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첫정이 참 무섭다. 첫사랑과 헤어져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첫정은 참 떼기가 힘들다. 미국은 많은 사람들에게 때때로 애증을 불러 일으키는 나라이다. 10년 넘게 미국에 살다 왔지만, 나 또한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미국에 대한 애증을 떠나, 나는 뉴잉글랜드 만큼은 뇌리에서 지우기 어려울 것 같다. 미국에서 처음 집을 얻어 산 곳이 뉴잉글랜드의 심장부나 다름 없는 보스턴 근교였기 때문이다.

아이들 엄마도, 우리 아이들도 미국이라면 지금도 뉴잉글랜드를 꼭 떠올린다. 뉴잉글랜드는 미국 북동부 귀퉁이에 위치한 올망졸망한 6개 주를 일컫는 말이다. 매사추세츠, 코네티컷, 뉴햄프셔, 버몬트, 메인, 로드 아일랜드 주가 바로 그들이다.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하는 건 외국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공부 반, 놀기 반으로 신나게 뉴잉글랜드에서의 생활을 즐겼다. 하지만 뒤늦게야 안 사실인데, 엉겁결에 미국 땅을 밟은 딸과 아들에게는 당시 내가 모르던 고통이 각인돼 있었다.

우리 나이로 8살이었던 딸은 갑작스런 미국이주로 인해 이후 미국생활에서 긴장감이 습관처럼 몸에 배게됐다. 6살이었던 아들은 미국 유치원에서 급우와 다투고, 선생님으로부터 공평한 배려를 받지 못함으로써 미국인에 대해 두고두고 역겨움 같은 걸 갖게 됐다.

보스턴에서 10km 남짓 떨어진 알링턴이라는 동네에 집을 얻은 건 1995년 늦여름이었다. 그 뒤 약 11년 만인 2006년 가을 다시 여행을 하던 중에 과거 살았던 알링턴의 옛 아파트를 찾았다. 이후 또다시 5년만인 2011년 여름 아들과 함께 같은 아파트를 방문했다.

다시 찾은 이국의 옛 동네는 변함이 없었다.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 없다'라는 말도 있지만, 당시 다니던 MIT에서 집까지 약 10km를 잇는 대로 주변은 하나도 변한 게 없었다. 매사추세츠 애비뉴(Massachusetts Ave.)라는 길이 바로 그 대로였는데, 이 길 주변으로는 2006년 때 방문해보니 딱 건물 한 채 공사하는 걸 빼고는 1995년이나 달라진 게 없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자면, 안녕해도 너무나 안녕했다. 주말이면 틈나는 대로 놀러 다녔던 뉴햄프셔의 화이트 마운틴. 우리 식으로 치면 설악산이나 지리산 같았던 청정한 산악지역은 말해 무엇하랴.

그렇잖아도 뉴잉글랜드는 북미 대륙 전체를 통틀어 한반도와 가장 유사한 느낌을 주는 곳이다. 헌데 세월이 흘러 찾아도 변함이 없었으니, 옛정이 새록새록 솟아나는 것 같았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첫사랑과 우연히 길거리에서 조우했는데, 그가 변한 데가 없다면 그 야릇한 설렘을 어디에 비유할 수 있을까.

추억의 아파트
 추억의 아파트
ⓒ 김창엽

관련사진보기


아들이 22살이었던 2011년 여름 6살때 잠깐 살았던 보스턴 근교의 아파트를 방문,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 아들에게는 아픈 추억이 더 많은 곳이다. 아파트 뒷편의 호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아들. 아픈 추억 때문인지, 표정이 그다지 밝지 않았다.

초등학교
 초등학교
ⓒ 김창엽

관련사진보기


아들이 6살때 다니던 초등학교. 아들은 이 초등학교의 유치원을 다녔는데 급우와 다툼 때 선생님으로부터 공평한 배려를 받지 못한 게 오랫동안 미국에 정을 붙이지 못하는 이유가 됐다.

변화
 변화
ⓒ 김창엽

관련사진보기


신축 중인 매사추세츠 애비뉴 선상의 한 건물. 매사추세츠 애비뉴는 당시 나의 통학 길이었다. 헌데 10년도 넘게 시간이 흐른 뒤 찾아보니, 매사추세츠 애비뉴의 10km 거리 구간 가운데 변한 것은 딱 하나, 신축 중인 이 건물이었다(왼쪽). 해도 너무한 '안녕'이었다.

뉴잉글랜드는 겨울에 눈이 많이 오는 지역이다. 미국의 유명 스키장이 이 곳에 대거 몰려 있는 까닭이다. 겨울철 틈만 나면 달려 갔던 고속도로 바로 옆의 스키장도 그대로 였다(오른쪽).

화이트 마운틴
 화이트 마운틴
ⓒ 김창엽

관련사진보기


산천은 말 그대로 의구했다. 1995년 가을과 겨울 가족들과도 몇 차례 방문했던 화이트 마운틴 지역. 화이트 마운틴은 애팔래치안 산맥의 북쪽을 구성하는 산줄기이다. 탄성이 절로 나올 정도로 청정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이런 풍경 때문에 뉴잉글랜드에 첫정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부자들
 부자들
ⓒ 김창엽

관련사진보기


가을이 깊어가자 겨울 스키 시즌에 대비해 아버지와 아들이 하체 단련 겸 스키 훈련을 하고 있다(왼쪽). 다른 부자는 사륜전천후 차량을 타고 비포장도로를 달리고 있다(오른쪽 아래). 미국에서는 아들과 잘 노는 아버지들이 눈에 많이 띈다. 나는 아들에게 이때 충분히 잘해주지 못한 걸 후회한다. 돈을 벌러 미국에 왔다는 포항 출신의 한인(오른쪽 위). 돈만 벌면 꼭 고향에 돌아갈 것이라는 말을 되뇌곤 했다. 1995년 메인 주 포틀랜드에서 만났는데, 지금쯤 귀국했으려나. 

덧붙이는 글 | sejongsee.net(세종시닷넷)에도 실렸습니다. sejongsee.net은 세종시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담은 비영리 포털입니다.



태그:#아메리카, #첫정, #안녕, #뉴잉글랜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신축년 6학년에 진입. 그러나 정신 연령은 여전히 딱 열살 수준. 역마살을 주체할 수 없어 2006~2007년 북미에서 승차 유랑인 생활하기도. 농부이며 시골 복덕방 주인이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