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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현의 책 <달리는 인생> 표지
 김창현의 책 <달리는 인생> 표지
ⓒ 오마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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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에 둘째가 태어난 이후 강연 같은 공식적인 일정 외에는 집에 틀어박혀 아내와 함께 육아 전투에 참여하고 있다. 하나 키우는 것과 둘 키우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라는 것을 절절히 느끼며 '셋째는 없다'는 신념이 나날이 더욱 강해지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직접 대면해서 사람을 만나는 대신 SNS를 통해 소통하는 횟수가 부쩍 늘었다. 재잘거리는 트위터는 천성에 맞지 않다보니 자연스레 길이 제한 없이 편안하고 진중하게 얘기를 풀어내는 페이스북을 선호하게 됐다.

한때 민주노동당에 몸담고 진보정치 활동을 열심히 했던 덕에 페이스북 친구 중에는 진보정치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달리는 인생>의 저자 김창현 역시 필자의 페이스북 친구다. 1981년 고려대학교 사회학과에 입학해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투신하다 독재정권의 탄압으로 감옥에 가기도 한 그는, 울산에서 진보정치 실험을 나래를 활짝 편 대표적인 진보정치인이다.

경남도의원과 광역시의원, 울산 동구청장을 역임했으며 민주노동당 울산지부장, 민주노동당 사무총장, 통합진보당 울산시당위원장으로 활동하던 그의 페이스북 타임라인에 언제부터인가 택시를 모는 얘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뭐지?

나는 왜 택시를 시작했을까? 2012년 4·11총선 실패가 그 출발점이다. (중략) 나는 오랜 기간 당직과 공직 생활을 통해 '노동자와 서민을 위한다'고 말해왔으나 실제 삶은 늘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서민적 삶과는 거리가 멀게 살아온 것이 사실이다. 또한 육체노동을 심하게 한 기억이 별로 없다. 천 원짜리 한 장을 두고 치열하게 다퉈본 적이 없다. (중략)

내 나이 훌쩍 쉰을 넘었다. 기술도 없는 내가 쉽게 할 수 있는 일을 찾기가 힘들었다. 좋기로 따지면야 자동차 하청업체 같은 곳이 좋겠지만 내 얼굴과 내 이름으로 취업을 허락하는 기업체가 없었다. 차선책으로, 제조업보다 취업이 용이할 거라는 생각에 택시를 선택했다. 그러나 택시 역시 선뜻 받아주는 회사가 없었다.

여러 곳에서 일단은 친절하게 맞아주었지만 아주 좋은 말로 거절했다. 그렇겠지. 민주노동당 사무총장 출신의 정치인, 색깔과 과격으로 덧칠된 대표적인 진보정치인. 얼마나 부담스럽겠는가? 한데 찾는 자에게 길이 있다고 했던가, 사장님이 대학 선배고 경영을 노조가 직접 맡는 화진교통에서 내게 기회를 주었다. - 프롤로그 중에서

"천 원짜리 한 장을 두고 치열하게 다퉈본 적이 없다"

저자는 늘 노동자와 서민의 편에서 일하고 그들을 대변한다고 주장했으나 과연 얼마나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또 그 처절한 고통을 알고 있는가에 대한 죄스러움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 죄스러움에 김창현은 2012년 여름부터 1년간 울산 시내부터 외곽까지 총 7만 킬로미터를 달린 택시기사가 됐다.

택시기사로 수많은 승객들을 만나 다양한 이야기를 접하며 가슴이 뭉클해지는 시간이 많았고, 이를 반드시 기록해야겠다는 결심이 생겼다. 그 하나하나의 사연들을 페이스북에 기록하기 시작했는데 바로 그 기록을 단행본으로 모은 것이 <달리는 인생>이다.

울산에서 인지도 높은 진보정치인 김창현이 택시를 몰다보니 생기는 웃지 못할 일들도 있다. 하루는 협성노블리스에 사는 간호조무사를 태웠는데 울산 남구 달동의 한의원에 근무하는 아가씨였다.

"어? 아저씨 정말 김창현씨랑 많이 닮았네요."
택시 조수석의 자격증을 보더니
"어머, 이름도 김창현이네. 호호호. 참 신기하다. 아저씨. 주변에서 그런 얘기 많이 듣죠?"
"하하. 제가 바로 김창현 맞습니다."
"알아요. 호호. 자격증에 나와 있네요. 그러니까 닮았다는 거죠."
"허 참. 왜 이리 안 믿지요? 진짜라니까요. 통합진보당 김창현을 잘 아세요?"
"잘 알진 않지만 그 김창현씨는 얼마나 예리하고 말도 잘하고 인물도 좋은데요."
"만나보셨나요?"
"그럼요. 시장에서 악수도 하고 텔레비전 토론도 봤는데요. 아주 샤프해요."
"지금 저는 안 샤프한가 보지요?"
"아저씨는 살도 찌고 동네 아저씨 같잖아요."

