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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7일, 케리 미 국무장관과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윤벙세 외교부장관 .
ⓒ 미 국무부 배포 동영상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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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은 대박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6일, 신년 기자회견을 하면서 뜬금없이 던진 말이다. 분단이 고착화되어 가고 있는 현실에 대한 깊은 고찰 없이 불쑥 내어 놓은 낭만적인 발언이라는 비판이 나올 틈도 없이 보수 언론들은 이 발언을 대서특필하기에 바빴다. 여기에 설 전에 남북 이산가족의 상봉을 다시 제안했다는 것이 보태어져 마치 새해에는 남북 관계에 새로운 장이 펼쳐질 것처럼 보수 언론들은 여론몰이에 앞장섰다.

2015년에는 남북이 통일될 것이라고, 그것도 남한에 의한 흡수 통일이 될 것이라고 송년회 자리에서 한국의 국가 정보를 책임지고 있는 수장인 남재준 국가정보원장이 했다는 발언의 파문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번에는 다시 박 대통령이 통일 발언을 꺼낸 것이다.

"통일은 대박"부터 "급변사태 대비"까지

그렇다면 박 대통령은 무슨 근거로 갑작스럽게 통일을 이야기했으며 그것을 '대박'이라고까지 표현했던 것일까. 이명박 정권 등장 이후 지금까지 남북 간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어 있는 상황에서 갑작스러운 통일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또, 북한의 붕괴에 의한 흡수 통일을 말했을까. 하지만 그 속내는 그리 오래가지 않아서 밝혀졌다.

한국의 외교 정책을 총괄하고 있는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박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 다음 날인 지난 7일, 한미 외교장관 회담 직후 한국 특파원들과 기자 간담회에서 "미국과 북한 정세를 논의하는 고위급 협의를 확대할 것"이라면서 "새로운 북한 상황에 비춰 이 같은 논의가 시급하다는 의견 일치가 있었으며 한미 양자는 물론 중국 등 다른 나라도 관여시켜 3자 또는 5자도 될 수 있다"고 밝혔다.

윤 장관은 "이 협의가 '컨틴젼시 플랜(급변사태 대비 계획)'을 포함하는 것이냐"는 질문에 "그것을 배제할 필요는 없다"고 정확한 확인까지 해줬다. 곧바로 그의 이러한 발언은 국내 언론에 '북한 급변사태 논의를 위한 국제적 협의체 추진'이라는 내용 등으로 보도되었다.

<동아일보> 등 일부 언론들은 '북 체제 변화 유도"... 6자회담과 별개의 다자채널 만든다'고 보도하는 등 한미 당국이 북한의 급변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는 보도로 이어졌다. 한나라의 외교를 총괄하고 있는 외교부 장관이 미국에 가서 북한의 급변 사태 대비를 주창했고 더 나아가 중국까지 끌어들이겠다는 야심(?)에 찬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순진무구한 생각이 그대로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당사자인 북한은 논외로 하더라도 한반도의 갈등과 충돌 방지 등 현상 유지 입장에서 6자회담 재개에 엄청난 공을 들이고 있는 중국이 북한 급변 사태를 대비하자는 이러한 한국 외교부 장관의 제안에 어떤 반응을 내어놓을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하지만 외교부는 일단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하루 전 박근혜 대통령이 남북관계의 실질적 진전을 희망한다며 이산가족 상봉을 제안한 것이 마음에도 없는 형식적인 제안이라는 것을 실증이라도 하듯 외교부 장관의 발언은 한국 외교의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드러난 속내 주워담기에 바쁜 외교부

윤 장관이 기자 간담회에서 밝힌 입장과 관련하여 당시 간담회에 참석했던 한 정부 고위 당국자는 "북한 정세를 심도 있게 논의하자는 것은 앞으로 이런 정세 평가의 토대 위에서 북한의 변화를 좀 더 빨리 이끌어내자는 정책적 방향과 연결이 된다고 보면 된다"며 "북한 정세와 관련한 불확실성이 있으니까 그걸 심도 있게 논의해보자는 것"이라고까지 부연 설명을 했다.

이어 이 당국자는 "북한 정세 협의체는 기본적으로 비핵화를 의제로 하는 6자회담과 다른 것이며, 형식은 한미 양자 외에 중국이 참여할 수도 있고, 북한을 뺀 5자나 유엔 차원이 될 수도 있다"고 아주 자세한 구상을 곁들여 설명했다.

이 당국자는 더욱 구체적으로 "장성택 처형 이후 한미는 어느 때보다 (긴밀히) 협의하고 있다"며 "그것을 좀 더 체계적으로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다"고 발언했다. 즉 이와 같은 의도로 미국에 대해 이러한 새로운 협의체 구성을 제안한 취지를 설명했다고 언론들은 전했다.

