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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시골집에는 널찍한 마당이 있다. 열 평 남짓한 그 마당은 만능의 공간이었다. 이른 봄 햇살 화창한 날의 마당은 돼지막과 외양간에서 겨우내 묵었던 거름이 나와 고슬고슬하게 말려지는 건조장이었다. 여름에는 겨우내 쇠죽에 들어갈 풀이 마당에서 건초로 만들어졌다. 가을철 마당에서는 추수가 이루어지고, 탈곡한 곡식이 널리기도 했다. 마당은 일 년 내내 농사와 노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뿐인가. 마당은 집안의 크고 작은 잔치가 이루어지던 '연회장'이기도 했다. 그곳은 잔치 준비를 하는 흥성이는 주방인 동시에, 결혼식이나 회갑 잔치가 벌어지던 널찍한 '홀'이었다. 태어나 처음 맞이하는 돌 잔치도 이 마당에서 이루어지고, 인생 한 바퀴를 기념하는 회갑 잔치도 마당 차지였다. 마당에서는 생애 마지막 '잔치'인 장례식이 펼쳐지기도 했다.

아이들은 마당을 놀이터 삼아 놀면서 사철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뜰방과 마당을 오가면서 했던 구슬치기는 가장 멋진 놀이였다. 명절 때마다 하던 동전 치기, 추운 겨울날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하던 팽이치기나 딱지치기도 마당에서 해야 더 재미가 있었다. 사람이 태어나고 자라 일하면서 살다가 저승으로 가는 마지막까지 우리와 함께하는 공간이 마당이었다.

마당은 순수한 한국어 단어로서 의미의 범위가 넓어서 그 함축적인 의미, 특히 정서적인 깊이를 외국인이 이해하기 어렵다. 다양한 의미의 배경이 급속히 사라지는 한국 전통의 하나인, 예전에 시골 마을에 있던 작은 농가의 뜰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 단어는 실제로는 아무도 가져보지 못한, 평화로운 시골집에서 보낸 행복한 유년의 분위기를 담고 있다. (44쪽)

서독 최초 한국학 박사학위 받은 그가 보는 한국

 <민낯이 예쁜 코리안> 겉그림
<민낯이 예쁜 코리안> 겉그림 ⓒ 학고재
<민낯이 예쁜 코리안>의 저자 베르너 사세는 독일 태생의 한국학자다. 1960년대부터 한국과 인연을 맺은 그는, <계림유사>(12세기 초에 송나라 사신 손목이 지은 것으로, 고려의 풍습·제도·언어 따위를 소개하고 있는 책)에 나타난 고려 방언 연구로 당시 서독 최초로 한국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세는 자신의 교수 자격을 신라 향가에 대한 두 권짜리 저작으로 얻었다. 조선 전기의 국어를 연구하는 이들에게나 알려져 있는 악장 텍스트 <월인천강지곡>(1449년에 세종이 석가모니의 공덕을 찬양하여 지은 노래를 담은 책)을 한국어로 강의하고, 여기에 풍부한 주석 자료를 담아 <월인천강지곡> 독일어 번역본을 펴내기도 했다. 한국어와 한국문화, 한국에 대한 그의 인식의 깊이를 넉넉히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들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한국 문화를 대표하는 열여섯 개의 열쇳말을 따라 내용을 전개하고 있다. 이들 내용을 읽을 때 저자가 독자들에게 유념하기를 바라는 핵심어는 '재발명'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콘크리트 고층 아파트 단지에 사는 현대의 중산층 도시인들이, 논으로 둘러싸여 나무 기둥과 흙으로 지은 집에서 살던 농경 사회 사람들이 형성한 문화 요소들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15쪽)

오늘날 한국(인)은 한편에서는 전통 가옥 지역을 철거하면서, 또 다른 한편에서는 흙담과 전통 마을 분위기를 지키는 데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그렇게 해서 보존된 한옥 마을이나 '슬로 시티'가 관광지로 개발돼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있다. 저자가 설명하는 '재발명'의 구체적인 사례들이라 할 만하다.

'재발명'이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책을 훑다 보면,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우리의 부끄러운 속살을 만나기도 한다. 나도 자주 그렇게 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부모가 어린 아이들이 흙에서 뒹굴며 노는 '꼴'을 보지 못한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흙밭에서 개구진 장난이라도 할라치면 눈을 흘기며 제지한다.

예전에 흙은 사람에게 필요한 식량을 주는 원천으로 농부들이 귀하게 여겼지만, 요즘에는 대다수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먼지와 더러움으로 전락했다. (32쪽)

'마당'은 무엇이든 일어날 수 있는 장소

저자가 보기에 물질주의와 탐욕에 물든 현대 한국의 결혼 문화도 부끄러운 자화상 중의 하나다. 신랑 집에 보낸 3000만 원이 충분치 않다고 했다는 사례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2009년 기준으로 신혼부부가 결혼식을 하는 데 쓴 평균 비용 1억 7250만 원 중 새집을 구하는 데 쓴 돈이 71%에 이른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갑자기 나는 결혼율이 감소하고 결혼을 하려는 사람들의 연령이 건강한 자녀를 갖기에는 위험할 정도까지 높아지는 이유를 이해하게 되었다. 또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독신으로 지내는 이유도 이해가 되었다.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부모가 사랑으로 양육하는 아이들은 그 사회의 미래이며, 만일 여기에 변화가 없다면 한국은 미래가 없고 최근의 모든 노력도 무의미해질 것이다. (209쪽)

저자도 솔직하게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높은 자살률과 정신 없는 도시 생활, 환경문제, 스트레스 받는 사무직 근로자들의 질 낮은 식습관, 부모와 학교 시스템이 아이들에게 가하는 테러, 엄청난 빈부 격차, 정치·경제의 부패 등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나는 무엇보다 돈에 목숨을 거는 물신주의를 현대 한국의 가장 심각한 병폐로 여기고 있다. 이런 점들만 보면 한국의 내일은 절망으로 가득찰 것 같다.

하지만 다른 한편을 찬찬히 살펴보면 작은 희망이 생겨나기도 한다. 글머리에도 소개한 마당은 전통이나 공동체적인 주제 의식을 강조하는 각종 문화 활동이나 행사를 가리키는 데 두루 쓰인다. 저자의 말처럼, 이것은 '마당'이 '한국적인' 무엇에 대한 긍정적이고 정서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국정원과 사이버사령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들이 작년 대선에 부당하게 개입한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도 이 나라 대통령과 집권 여당은 전 정권만을 탓하며 꿀 먹은 벙어리 행세를 하고 있다. '아버지 대통령 각하'라는 말이 나오고, '간첩이 날뛰는 세상보다 유신 시절이 더 좋았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도는 까닭도 대통령의 그런 태도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면 지나칠까. '한국은 독재 좀 해야 한다'는 말에 이르러서는 광기마저 느껴진다.

그런 대통령과 여당을 향해 수많은 시민이 수개월째 '마당'에 나와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사실은 '마당'이라기보다 '광장'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마당이든 광장이든 많은 사람이 결코 지금 상황을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고 있다는 점이다. 대통령과 여당은 이들 '무지렁이'를 결코 만만히 보아서는 안 된다. 저자의 말처럼, 마당은 '무엇이든 일어날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민낯이 예쁜 코리안> (베르너 사세 지음, 김현경 옮김 | 학고재 | 2013. 10. 15 | 243쪽 | 1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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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낯이 예쁜 코리안 - 독일인 한국학자의 50년 한국 문화 탐색

베르너 사세 지음, 김현경 옮김, 학고재(2013)


#<민낯이 예쁜 코리안>#학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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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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