졸지에 샤프하고 말 잘하고 인물 좋은 진보정치인에서 살찐 동네 아저씨 택시기사가 된 김창현은 택시를 운전하며 많은 변화를 경험하게 됐지만, 특히 무엇보다 듣는 훈련이 된 것을 가장 큰 변화로 꼽는다.

정치인들은 정말이지 잘 듣지 않는다. 짧은 시간 내에 자기를 알려야 한다는 강박관념 탓인지 주장은 난무하지만 남의 아픔을 차분히 듣는 데 인색하다. 그런데 김창현은 택시를 하며 하루 열두 시간 앉아 많은 서민들의 애환을 듣는 흔치 않은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승객들의 아픔에 공감하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절절한 심정이 되어 상담가가 되기도 했다.

하루 열두 시간씩 앉아서 들은 서민들의 이야기

10월 30일 오후 7시부터 울산 북구청 대강당에서 열린 <달리는 인생> 김창현 저자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10월 30일 오후 7시부터 울산 북구청 대강당에서 열린 <달리는 인생> 김창현 저자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 박석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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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달리는 인생>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일화가 있다. 60대 중반 할머니의 승객의 얘기다.

"임자 있는 여자를 건들면 안 돼요."
"예? 무슨 말씀인지?"
"상처가 뭔지 알아? 시퍼런 부엌칼로 그으면 살이 쩍 벌어져. 피가 줄줄 흐르지. 이게 상처야. 시간이 지나면 꿰매주지 않아도 아물어. 물론 아주 흉하지만, 나중에 건드려도 아프지 않아. 하지만 마음에 생긴 상처는 아물지를 않아. 늘 피가 줄줄 흐르고, 건들면 너무 아파 소리르 치게 돼. 이게 마음의 상처야."

할머니의 얘기는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장에 좌판을 펼쳐놓고 나물을 파는 옥이 할매가 남편이 바람피운다고 귀띔을 해주었다. 설마 했는데 어느 날 한 여자가 찾아왔다고 한다. 자신보다 10년은 젊은 여자. 당시 할머니는 50대 중반이었는데 그 여자는 40대 초반이었다. 그 여자는 할머니에게 남편을 양보할 수 없겠느냐며 선전포고를 했다. 그 여자도 역시 남편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자신은 헤어질 수 없으니 남편을 나눠 가지자는 것이었다.

당시 할머니 집은 크게 하던 장사가 어려워진 시절이었다. 남편도 사업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밤낮없이 뛰고 있었다. 남편이 외도를 해봐야 얼마나 갈 수 있겠나 하는 오기도 있어서 해볼 테면 해보라고 그냥 뒀다. 그때부터 남편은 돈 생기면 휙 나가서 사나흘 들어오지 않다가 다시 집에 들어오고, 또 나가고 하는 생활을 4년간 지속했다. 그러다 남편 역시 나이 들어 힘이 없어지고 자식들도 출가하니 슬슬 집에 들어앉는 시간이 많아졌다. 사업도 안정되고 손자도 생기니 철이 드나 싶었다.

"얼마 전 ○○시장에 갈 일이 생겼어. 거기서 그 여자랑 영감을 딱 만난 거야. 10년 전 그 옥이 할매 말이 확 떠오르더군. 둘이 머리를 맞대고 소곤소곤 정말 다정스레 얘기를 하고 있었어. 좀 더 가까이 가보니 글쎄 여자 다리를 주물러주고 있더라고. 순간 눈에 불이 확 나는 것 같았지. 아니 이 영감태기가 평생 나랑 살면서 언제 손이라도 제대로 잡아줬냐 말이지. 도란도란 남들처럼 이바구라도 한 적이 있나. 이런 생각을 하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어."

할머니는 사랑을 받고 싶었던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사랑을 진심으로 나누고 싶었던 거다. 순간 할머니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단다. 나도 애 둘 낳고 힘들어하는 아내한테 잘 해줘야겠다.

책이 나오기 전에 페이스북에서 택시기사 김창현의 글을 읽으며 궁금한 것이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대화를 생생하게 재현하는지 말이다. 그래서 혹시 녹취를 하는지 슬쩍 댓글로 물어봤는데, 대답인즉슨 대화를 고스란히 기억해서 다시 글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한다. 부럽다. 책을 읽으며 나도 택시기사가 되고 싶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박봉에 힘겨운 일이라는데 말이다. 어쩌랴. 택시기사 김창현의 생생한 글 때문인 것을. 나도 애 둘 키우다보니 사람이 고픈가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출판전문지 <기획회의>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달리는 인생 - 김창현의 택시일기

김창현 지음, 오마이북(2013)


태그:#김창현, #달리는 인생, #오마이북, #택시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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