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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공정여행 A스토리 협동조합 "대구 최초 국사 여행" 실시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의 '2013 사회적기업 육성사업'에 선정된 '대구공정여행 A스토리 협동조합'(www.astorytour.com)이 대구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국사 여행'을 실시한다. 11월 30일 하루만에 빙하기에서 현대사까지 한국사 전반을 답사하는 이번 여행의 여정은 앞산 공룡발자국(빙하기), 파동 바위그늘(구석기), 상동 유적(청동기), 불로 고분군(철기), 팔공산 갓바위(신라), 부인사와 신숭겸 유적지(고려), 약전골목과 망우당공원(조선), 상화 고택(일제강점기), 2·28유적(현대)이다. 해설은 <역사유적과 문화유산 답사로 보는 대구와 풍경>과 <주제가 있는 대구여행>을 펴낸 기자가 맡는다. 아래의 글과 사진은 대구에 깃들어 있는 우리나라의 국사의 대표적 답사지들을 미리 살펴본 것이다. 

대구경북은 본래 거대한 호수였다. 사진은 앞산 고산골의 공룡발자국
 대구경북은 본래 거대한 호수였다. 사진은 앞산 고산골의 공룡발자국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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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억6000만 년 전, 한반도 땅덩어리는 적도 인근에 있었다. 그것이 2억 년에서 1억5000만 년 전쯤 지금 위치로 천천히 옮겨왔다. 또한, 공룡이 뛰어놀던 1억4500만 년 전부터 6500만 년 전에는 대구와 경북은 땅이 아니라 거대한 호수였다. 당연히 전국 16개 광역 중 현재 호수가 가장 많은 곳은 경북이고(5547개 호수 보유), 공룡발자국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 역시 대구경북이다.

비슬산 자락인 대구 앞산 고산골 등산로 입구에도 공룡발자국이 남아 있다. 게다가 공룡발자국 주위에는 연흔(바위에 새겨진 물결 무늬), 건열(물이 마르면서 암석에 남은 거북등 같은 흔적)도 볼 수 있다. 이들은 모두 대구 전역이 깊은 물에 잠겨 있었다는 사실을 증언해주는 빙하기 유적들이다.

대구에서 발굴된 본격적인 구석기 유물은 2006년 월성동 아파트 건축 공사 때 나왔는데, 국립대구박물관 보관되어 있다. 신석기 유물은 서변동에서 2000년에 많이 출토되었다. 그래서 '서변동 선사유적 전시관'이 지어졌다. 사진은 구석기인들의 주거지로 추정되는 '파동 바위그늘'로, 2000년에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대구에서 발굴된 본격적인 구석기 유물은 2006년 월성동 아파트 건축 공사 때 나왔는데, 국립대구박물관 보관되어 있다. 신석기 유물은 서변동에서 2000년에 많이 출토되었다. 그래서 '서변동 선사유적 전시관'이 지어졌다. 사진은 구석기인들의 주거지로 추정되는 '파동 바위그늘'로, 2000년에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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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발자국을 뒤로 한 채 앞산자락을 타고 남쪽으로 나아가면 구석기 사람들이 살았던 자취가 나타난다. 사람들이 움집을 짓고 살아가는 것은 농경 사회가 시작된 신석기 이후이므로, 수성구 파동에서 신천을 건너면 닿을 수 있는 이곳의 구석기 유적은 집터라고는 할 수 없다. 구석기인들은 동굴 생활을 하거나, 비바람과 맹수를 피해 경사가 심한 커다란 바위 밑에서 살았다. 그래서 이곳의 구석기 유적을 '파동 바위그늘'이라 부른다.

한국은 "고인돌의 나라"... 대구는 본래 "고인돌의 도시"

파동 바위그늘에서 신천을 타고 하류로 내려오면 상동교에 닿는다. 상동교의 수성구 지역에 대구한의대병원이 있고, 그 병원과 정화우방팔레스아파트 사이에 '상동 유적'이 작은 공원처럼 꾸며진 채 자리하고 있다. 본래 정화여고가 있던 곳인데, 아파트 단지로 변하면서 학교 일대의 고인돌 유적을 한곳에 모아두었다.

