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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피며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모릅니다
▲ 목련나무 꽃이 피며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모릅니다
ⓒ 김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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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어르신이 자전거를 타고 오다가 나와 마주치자 멈춰 섭니다. 나는 슈퍼마켓에서 장을 봐가지고 오는 길입니다.

"슈퍼에서 장을 봤어요. 하늘이 참 푸르네요"

잎이 다 떨어져 앙상한 목련나무가 오늘 따라 유난히 푸른 하늘을 이고 있습니다. 어르신도 목련나무를 돌아봅니다.

"세월 참 무섭네, 이제 보니 그때보다 아주 높이 자랐네..."

어르신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말했지만 나는 '그때보다' 라는 말을 듣는 순간 수년 전에 세상을 떠난 어르신의 아내가 생각났습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별로 무겁지도 않은 장바구니를 오른 손에서 왼손에 바꿔 들며 어르신의 눈치를 보았습니다.

그해 봄엔 목련꽃들이 유난히 많이 피었습니다. 아내가 목련꽃이 보고 싶다고 해서 어르신은 몸 한쪽이 부자유스러운 아내를 휠체어에 태워 나왔는데 만개한 목련꽃들을 바라보며 즐거워하던 아내가 갑자기 초콜릿이 먹고 싶다고 했습니다. 어르신이 휠체어를 상가 쪽으로 돌리려 하자 아내가 자신은 여기 있을 테니 얼른 혼자 다녀오라 했다고 합니다.

어르신은 부지런히 초콜릿 한 봉지를 사가지고 오다가 죽이 잘 맞는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냥 "요즘도 밥 잘 먹고 잠 잘 자냐?" 하고는 스쳐가려는데 친구가 말 줄을 놓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얼마 만에 돌아와서 보니 그 사이에 그만 아내가 용변을 봤습니다. 병고에 지칠 대로 지친 아내입니다. 그 모습만으로도 가슴이 아픈데 아내는 가냘픈 어깨를 잔뜩 웅크리고 숨죽여 울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애처롭고 가엽고 아프던지 어르신 역시 숨죽여 울면서 서둘러 휠체어를 밀었다고 합니다.

  어르신은 언제나 이 길을 자전거로 휙 지나갑니다
▲ 목련나무 길 어르신은 언제나 이 길을 자전거로 휙 지나갑니다
ⓒ 김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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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은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이 길로 다닙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부터는 자전거를 타고 다닙니다. 장 보러 갈 때도 은행에 공과금을 납부하러 갈 때도 노인정에 갈 때도 자전거 운동을 하러 갈 때도 보건소에 혈압 약 처방전을 받으러 갈 때도 이 길을 휙 하고 빠르게 지나서 갑니다.

목련나무들이 그때보다 아주 높이 자랐다는 것을 새삼 느끼신 것으로 보아 어르신은 목련꽃이 피거나 말거나 단풍이 들거나 말거나 이파리들이 떨어졌거나 말거나 눈이 내려 목련나무가 하얀 옷을 입거나 말거나 전혀 상관치 않고 앞만 보고 다니신 모양입니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다가 나를 만나면 속도를 조금 늦추고 '장 봐 오시네' 하는 눈으로 아는 체를 하고는 휙 지나가던 어르신이 오늘은 일부러 자전거를 멈추었습니다. 처음 있는 일입니다.

"조금 전에 영감님을 봤는데 수영 가는 길이라 하시던데, 그 나이에 아직도 수영을 다니시고, 부러워요"
"실버 반에 다녀요. 재밌나 봐요"     

어르신은 혼자 살고 있습니다. 출가한 두 딸이 효녀라 어르신을 정성껏 돌보기는 하지만 외로움까지 덜어주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어르신은 오전시간 대부분을 자전거 운동을 하면서 보냅니다. 지금도 자전거 운동을 하고 돌아오시는 모양입니다.  

"근데 영감님 얼굴이 쏙 빠졌던데, 어디 아파요?"

어르신이 휙 지나가야 할 길에서 자전거를 멈춘 것은 남편의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요즘 남편의 얼굴이 좀 빠지긴 했습니다. 배가 자꾸 나온다면서 식사량을 조금 줄이기도 했지만 무엇을 먹어도 입맛이 없다는 것입니다. 밥 대신에 과일만 먹고 마는 때도 많습니다.

"그냥 입맛이 없대요."
"입맛이 없어도 자꾸 밥을 먹어야지 안 그러면 축이 나고 병이 난다고요. 밥이 보약이라구요. 노인들은 그저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고 그래야 해요. 수영도 하겠다, 요것조것 맛있는 거 많이 해 드리면 금방 회복이 될 거예요."

어르신은 유순하게 웃습니다. 나도 웃습니다. 예, 알았어요 하는 눈으로 웃습니다. 어르신이 '어구 추워' 하면서 땅을 딛고 있던 발로 페달을 밟는가 하더니 휙 하고 내 옆을 지나갔습니다.

오랫동안 아내의 병 수발을 들어 준 어르신입니다. 그 경험이 이웃 친구의 약해진 건강을 한눈에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충고까지 해 주었습니다. 나는 조금 부끄러워졌습니다. 남편의 입맛이 돌도록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들을 만들어 상에 올리기는 했어도 밥을 먹다가 말면 그런가 보다 했지 더 먹으라고 권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자꾸 권해서 밥 한 공기를 다 먹고는 했더라면 얼굴이 그 정도로 쏙 빠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저녁에는 남편이 두어 수저를 뜨다가 그만 두면 입맛이 없어도 먹으라고 잔소리를 해 볼 생각입니다.

어르신도 입맛이 없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노인들은 그저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고 그래야 해요' 라고 하시던 것으로 보아 아무리 입맛이 없어도 끼니를 거르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입맛이 없어 수저를 놓고 싶을 때마다 아내의 정겨운 잔소리가 생각나서 억지로라도 밥 한 공기를 비우고는 했을지도 모릅니다. '글쎄 입맛이 없어도 먹어요, 먹으라구요...'

그새 자전거를 탄 어르신의 모습이 작은 공원 사이 길을 돌아가고 있습니다. 거기에도 오래된 목련나무 몇 그루가 몰려있습니다. 어르신은 상관치 않고 앞만 보고 갑니다. 나도 상관치 않고 어르신의 구부정한 뒷모습만 바라보았습니다.


태그:#목련나무, #아픈 상처, #밥이 보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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