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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혜영 씨가 자신의 하우스인 만봉농원에서 장미를 수확하고 있다. 윤 씨는 피붙이 하나 없는 전라도로 지난해 귀농을 했다.
 윤혜영 씨가 자신의 하우스인 만봉농원에서 장미를 수확하고 있다. 윤 씨는 피붙이 하나 없는 전라도로 지난해 귀농을 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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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랐다. 일반적인 귀농이나 귀촌 행태가 아니었다. 대개 남자들이 먼저 농촌으로 가서 터를 닦은 다음 가족을 부르는 게 수순이다. 하지만 윤혜영(57·전남 장성군 진원면)씨는 반대였다. 윤씨가 남편보다 앞서 내려와 농사를 지으며 남편의 퇴직 이후를 대비하고 있었다.

윤씨는 지난해 초 혼자서 전라남도로 내려와 장미를 재배하고 있다. 면적은 2640㎡(800평)짜리 양액재배 하우스 2동. 장미가 자라는데 최적의 조건을 갖춘 배지(培地)에 15㎝ 간격으로 장미가 가득 심어져 있다.

여성 혼자의 힘으로 꾸려가기엔 버거운 면적이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난생 처음 해보는 농사가 재미있다며 연신 싱글벙글이다. 어느 누가 보더라도 행복해 보인다는 게 얼굴로 금세 드러난다.

"남편의 고정수입이 있을 때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았어요. 만의 하나 실패를 하더라도 부담이 덜 하잖아요."

윤씨의 말이다.

윤혜영 씨가 키운 장미. 윤 씨는 전남 장성에서 1600평 규모의 장미하우스를 운영하고 있다.
 윤혜영 씨가 키운 장미. 윤 씨는 전남 장성에서 1600평 규모의 장미하우스를 운영하고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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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혜영 씨의 장미 하우스. 윤 씨는 지난해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귀농해 2년째 장미를 재배하고 있다.
 윤혜영 씨의 장미 하우스. 윤 씨는 지난해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귀농해 2년째 장미를 재배하고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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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씨가 피붙이 하나 살지 않는 남도와 인연을 맺은 건 1990년대 초. 당시 다니던 직장에서 남편이 광주로 발령을 받고서다. 윤씨 부부는 서울에서 나고 자란 터였다. 그때만 해도 광주에 내려가 살 일이 암담했다고.

"솔직히 부담이 컸어요. 무섭기도 하구요. 당시 시대상황이 그랬던 것 같습니다. 남편 혼자서 광주로 가 하숙을 했죠. 남편이 한동안 살아보더니 '이런 데 없다. 정말 좋다'고 하면서 내려오라더군요. 그렇게 10개월을 살았어요."

윤씨는 광주에 살면서 남도의 매력에 하나씩 젖어들었다. 열무에 싸먹는 보리밥은 지금 생각해도 군침 도는 음식이다. 그때 만난 이웃들도 다 좋았다. 특히 아파트 위·아래층에 살면서 만난 이웃과의 인연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다소곳하게 예쁜 장미. 윤혜영 씨는 9종의 장미를 재배하며 부농의 부푼 꿈을 꾸고 있다.
 다소곳하게 예쁜 장미. 윤혜영 씨는 9종의 장미를 재배하며 부농의 부푼 꿈을 꾸고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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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눈에 반했죠"...하루 빨리 장미 재배하고파

"재작년이었어요. 남도여행길에 우연한 기회가 생겨 광주의 장미농원을 구경갔는데요. 그때 하우스를 처음 봤어요. 안에서요. 하우스 안에 장미가 가득했는데, 환상적이더라고요.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어요. 한눈에 반했죠."

그날부터 윤씨는 남편(이성철)에게 장미를 재배하자고 했다. 남편도 반대하지 않았다. 윤 씨는 마음이 급했다. 하루라도 빨리 장미를 직접 재배하고 싶었다. 혼자라도 먼저 시작하겠다고 했다. 강한 의욕에 의구심을 덜어낸 남편도 팔을 걷고 나섰다.

"장미를 재배하기로 하고. 어디로 갈 것인가가 문제였는데요. 이왕이면 남도가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기후도 그렇고 집값이나 물가도 비교적 싸고요. 부담이 덜 하잖아요. 20년 동안 연을 이어온 이웃도 있고요."