조태영 외교부 대변인도 9일 정례브리핑에서 "아시다시피 북한 내부 정세가 유동적"이라며 "이러한 상황에 대해 한미 간에 더욱 긴밀히 협의할 필요가 있겠다는 취지"라고 설명하는 등 이를 뒷받침했다.

외교부는 이 같은 내용이 국내 언론을 통해 보도되어 파문을 일으키자, 서둘러 발을 빼면서 진화에 나섰다. 외교부는 9일 "한미가 북한의 급변사태 가능성에 대해 논의한 적이 없으며, 새로운 협의체 구성도 이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다"라고 적극적으로 파문의 확산을 막고 나섰다. 쉽게 말해 이른바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윤병세 장관은 한국 특파원들과의 기자 간담회 자리에서뿐만 아니라 존 케리 미 국무장관과 회담 직후 가진 공식 기자회견에서도 "북한의 불안정(uncertain)에 대비하기 위해 이러한 협의체를 강화하기로 결정했다"고 공식적으로 말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북한 "새해 벽두부터 무엄함 행동" 반발

윤 장관은 지난 7일, 존 케리 미 국무장관과 회담 직후 함께 밝힌 공식 기자회견에서 영어로 "우리(한국과 미국)는 북한의 상황을 평가하기 위해 협의를 강화하고 여러 외교적 옵션들을 검토하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노력들은 우리 두 국가가 불안정한 북한 상황을 다루는 데 같은 입장이라는 것은 확신시켜 줄 것이다"고 밝혔었다.

북한의 불안정성에 대한 대비에 이른바 '급변 사태' 등이 포함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일반적인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공식 기자회견이나 이후 기자간담회를 통해서 이렇게 현실적인 속내를 드러냈지만, 박 대통령이 제안한 '설전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허울 좋은 제안에 상처를 낼까 봐 외교부 스스로 했던 말을 주워담기에 바빴던 것이다.

북한도 윤병세 장관의 이러한 발언을 놓치지 않았다.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는 지난 9일, 남측이 제안한 이산가족 상봉을 거부하는 이유 중 하나로 "남측이 우리의 성의 있는 노력과 상반되게 새해 벽두부터 언론들과 전문가들, 당국자들까지 나서서 무엄한 언동을 하였다"고 지적했다. 다시 말해 '남측 당국자의 무엄한 행동'이 박 대통령의 이산가족 상봉 제의 다음 날 불거진 윤병세 외교부 장관의 '북한 급변 사태 대비 파문'을 지칭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사실 외교부의 오락 가락은 엄밀히 따지자면 정확한 속내를 드러낸 외교부의 잘못이 아닐 수도 있다. 이미 이러한 파문은 새해부터 청와대와 외교부, 통일부 등 정책 주관 부서가 서로 전혀 다른 엇박자를 내면서 예고된 일이었다.

지난 1일, 북한 김정은 제1비서의 신년사에 대해 류길재 통일부 장관은 그 다음 날 "무엇을 제의했다고 해석될 여지는 별로 없다"고 평가 절하했다. 이어 통일부는 3일 발표한 공식 성명에서도 "북한 신년사의 진정성에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며 거론할 가치도 없다는 듯한 입장을 피력했다.

그러나 3일 후에 이어진 박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에서는 박 대통령은 "북한에서 올해 신년사에 남북관계 개선에 대해서 얘기를 했는데 그 자체에 대해서는 환영한다"며 전혀 다른 뉘앙스로 평가했다. 이어 "통일은 대박"이라며 "저는 한반도의 평화와 또 통일시대 준비를 위해서 필요하다면 북한의 지도자와 언제든지 만날 수 있는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며 나아가 이산가족 상봉까지 제안했었다.

이러한 상황을 종합해보면 한마디로 박근혜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에서 밝힌 이산가족 상봉 등 대북 관련 정책이 주무 부서와 의견 조율이라도 하고 나온 것인지 의심이 들 정도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주무 부서에서는 일관되게 대북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데 반해 청와대는 그저 국민의 환심을 사기 위해 듣기 좋은 말이나 보기 좋은 제안만을 던진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박 대통령의 "통일은 대박"이라는 듣기 좋은 말에 국민들은 나름 꿈에 젖어 있고 '이산가족 상봉 제안'이라는 보기 좋은 제안의 발표에 실향민들은 마지막 실낱같은 희망마저 버리지 않고 있다. 어쩌면 2014년에는 남북한 간에 최소한 관계 개선의 화해 분위기 도래할 수도 있다는 희망을 국민들은 가슴에 품고 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외교부 장관은 미국에 가서 북한 급변 사태에 관해 대비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미국은 동맹국인 한국에 대한 방위에는 변함이 없다며 북한과의 전면전을 대비해 2014년에는 최대 규모의 한미 군사 합동훈련을 실시하겠다고 발표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한반도의 현실이다.


태그:#대북 정책, #북한 급변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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