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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희, 소영광 공동]

얼마 전 <오마이뉴스>에게 기사공모 메일을 받았다. "한심한 20대 개새끼들" "힘들죠? 멘토가 도와드립니다"로 시작하는 이 메일은 그동안 몇몇 멘토들의 호통과 조언을 듣느라 공연히 그들의 배만 불려준 청춘들에게 이제는 "직접 말하고 행동"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기사공모 메일에 사용된 고루한 수식들은 그런대로 평심하게 지나치고 말았는데, 메일을 확인한 이후로 까닭 없이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불편함은 청춘들에게 말을 건네는 방식에서 기인하는 불편함이었다. 과연, 이런 식의 장려에 의해서만 비로소(!) 청춘들은 말할 수 있는가?

내가 청춘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던 것은 2007년, 대학 캠퍼스에서였다. <88만원 세대>가 대학가를 휩쓸었고, 언론에서는 내남없이 20대를 '88만원 세대'로 부르기 시작했다. 20대는 청년실업과 저임금 문제로 불안한 세대이자, 스펙 쌓는 데만 부심한 나머지 정치에 무관심한 세대라고 표상되었다.

그때 몇몇의 친구들이 종이박스에 '청춘'이라는 두 글자를 적어 학교 곳곳에 비스듬히 붙여 놓았다. 문득 마주친 낱말, 청춘은 내게 퍽 인상적이었다. 나는 그동안 청춘이라고 하면 70-80년대를 살아낸 사람들이 자유를 부르짖으며 규범을 위반하고, 젊음을 향유했던 때에나 썼을 법한 용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또래 친구들이 직접 청춘이라는 낱말을 운용하는 것을 보고, 우리도 청춘을 누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뒤미처 깨달았다. 비루하고 케케묵은 단어라고 생각했던 청춘은 매일 아르바이트와 학자금대출 이자에 시달리며 고단하고 퍽퍽하게 돌아가던 내 일상에 모종의 해방감을 주었다. 그때부터 교내에서 개최되는 워크숍 주간에도, 삼삼오오 모여 만든 토론 자리에서도 청춘은 단연 최고의 화두였다. 때마침 나온 다큐멘터리 <개청춘>(2009)을 지기들과 어울려 관람한 후, 나는 20대가 20대의 삶을 조망하고 성찰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자기 삶을 꾸려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사뭇 푸르른 생각을 키웠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나는 여전히 20대이지만, 지금, 이런 기회로 청춘에 대해 사유한다는 것은 영 마뜩찮은 일이다. 어느새 청춘은 무능력한 20대와 동의어가 되어버렸고, 그것을 영유한 세대와 영유하지 못한 세대 간의 시뮬라크르적 대당이 형성되었다.

가령 청춘'을 영유한 세대는 그것을 영유하지 못한 세대에게 "왜 그렇게 사느냐! 잃어버린 청춘을 찾아라!"고 호통을 치거나, "우리가 잘못해서 너희들이 청춘을 잃어버렸다"고 사과를 하거나, "아프니까 청춘"이다, "힘내라 청춘"이라며 위로하기 시작했다.

한편 20대들은 이것이 "진짜 청춘"이라고 항변하거나, 도대체 "이것[이 삶]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이냐"고 따져 묻거나, "아프니까 어쩌라고" 식으로 냉소하며 기존의 청춘 언설을 거부해왔다. 이렇게 짐짓 세대 문제로까지 비화되거나 격상되며 청춘담론이 번성하는 사이, 역설적으로 나는 그 담론들에 무관심해져버렸다. 밀려오는 학자금 대출 이자와 상환 부담, 그리고 생활비의 압박을 한 아름 끌어안고서 나는 24시간 안에 학점관리 하랴, 아르바이트 하랴, 거기에 취업준비까지 해야 하는 팔자였다. 이런 팔자에 청춘담론은 일종의 사치처럼 느껴졌다. 또 드문드문 맞닥뜨린 뉴스며 칼럼들은 20대를 죄다 우울하게 묘사하거나, 취업에 목숨 걸고, 자기계발서만 탐독한 나머지 자기 언어조차 확보하지 못해 생각 없이 부유하는 좀비인 냥 표상하기 일쑤였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이렇게 자극적인 판타지물에 별 흥미가 없었다. 

그런데 어떤 사안들은 오히려 '무관심한 관심'(알랭 바디우)을 보여야만 선명하게 파악할 수가 있다. 무관심해진 자리에서 획득된 어떤 거리감이 사태를 보다 적실하게 포착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가령, 나는 어지럽게 번성해온 청춘담론들에서 저만치 떨어져서 오히려 다음과 같은 역설을 목도한다. 대개 어떤 담론이 번성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특정한 사안이 시대적으로 중요하거나, 특정한 담론을 생산하는 사람들이 그것으로 어떤 이득을 취하거나, 혹은 그저 담론 놀이가 재미있거나, 담론 놀이 말고는 아무것도 재미없는 경우이다. 청춘에 대한 논의는 아마 20대를 둘러싸고 있는 정치·경제적 상황들이 어떤 위기에 봉착했고, 그것에 대한 방법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시작됐을 것이다.

하지만 맛 집으로 소문난 곳에 가면 되레 실망만 더 크듯이, 청춘에 대한 지나친 소문은 정작 20대들의 삶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누구나 '청춘'에 대해 말하지만, 아무도 '청춘'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지는 주목하지 않았다. 에드거 앨런 포의 <도둑맞은 편지>에서처럼, 청춘들의 말은 바로 코앞에서 무시당하고 외면당했던 것이다. 청춘들의 말이 추호도 '날 것'일 리가 없으므로, 거창하게 포장된 어떤 담론들에만 코를 박고 있었던 셈이다.

이렇게 볼 때, 오마이뉴스의 기사공모는 사방에 구겨진 채로 널브러져 있는 무수한 청춘들의 말을 놓아두고, 왜 또다시 '어떤' 청춘들의 '말'과 '행동'을 요청하는 것인지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과연 오마이뉴스의 기사공모는 그동안 말없이 지내던 청춘들이 비로소 말할 수 있게 된 계기인가? 오히려 내가 보기에, 청춘들은 지금껏 쉴 새 없이 자기 나름의 문법과 음성으로 말하고, 행동해왔다. 다만, 이것이 학술적으로 번역되지 못한다거나 서점에 진열될 만큼 세련된 문체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들리지 않는 체'해왔을 뿐이다.

다시 말해, 우리 주변에, 생각보다 가깝게 흩뿌려져 있는 청춘들의 언어와 몸짓이 유의미한 '말'이나 '행동'으로 담론화 되지 못했을 뿐인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청춘들이 사연다운 사연을 말하지 못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발화되어온 그 말들을 그동안 어떻게 대접했는가에 있다. 그러므로 청춘들은 '한심한 개새끼들'이란 오명을 해명해야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오히려 청춘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온 쪽이 먼저 자신의 눈과 귀를 의심해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청춘#20대#청춘기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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