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를 배경으로 한 영화 <피 끓는 청춘>

충청도를 배경으로 한 영화 <피 끓는 청춘> ⓒ 롯데엔터테인먼트

어른이 되면 흔히 "어린 시절엔 뭘 몰랐어"라고 이야기한다. 나이 먹는다는 것은 어린 시절보다 감정조절과 대처에 있어, 세련되어진다는 뜻. 타인에게 비치는 모습을 한 번 더 생각하게 되니, 적어도 겉으로는 참을성 깊고 사려있는 사람으로 인식되게 행동한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삶의 경험이 축적된다는 것은, 감정을 숨기는 일에 익숙해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흔히 풋풋함으로 불리는 10대 시절의 경쾌함과 솔직함을 잃고, 밥벌이의 고달픔에 치이는 이들의 합리화는 아닐까.

게다가 흘러가버린 시간은 자의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크다. 특히 남들에겐 과장이지만, 스스로에겐 준엄하기 십상이다. 별 탈 없이 최선의 시간을 보냈음에도 '그때 왜 그랬을까', '정신없어서 열심히 하질 않았지'라며 스스로 꾸짖게 된다. 과연 어린 시절은 그렇게 모르고 생각 없기만 했던 것일까?

영화 <피 끓는 청춘>은 그런 '뭘 몰랐던' 시절과 소중히 간직해야 할 가치에 관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영화다. 배경은 1982년. 너무 뒤로 갔나 싶지만, 청춘은 지금이나 그때나 유쾌하고 고민도 많은 시절인건 똑같다. 중장년층은 물론 요즘 시대 청소년들이 봐도 즐거운 영화가 나왔다.

능글맞은 카사노바와 목에 파스 붙인 누나의 추억이 잘 그려져

 파스 붙인 언니로 출연한 박보영의 연기변신이 훌륭했다.

파스 붙인 언니로 출연한 박보영의 연기변신이 훌륭했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충청남도 홍성의 농고에 다니는 중길(이종석 분)은 날리는 카사노바다. 훤칠한 키에 매력적인 얼굴은 여학생들이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다. "난 쉬운 여자 아녀!"라고 반항해 보지만 줄줄이 준길의 마성에 농락당하고 만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영숙(박보영 분)은 이른바 '짱'이다. 한번 주위를 돌아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린 학생들은 벌벌 떤다. 하지만 바라는 게 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중길의 마음을 얻는 것. "나는 왜 안 되는겨?"라고 묻지만, "너랑 나랑은 가는 길이 다르다니께~"하는 차가운 반응이다. 가지고 싶은 남자라 죽일 수도 없다.

그런 영숙을 오매불망 바라보는 남자는 광식(김영광 분). 이웃 학교 홍성공고의 '짱'이다. 영숙을 좋아하기에 전략적 동맹관계를 맺어준다. 광식은 중길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한다. 여동생이 서울로 간 것은 중길에게 농락당했기 때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중길은 광식의 그림자만 봐도 오줌을 지린다.

가뜩이나 아픈 영숙의 마음이 찢기는 일이 발생한다. 얼굴 하얗고 파리한 소녀, 소설 <소나기>의 주인공 같은 소희(이세영 분)가 서울서 전학 온 것. 중길의 작업이 시작된 건 당연한 일. 덜컹대는 통학 기차 안에서, 잔디 같은 논길에서, 탁 트인 바닷가에서 청춘남녀의 물고 물리는 한바탕 성장기가 그려진다.

충청도 특유의 해학, 마지막 교복 시대 추억과 뛰어난 조화 이뤄

 도저히 마음을 열지 않는 중길이 미운 영숙.

도저히 마음을 열지 않는 중길이 미운 영숙. ⓒ 롯데엔터테인먼트


<피 끓는 청춘>의 이연우 감독은 지난 작품 <거북이 달린다>로 충청도 특유의 의뭉스럽지만, 해학적 정서를 영화에 녹여냈던 경험이 있다. 다만 전작의 경우 형사물 특유의 플롯에 느린 지방 정서가 더해지다 보니 다소 생경하게 받아들이는 관객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작품 속에는 너무나도 유들유들하고 뻔뻔하게 녹아들었다.

영화 초반에 다소 낯설게 들리던 사투리가 편안해질 무렵이면, 빤히 알면서도 모른척하는 충청도 특유의 눙치기 유머가 관객들의 배를 잡게 한다. 영남 아니면 호남으로 양분됐던 지역적 소재에 특색 있고 정감 있는 코드가 끼어들었다.

한편 영화의 시대상, 1982년은 말 그대로 교복 세대와 자율화의 낀 세대다. 완전자율화는 이듬해인 1983년으로 옷은 교복을 입되 머리는 자율화였던 단 한 해였던 것이다.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당시의 분위기가, 아이라고 하기에도 어른이라고 하기에도 모호한 청소년기의 상태를 반영시킨다.

영화의 강점은 기본 스토리가 탄탄하다는 점에 있다. 이야기가 무리 없이 흐르고 여러 반전이 숨어있다. 일부 상투성이 안 보인다고 할 순 없지만, 영화의 주제 아래 티 나지 않게 녹아난다. 상처투성이 시절이지만, 열심히 살았고 그러다 깨달음을 얻게 되는 청춘의 시간이 웃음 이후 가슴 찡하게 그려졌다.

좋은 스토리와 멋진 연기의 결합, 딱히 흠 잡을 곳이 없어

 라미란과 김희원의 깨알같은 웃음은 왜 명품배우인가를 알게 해 준다.

라미란과 김희원의 깨알같은 웃음은 왜 명품배우인가를 알게 해 준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이야기를 더욱 빛나게 한 것은 주·조연 배우들의 혀를 내두를 연기력이다. 특히 주인공 이종석의 경우는 이런 매력이 있었나 할 정도의 연기를 보여줬다. <관상>의 그 배우가 맞나 싶을 정도다. 단순히 울고 웃는 게 아닌 능글맞고 빤질빤질한 역할을 똑 떨어지게 소화해냈다. 잘 생긴 배우가 연기력까지 갖춰가는 금상첨화의 예다.

박보영의 변신도 놀랍다. 작은 체구의 귀엽기만 한 배우였지만, 극에서 뿜어내는 절절한 카리스마가 스크린 밖으로까지 튀어나온다. 큰 배우들과 서도 전혀 작다는 느낌이 안 드는 명품배우가 되어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아역시절부터 안정된 연기력의 이세영은 물론이고 악역으로 변신한 김영광도 독기 어린 눈매를 오버하지 않고 보여줬다. 빠질 수 없는 것은 투닥거리며 사랑을 키워가는 선생님 역할의 라미란과 김희원이다. 특히 라미란의 경우 '알면서도 웃는다는 게 이런 거구나'라는 걸 제대로 보여준다. 신스틸러 이상의 미친 존재감이다.

영화 전반 많은 부분에 웃음이 섞여 있지만, 결국 영화가 말하고 싶은 것은 소중한 사람에 대해 깨닫는 것이다. 실수 많았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는 열심히 살았던, 지나간 세월에 바치는 헌정이기도 하다.

영화 자체의 완성도만 놓고 보면 설 개봉작 중 손을 들어줘도 무방하다. 무엇보다 설 대목을 앞두고 만든 기획 상품의 냄새가 나지 않아 좋다. 덜 인공적이고, 땅에 발을 붙인 이야기 구조다. 누구나 봐도 좋을, 웃음과 추억이 물씬 풍기는 영화다. 

덧붙이는 글 1월 22일 개봉.
피 끊는 청춘 이종석 이세영 박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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