네이터>와 로봇을 통해 존재론적인 질문을 던졌던 <블레이드 러너>는 1980년대를 대표하는 로봇 영화다. 여기에 이 두 편의 영화를 섞은 듯한 <로보캅>이 있었다.

<토탈 리콜> <원초적 본능> <스타쉽 트루퍼스> 등으로 할리우드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폴 버호벤 감독은 메이저 영화로는 보기 드물게 폭력성과 정치성을 겸비한 작품을 만들었다. <로보캅>에서도 폴 버호벤의 색깔을 선명하다.

1987년에 공개한 <로보캅>은 기억을 찾아가는 로보캅을 다루었다. 그리고 'OCP'라는 다국적 기업을 가장 강력한 적으로 등장시켰다. 다국적 기업이 도시를 장악하려는 음모를 보여주면서 치안의 민영화가 부른 폐해를 경고했던 <로보캅>은 엄청난 폭력성과 강한 정치적인 은유가 공존했던 걸작 SF 영화다.

이름을 묻는 자에게 '로보캅'이 아닌 '머피'라는 인간의 이름을 대답하는 <로보캅>의 마지막 장면이 준 뜨거운 여운이 아직 남았건만, 소재 갈증에 허덕이는 할리우드는 편히 휴식을 취하던 로보캅을 다시금 가동했다. 제목은 여전히 <로보캅>이다. 새로운 <로보캅>의 연출은 <엘리스 스쿼드 2>로 브라질의 흥행 역사를 새로 쓰고, <엘리트 스쿼드 1>로 베를린 영화제 금곰상을 받은 호세 파딜라 감독이 맡았다.

그가 연출했던 <엘리트 스쿼드> 시리즈는 경찰 등 권력 시스템과 범죄 조직의 상관관계에서 흥미로운 질문을 도출했던 영화다. <엘리트 스쿼드 1>은 공권력의 한계를 어디까지 용인해야 하는가를 물었다면, <엘리트 스쿼드 2>는 부패한 시스템이 어떤 작동 원리를 가지는지를 탐구했다. <엘리트 스쿼드>의 연출자였던 호세 파딜라 감독은 경찰 영화인 동시에 공권력에 대하여 질문을 던지는 <로보캅>에 안성맞춤인 선택인 셈이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로보캅> 영화의 한 장면

▲ <로보캅> 영화의 한 장면 ⓒ 소니픽쳐스 릴리징 월트디즈니 스튜디오스 코리아


좋은 아빠이자, 실력있는 경찰이었던 알렉스 머피(조엘 킨나만 분)는 예기치 않은 사고로 온 몸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는다. 남편이 목숨을 잃을 위기에 놓이자 아내 클라라(애비 코니쉬 분)는 머피를 최첨단 하이테크 슈트로 무장한 로봇으로 되살리는데 동의한다.

외국에선 현장에 배치된 로봇을 정작 미국내에서 써먹지 못하던 거대 기업 옴니코프사는 로봇 도입을 막는 법안에 대항하여 국민적인 영웅을 만들 속셈으로 기계 속에 사람을 넣은 로보캅을 이용한다. 도덕심을 가지고,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고 느끼는 무엇이 필요했던 옴니코프사이기에 로보캅에게 인간적인 면모는 필수요소였다.

알렉스 머피의 머리와 심장, 그리고 오른쪽 팔에 기계를 결합시킨 로보캅은 오롯이 머피의 기억을 보존하고 있다. 심지어 자신의 남겨진 육체를 처음 접한 머피는 눈물을 흘리며 자기를 죽여달라고 절규할 정도로 인간의 모습을 간직했다. 그를 만든 데넷 노튼(게리 올드만 분) 박사는 몸뚱이는 기계일지언정 영혼은 그대로라고 말한다.

