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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고백하면, 유감스럽게도 나는 박근혜 대통령을 '박' 대통령이라 부르지 못한다. 그런데 우리에게 <박> 대통령은 도대체 어떠한 존재였던가?

박정희 군사통치 시절의 우리나라에서도 자유민주주의가 '국시'의 차원으로까지 승화하여 신성시되기까지 했던 적도 있었다. 프랑스의 위대한 정치사상가인 토크빌은 절대군주는 자신에게 저항하는 자의 육체에 고통을 가함으로써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켰지만, 민주주의 시대는 소수의 영혼에 고통을 가함으로써 다수의 의지를 관철시킨다고 말한 바 있다.

소름 돋는 공포의 기억

구미시 상모동 박정희 동상.
 구미시 상모동 박정희 동상.
ⓒ 조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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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박정희는 육체와 정신, 가릴 필요도 없이 아무 쪽에나 되는 대로 위해를 가함으로써 자신의 개인적 의지를 무조건적으로 관철시켰다. 그는 민주주의 시대의 절대군주였던 것이다. 하기야 박정희는 무엇인가를 금하고, 억누르고, 정탐하고, '엮어내고', 뒤쫓고 하는 등등의 어둡고 불안한 세태만을 만들어내었을 뿐이다.

이처럼 소름이 돋고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우울한 기억 탓에, 귀찮지만 차별성을 의도적으로라도 꼭 만들어내어야 다소나마 편안해질 듯하여, 꼭 성명 삼 자를 다 부쳐 '박근혜 대통령'이라 불러야 다소나마 안심이 된다. 부끄럽게도 나는 이처럼 소심하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반 자유민주주의자인 것만 같다. 무엇보다 자신의 '원칙'만을 절대시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헌법은 준엄하게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기려마지 않는다. 그런데 이러한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는 타협이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자유민주주의는 이 사회를 서로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여러 이질적인 집단의 집합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이해관계의 대립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 가운데 어떠한 이해도 절대적인 것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경쟁하는 개별 집단 사이의 타협이 필수적으로 요구되어질 수밖에 없다. 이것이 자유민주주의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자유민주주의는 대립적인 이해관계의 존재를 서로 인정하면서, 협상과 타협을 통해 그 대립성을 풀어 나가려는 호혜적인 정신적 자세, 요컨대 '관용'을 자신의 본질적인 가치로 추앙한다. 이것이 자유민주주의의 숙명이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기본토대인 다원주의(pluralism)에 의할 것 같으면, 사회 내부의 이해관계의 대립은 필연적이고, 그 가운데 어떠한 것도 절대적인 것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경쟁하는 개별 집단 사이의 타협이 필수적인 덕목으로 등장한다. 이 경우 관용은, 대립적인 이해관계의 존재를 서로 인정하면서, 협상과 타협을 통해 그 대립성을 풀어 나가려는 호혜적인 자세를 가리킨다. 이런 의미에서 정치학자들은 자유민주주의적 관용의 적(敵)을 광신(fanaticism)이라 규정한다. 이렇게 볼 때 과거 공안당국의 작태나 색깔론, 그리고 정체성 논란 등은 오히려 '광신'에 가까운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자유민주주의의 본성상, 원칙 없는 타협은 '야합'으로 그리고 타협 없는 원칙은 '독선'으로 규탄당할 수밖에 없게 된다.

당신 색깔이 수상해!

박근혜 대통령이 10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10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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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현재 박근혜 대통령은 안타깝게도 이러한 독선과 야합의 통치를 애호하는 듯이 보인다. 박근혜 정부는 진보적 양심세력에 대해서는 독선의 채찍을 내리치고 있으며, 정략적 기회주의 집단에 대해서는 야합의 당근을 선사하고 있다. 바야흐로 '공포정치 시대'의 막이 새로이 열리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이른바 '종북주의자'가 양산되고 있다. '색깔론'이 우리나라의 경우, 어쩔 수 없이 음험하고 공포스러운 색조를 띠는 이유는,  사상의 자유와 이념에 대한 판정이 지금껏 항상- 특히 박정희 시대에 유별났듯이 - 지배세력의 입맛에 따라 좌우되어 왔던 전통 때문이다. "당신, 사상(색깔)이 수상해!" 하는 한마디 말이, 당사자의 가슴을 얼마나 무거운 바위로 짓눌러 왔던가. 왜냐하면 이 말은 곧 "당신, 맛 좀 봐야 되겠어"로 통했고, 곧 이어서 주위 사람들에게까지도, 소위 '연좌제'에 의해 처절한 박해와 참담한 고난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색깔에 대해 '자신만만해' 하는 세력들은, 지난 역사를 되돌아 볼 때,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굽힘없이 싸워온 개인이나 집단들을, 색깔을 빌미로 혹독히 탄압해본 전력이 있는, 냉전․공안 사범들이라 할 수 있다.