상동 유적
 상동 유적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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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6만여 기 중 5만여 기의 고인돌을 보유한 우리나라는 "고인돌의 나라"로 유명하다. 그리고 대구는 1945년 해방 직후까지만 해도 "고인돌의 도시"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도시 확장 과정에서 대부분의 고인돌이 자취를 감추었고, 대구보다 적은 고인돌을 가진 고창 강화 등이 세계문화유산 보유지로 지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대구로서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부터 사람들 사이에 신분과 계급의 차이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유적이다. 아래에서 아무런 부장품도 발견되지 않는 경우도 있어 제단으로 쓰인 것으로 여겨지는 사례도 있지만, 대체로 고인돌은 당시 사람들의 무덤이었다. 따라서  대구에 고인돌이 유난히 많았다는 것은 청동기 시대의 대구 일원에 강력한 부족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세계 유일의 산정 갓 쓴 돌부처

대구에 남아 있는 철기 유적 중 가장 뛰어난 역사적 의의를 자랑하는 것은 불로고분군과 달성토성이다. 211기나 되는 고분을 거느린 불로고분군은 우리나라의 고분군들 중 단일 장소에 가장 많은 고분들을 밀집하여 보유한 공로(?)로 국가사적 26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풍납토성과 더불어 우리나라 고대 축성술을 증언하는 2대 토성 유적으로 인정받는 달성토성 또한 국가사적 62호의 영예를 누리고 있다.

그런가 하면, 신라가 남긴 유적 중 가장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것은 '갓바위'이다. "갓바위 부처"로 호칭해야 마땅할 이 석불을 대중들은 '부처'도 떼어버린 채 "갓바위"라는 애칭으로 부르고 있는데, 머리에 갓을 쓴 특이한 모습으로, 그것도 산 꼭대기에 좌정해 있는 돌부처로는 세계 유일의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본래 미륵불이었던 이 석불이 현실의 복을 바라는 대중들의 욕망에 밀려 약사불로 전환되었다는 사실이다.

정면에서 본 갓바위(왼쪽)와 왼쪽에서 본 갓바위.
 정면에서 본 갓바위(왼쪽)와 왼쪽에서 본 갓바위.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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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가 대구에 남긴 유적의 대표는 '신숭겸 장군 유적'이다. 팔공산 아래에서 927년 견훤과 큰 전투를 벌인 왕건은 신숭겸이 임금옷을 대신 입고 왕인 체하며 전사하는 틈을 타 도망친다. 하지만 (왕건군이 견훤군에게 깨진 고개라는 뜻의) 파군재 일대에서 견훤에 참패해 겨우 목숨을 건진 왕건은 대구 일원에 연경, 무태, 살내, 왕산, 일인석, 시량리, 불로, 안심, 반야월, 안일암, 왕굴, 은적사, 임휴사, 초례봉 등 무수한 지명을 탄생시켰다. 또 신숭겸장군유허비, 표충단 등도 남겼다. 아래의 지도는 대구에 얼마나 많은 '왕건'이 남아 있는지를 독자들이 실감있게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기자가 그림으로 그려본 것이다. 물론 실측도와 일치하지는 않는다.

대구에 산재해 있는 왕건 유적으로, 연두색 바탕에 지명을 표시해 두었다. (해안과 반월당도 왕건  관련 유적으로 아는 이들도 있지만, 사실은 아니다.)
 대구에 산재해 있는 왕건 유적으로, 연두색 바탕에 지명을 표시해 두었다. (해안과 반월당도 왕건 관련 유적으로 아는 이들도 있지만, 사실은 아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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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의 아들인 신문왕은 서울을 금성(경주의 당시 지명)에서 달구벌(대구의 당시 지명)로 천도할 계획을 세운다. 그래서 장산(경산의 당시 지명)까지 직접 답사도 한다. 그러나 경주에 살면서 기득권을 누려온 고관들의 극력한 반대에 밀려 뜻을 이루지 못한다. 만약 신문왕 때 서울을 대구로 옮겼더라면 우리나라 역사는 지금과 또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 터이고, (선덕여왕 때 만들어진 첨성대, 분황사 등 일부만 제외하면) 불국사, 다보탑, 석가탑, 석굴암, 에밀레종 등등 통일신라가 남긴 위대한 역사문화유산이 모두 대구에 있을 것이다. 대구로서는 정말 아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고려 시대에 들어서도 대구 발전에 커다란 손실을 남긴 역사적 사건이 발생한다. 세계문화유산인 해인사의 팔만대장경보다 무려 200년이나 전에 만들어진 초조대장경이 팔공산 부인사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그것이 1232년 몽고군의 2차 침입 때 전소되어버린 것이다. 만약 초조대장경이 지금 온전히 살아 남아 있다면, 부인사는 해인사보다도 더 유명할 것이고,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관광객들이 대구를 찾을 것 아닌가. 다시 한번 신문왕의 천도 실패와 무지한 몽고군들의 만행이 안타깝게 여겨진다.