그날부터 윤씨 부부는 주말마다 농사지을 터를 찾아 다녔다. 장성과 담양, 화순, 함평 등 광주 근교를 다 돌았지만 마땅한 곳을 찾지 못했다. 그러다가 지금의 하우스를 인수했다. 장미가 심어진 하우스였기에 고스란히 넘겨받아 열심히 일만 하면 됐다.

윤혜영 씨의 하우스에서 만난 장미. 윤 씨는 장미를 양액재배하며 옆으로 키워 수확하며 일손을 덜고 있다.
 윤혜영 씨의 하우스에서 만난 장미. 윤 씨는 장미를 양액재배하며 옆으로 키워 수확하며 일손을 덜고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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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혜영 씨가 키운 노란 장미. 윤 씨의 하우스에서 자라고 있는 아홉 색깔의 장미 가운데 하나다.
 윤혜영 씨가 키운 노란 장미. 윤 씨의 하우스에서 자라고 있는 아홉 색깔의 장미 가운데 하나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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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히 짐을 꾸려 혼자서 이사를 했다. 지난해 2월 1일이었다. 겁 없이 시작한 농사였다. 장미 재배법은 기존의 하우스 주인이 친절히 가르쳐주었다. 가까운 농업기술센터도 내 집처럼 드나들었다. 모두들 친절하고 자상했다. 농사가 어렵다는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틈틈이 선진농가도 찾아다녔다. 관련 서적도 사서 봤다. 밤에는 전남과학대학의 화훼원예과에 다니며 주경야독을 했다. 알 수 없는 증상의 이파리가 발견되면 뜯어갖고 가서 교수와 상담을 했다. 몸은 고됐다. 그러나 마음만은 즐거웠다. 농사를 짓는 것도, 농사기술을 하나씩 배우는 것도 행복이었다.

윤씨가 가꾸는 장미는 모두 9종. 색깔도 저마다 다르다. 하우스에는 형형색색의 장미가 아름답게 피고 있다. 꽃봉오리도 크다. 냉방비와 난방비 등 생산비를 아끼지 않는 덕분이다. '더 쓰고 더 받자'는 생각에서다. 영양제도 직접 만들어 듬뿍 준다. 하우스도 높게 지어져 햇볕이 많이 든다. 과학영농의 결실이다.

윤혜영 씨가 자신의 하우스에서 자라고 있는 장미를 살피고 있다. 윤 씨는 처음 해본 농사지만 누구보다도 열정을 갖고 즐겁게 일을 하고 있다.
 윤혜영 씨가 자신의 하우스에서 자라고 있는 장미를 살피고 있다. 윤 씨는 처음 해본 농사지만 누구보다도 열정을 갖고 즐겁게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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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혜영 씨가 수확한 형형색색의 장미. 그녀가 수확한 장미는 서울과 광주의 공판장으로 출하된다. 일반 농가보다 가격을 몇 배 더 받는다.
 윤혜영 씨가 수확한 형형색색의 장미. 그녀가 수확한 장미는 서울과 광주의 공판장으로 출하된다. 일반 농가보다 가격을 몇 배 더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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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생산된 장미는 비싸게 팔린다. 요즘 시세로 10송이 한 단에 1만 원을 웃돈다. 일반 농가보다 3∼4배는 더 받는 셈이다. 서울 양재동과 광주 풍암동 화훼공판장에서다. 상인들도 서로 가져가려고 줄을 선다. 배짱을 부리며 판다.

"작년 태풍 볼라벤 때 피해도 봤지만 행복해요. 꽃봉오리가 하나씩 맺혀가는 걸 보면 행복하죠. 공판장에서 제 꽃을 서로 가져가려는 상인들을 보면 뿌듯하고요. 매주 화요일 명세서와 함께 돈이 통장으로 들어오는데요. 그걸 보면 보람도 있고 재미도 있어요."

윤씨의 말이다. 서울에 사는 친구들도 와서 보고 다들 부러워한다는 그녀의 농촌살이. 남편이 내려올 때쯤 아담한 한옥도 한 채 지을 계획을 갖고 있다는 그녀에게서 더 알차고 행복한 내일이 그려진다.

윤혜영 씨가 수확한 장미를 출하하기 위해 포장을 하고 있다. 윤 씨는 꽃과 함께 행복한 중년을 보내고 있다고.
 윤혜영 씨가 수확한 장미를 출하하기 위해 포장을 하고 있다. 윤 씨는 꽃과 함께 행복한 중년을 보내고 있다고.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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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윤혜영, #장미, #귀농귀촌, #만봉농원, #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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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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