우리 대한민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요컨대 '좌파'의 일방적 타도만이 절규되어 오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좌익수'만 있을 뿐이고, '우익수'는 단지 야구장에서만 찾아볼 수 있을 따름이다. 이를테면 학문과 사상의 자유 등을 억눌러온 반 자유민주주의적인 전통의 산물인 것이다.

오늘날 이른바 '좌파'의 자세를 아우르며, 과격하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영어 '래디칼'의 어원은, '뿌리 채 파고든다'는 의미를 가진, '라딕스'라는 라틴어다. 말하자면 뿌리까지 파고들어 속속들이 따지고 드는, 단호한 태도를 일컫는 말이다. 실은 우리 민족도 옛적부터, 이러한 '급진적인' 정신을 보배처럼 높이 받들었다. 예컨대 '라딕스'와 거의 동일한 의미를 지닌 '발본색원'(拔本塞源)하는 정신이야말로, 우리들의 고고한 자랑거리 아니었던가. 오늘날의 어법으로 해석하면, 우리 조상은 원래부터, '래디컬'한 좌파를 높이 평가했던 듯하다.

자유민주주의 정신에 의하면, 이 지상의 어느 누구도 인간의 신념과 양심을 신(神)처럼 절대적으로 판정 내리고, 그리고 그 판단을 반드시 추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요할 수는 없다. 그것은 독단과 교조가 난무하는 전체주의 사회에서나 가능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왜 '학문과 사상의 자유'가 저 프랑스대혁명 이래 자유민주주의의 꽃으로 기능해왔는가 하는 것을 곰곰 생각해볼 일이다.

소통 아니라 소탕이 판친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의 상황은 어떠한가? 국정원을 비롯한 국가기관의 불법 대선개입에 대한 저항이 대내외적으로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는 현실이다. 대통령의 퇴진 요구로까지 비화하고 있다.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거의 모든 종교 조직이 총망라되고 있다. 게다가 철도노조 파업까지 가세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 1995년 창립이래 사상 유래 없는 공권력의 전국 민주노동조합 총연맹 사무실 침탈 사태까지 터지면서 전체 노동계가 실질적인 정권퇴진을 외치며, 단합된 투쟁의 대오를 구축하고 있다.

22일 민주노총에 진입한 경찰병력이 철도노조 지도부를 체포하기 위해 수색하고 있다.
▲ 18년만에 민주노총 투입된 공권력 22일 민주노총에 진입한 경찰병력이 철도노조 지도부를 체포하기 위해 수색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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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심상치 않은 분위기 속에서, 정부의 탄압에 공동 대응해나갈, 범국민적 반 박근혜 연대조직을 결성해야 한다는 제안까지 물살을 타고 있다는 보도도 뒤따른다. 이 연대체는 무엇보다 총체적 관권부정선거, 민주파괴 공안탄압 및 대선공약 파기 민생파탄 등 3 가지 의제에 매달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방안까지 제시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박근혜 정부의 성격을 '유신독재부활 정권'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시각도 뒤따른다.

현재 우리 대한민국을 엄습하고 있는 것은 '정치적 위기'가 아니라 '정치 자체'의 위기다. 대화가 없다. 오로지 대통령의 불통만 판칠 뿐이다. 소통이 아니라 소탕이 판세를 좌우한다. 이런 상황에서 어쩌면 우리 헌법 제1조가 '대한민국의 주권은 대통령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대통령으로부터 나온다'로 개정될지도 모른다는 깊은 우려가 국민 가운데 널리 확산하고 있는 낌새다.

위기의 시기에는 대담한 방법이 때로는 가장 안전하다는 것을 정치인들은 명심할 필요가 있다. 정치라는 것이 정치인에게 맡기기에는 너무나 심각한 문제라고 역설한 드골의 충고도 귀담아 들어야 한다. 정치인을 축출한 그 자리에 과연 어떤 집단이 대신 들어서겠는가. 정치란 베푸는 것이다. 국가와 정부가 뒤에서 궂은 일을 도맡아 함으로써 백성들에게는 편안히 생업을 돌보며 두 다리 뻗고 잠잘 수 있게 하는 것, 대저 이런 것이 올바른 정치인 것이다.

고생을 덜어주려는 정치인을 위해서라면 국민은 어떤 고생도 마다 않는다. 또한 생활을 풍족히 해주려는 정치인을 위해서는 어떠한 가난도 참고 넘긴다. 그러므로 안정을 도모해주는 정치인을 위해서라면 국민은 어떠한 재난이라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군중보다 한 발짝 앞에 나가면 지도자가 되고, 두 발짝 앞서 가면 방해꾼이 되며, 세 발짝 앞으로 나아가면 미친 사람으로 의심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가슴에 새겨둘 필요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특히 대통령은 누구보다도 힘을 사랑하는 정치인이 아니라 사랑의 힘을 가진 정치인으로 탈바꿈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래야 국민이 믿고 따른다. 그래야 안정과 평화와 번영이 도래한다.

덧붙이는 글 | 박호성 기자는 서강대 정치학과 교수입니다.



태그:#박근혜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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