몽고군이 불을 지른 흔적으로 지금도 남아 있는 부인사의 석재들
 몽고군이 불을 지른 흔적으로 지금도 남아 있는 부인사의 석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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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 남아 있는 대표적인 조선 시대 유적으로는 '홍의장군' 곽재우 유적,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한약 도매상 밀집지로 기네스북에 오른 약전골목,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유적을 들 만하다. "나라가 이꼴인데 어찌 내 무덤을 그럴 듯하게 만들 수 있겠느냐. 그냥 봉우리도 없이 납작하게 만들고 말아라"는 취지의 유언에 따라 봉분도 없이 허술한 무덤을 남긴 곽재우는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누구보다도 먼저 의병을 일으킨 의인이고, 국채보상운동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모금운동이라는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식민지 유적 답사로는 1919년 기미독립선언 때 대구부민(지금의 시민)과 학생들이 태극기를 휘두르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3.1운동로' 걷기를 추천할 만하다. 대구 3.1운동 발상지인 서문시장과 계성학교에서 출발하여 (대구 최초의 서양식 주택 밀집지인) 선교사주택 단지를 지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남긴 '국민 저항시인' 상화 고택,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서상돈 고택, 독립군 장군이자 이상화 시인의 형인 이상정 고택, 약전골목, 최제우 처형지인 관덕정으로 이어지는 이 길은 대구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의 현대사를 극명하게 증언해준다.

명덕로터리에 있던 2.28기념탑이 두류공원으로 옭겨가고 난 뒤 남긴 표지석(왼쪽), 경북고(가운데)와 대구고의 2.28기녑탑
 명덕로터리에 있던 2.28기념탑이 두류공원으로 옭겨가고 난 뒤 남긴 표지석(왼쪽), 경북고(가운데)와 대구고의 2.28기녑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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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의 독립 이후 우리나라의 1950-60년대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사건들에는 (1) 해방 이후 좌우 대립, (2) 1950년 6월 25일의 전쟁, (3) 1960년 4월 19일의 혁명, (4) 1961년 5월 16일의 군사정변(국정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의 표현)  등이 있다. 대구는 이 네 가지 대사건들과도 모두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다. 해방 이후 좌우 대립과 연관해서는 1946년 10월 1일 발생한 '대구 사건'이 있고, 6.25전쟁과는 다부동전투와 학도의용군, 4월혁명과는 그 노둣돌이 된 2.28학생의거, 군사정변과는 박정희, 전두환 독재정권이 연관되어 있으며, 이런저런 답사유적들을 남기고 있다.

이제 대구근대역사관 내부 전시실의 벽에 게시되어 있는 '2.28 민주운동의 의의'를 읽으면서 '하루만에 답사하는 대구 국사 여행'을 마칠까 한다.

2.28민주운동은 3.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마산의거와 4.19혁명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와 제1공화국의 붕괴를 이끌어냈다. 이 땅에 처음으로 민권 민주주의가 승리하는 위대한 역사가 창조된 것이다. 당시 이와 유사한 처지에 있던 제3세계 국민들에게도 희망의 빛을 던졌고, 60년대의 세계적 학생운동으로 번져나갔다. 2.28민주운동은 국민이 주권자임을 역사상 처음 체험적으로 깨닫게 했고, 세계사의 변혁에도 하나의 불씨가 되었다.


태그:#A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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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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