폴 버호벤의 <로보캅>은 인간과 로봇 사이에서 자아를 찾아가면서 동료의 존재를 활용했다. 로보캅이 머피임을 처음 눈치챈 이는 다름아닌 동료였다. 이와 달리 기억의 문제를 다루지 않는 호세 파딜라의 <로보캅>에서 중요한 존재는 노튼 박사다. 노튼 박사와 머피의 관계는 마치 프랑켄슈타인 박사와 그의 피조물인 '이름 없는 괴물'을 떠올리게 한다. 프랑켄슈타인 박사와 노튼 박사가 다른 점은 노튼 박사는 끝까지 자신의 창조물에 책임질 줄 안다는 사실이다.

<엘리트 스쿼드 2>는 강하고 견고한 부패의 고리는 결국 돈 때문이라고 결론짓는다. 유사한 소재를 다룬 <로보캅>은 시스템에 깊숙이 들어간다. 그 속에는 권력과 유착한 더러운 언론이 있고, 범죄 조직과 손잡은 타락한 경찰이 나타난다. 무기를 팔아 돈만 버는데 눈이 먼 기업이 있으며, 그것을 위해 공권력 시스템과 결탁한다. 이들은 머피를 죽이고, 로보캅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취할 생각에 혈안이 된 자들이다. 로보캅이 맞닥뜨리는 것은 거대한 검은 커넥션이 풍기는 추악한 냄새다.

이렇게 <로보캅>은 거대한 시스템이 주장하는 '힘'과 만난다. <로보캅>에서 언론을 장악한 팻 노박(사무엘 L. 잭슨 분)은 안전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면서 강한 힘을 옹호하고,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도 합리화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은 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도리어 통제를 가하는 <비상계엄>의 월리엄 데버러(브루스 윌리스 분) 장군이나 안전을 이유로 맹목적인 복종을 바라는 <이퀼리브리엄>의 세상과 다를 바 없다. 이로써 <로보캅>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도 용인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정체성을 잃어가는 지금의 사회를 은유하는 '로보캅'



<로보캅> 영화의 한 장면

▲ <로보캅> 영화의 한 장면 ⓒ 소니픽쳐스 릴리징 월트디즈니 스튜디오스 코리아


이런 상황은 9·11 테러가 만든 시스템이 도리어 국민의 목을 조르는 자기모순에 빠진 미국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로보캅> 속 노튼 박사의 말은 흥미롭다. 그는 평상시엔 머피가 로보캅을 조종하나, 전투 때엔 기계가 조종하는 상황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일컬어 '자유 의지의 착각'이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로보캅의 상황은 우리가 만들었다고 생각한 시스템이 본질적으론 배후에서 조종하는 누군가의 의해 조종되는 것임을 의미한다.

<로보캅>은 왜 지금 '로보캅'이 다시 등장하는냐란 질문으로 이어진다. 그가 다시 돌아와야 하는 이유는 두 가지 정도로 풀이된다. 하나는 당연히 오락 영화의 소재로 효용 가치가 있어서다. 다른 하나는 로보캅을 통해 이 시대의 관객에게 할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로보캅>은 폭력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잃어가는 미국을 은유한다. 이는 <아이언맨 3>에서 던진 "내가 아이언맨인가, 수트가 아이언맨인가?"라는 자기 정체성의 문제와 비슷하다. 그런 의미에서 로보캅이 자신의 의지로 조종 시스템을 이겨내고 검은색의 슈트에서 은색의 슈트로 돌아가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로보캅>은 진정한 자유의지를 회복하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근래 할리우드는 경찰 영화였던 <저지 드레드>를 리메이크했던 바가 있다. 리메이크된 <저지 드레드>는 절대 타협하지 않는 경찰상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또 다른 리메이크 작품인 <로보캅>은 힘을 가진 자의 윤리적인 태도를 물으면서 인간성을 강조한다. <저지 드레드>와 <로보캅>은 목표하는 방향은 달랐으나, 두 편 모두 성공적인 리메이크에 도착했다. 성공적인 '리부트'란 바로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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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당 24프레임의 마음으로 영화를 사랑하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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