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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수 교육부 장관님께.

지방의 한 고등학교에 근무하는 일개 교사의 편지가 장관님께 전달될 수 있으리라 감히 기대하지는 않지만, 피끓는 심정으로 몇 글자 담아봅니다. 올해 초 새 정부의 조각 당시 장관님을 믿고 두둔했던 '팬'으로서, 요즘 학교 안팎 돌아가는 꼴이 한심하다 못해 안타깝고 서글프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현 정부의 첫 장관 인사는 그야말로 '가관'이었습니다. 장관 한 자리 차지하려면 이른바 위장 전입과 탈세, 논문 표절 등 '비리 3종 세트'는 기본으로 갖춰야 한다는 비아냥거림이 유행이었으니까요. 장관 후보자들이 줄줄이 낙마하는 인사파동의 와중에서도 여당은 물론, 야당에서까지 나름 도덕적이고 전문성을 갖췄다고 평가받은 분은 모르긴 해도 장관님이 유일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비록 지난 대선 때 제가 지지하는 후보가 당선되지는 않았지만, 교육부의 요직을 두루 섭렵한 정통 관료 출신 최초의 교육부 장관을 맞는 느낌은 솔직히 나쁘지 않았습니다. 인사 청문회 당시 '5·16을 쿠데타로 부르지 못함을 양해해 달라'는 답변에 적이 당황스럽긴 했지만 적어도 교육이 이전투구의 정치판에 휘말리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변 지인들이 내정된 장관들의 면면을 살펴보며 이전 이명박 정부 때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것 같다며 혀를 끌끌 찼을 때도 저는 장관님의 이름을 거론하며 절망하기는 이르다고 설득하기까지 했습니다. 과거 장관님은 국제고와 특목고 확대 추진에 반대했으며, 고교 다양화 정책이 고교 서열화 입시 경쟁을 부추긴다며 줄곧 비판적 입장에 서서 진보 성향의 교육감들과 전교조의 지지를 받을 정도였습니다.

제가 아는 장관님은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분...

서남수 교육부 장관 후보자가 지난 2월 28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교육과학기술위원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다.
 서남수 교육부 장관 후보자가 지난 2월 28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교육과학기술위원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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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고 했던가요. 저는 장관님께서 정통 관료 출신으로서 균형추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반 년 남짓 동안 장관님이 보인 행보는 이전의 정치인 출신 장관들 못지않은 듯합니다. 교육 전문가로서의 소신과 기개는커녕 정권의 칼춤에 놀아나며 신명을 돋우고 있는 형국이라고나 할까요.

얼마 전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와 관련해 편향적 역사 인식과 오류, 표절 문제 등으로 교과서 검정을 취소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했을 때, 장관님은 대책이랍시고 생뚱맞은 제안을 내놓으셨죠. 이참에 교학사 교과서를 포함해 8종의 한국사 교과서 모두를 수정·보완하자고. 삼척동자도 다 아는 전형적인 '물 타기' 수법이었습니다.

그 황당함이 채 가시기도 전, 교육부 이름으로 교사들이 전교조의 '법외노조화'에 반대해 집중 상경 투쟁 등 단체행동을 할 경우 징계하겠다는 협박성 공문을 전국의 학교에 보내셨더군요. 전교조 조합원들은 단체행동권이 없으니 학교장의 허가를 받았더라도 근무 시간과 상관없이 집회에 참가하면 국가공무원법과 교원노조법에 위반된다는 친절한 설명도 덧붙였습니다.

그것으로도 안심이 안 됐던지, 학교장에게 교사들이 집회 참가를 위해 연가를 신청하면 불허하라고 지시하면서 위반할 경우 법에 따라 엄중히 대처하겠다고 적혀 있더군요. 말하자면, 교사의 연가를 허락하면 학교장도 처벌하겠다며 을러댄 셈이죠. 교육부의 공문대로라면 교사는 퇴근 후에도, 주말에도 집회에 참여하면 안 됩니다.

얼마 전 고용노동부에서 현직 교사가 아닌 해고자를 조합원으로 가입시켰다는 이유로 전교조를 문제 삼았고 전교조는 '법외 노조'도 불사하겠다고 맞섰습니다. 교육부는 이러한 상황에서 전교조를 두둔하거나 적어도 중재하려는 노력을 보여줄 것으로 믿었습니다. 제가 아는 한, 장관님은 그 누구보다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분이기 때문입니다.

고용노동부 이중대 자처... 보기 참 딱합니다

9월 24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회의실에서 전교조 관계자들이 '전교조 노동조합 설립취소에 대한  정부의 개입 중단'을 요구하는 '민주주의 말살 전교조 탄압 규탄 및 총력 투쟁 선포 전교조 기자회견을 연 가운데 전교조  김정훈 위원장이 기자회견문을 낭독하고 있다.
▲ "전교조 탄압을 즉각 중단하라" 9월 24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회의실에서 전교조 관계자들이 '전교조 노동조합 설립취소에 대한 정부의 개입 중단'을 요구하는 '민주주의 말살 전교조 탄압 규탄 및 총력 투쟁 선포 전교조 기자회견을 연 가운데 전교조 김정훈 위원장이 기자회견문을 낭독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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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번 공문으로 여지없이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입니다. 아예 고용노동부의 '2중대'를 자처하고 있는 셈이니까요. 장관님! 해고자 9명 때문에 6만여 명이 가입된 전교조를 불법화하겠다는 게 대체 말이 된다고 보시는지요. 교육을 책임지는 분으로서, 고용노동부의 주장처럼 그저 '법이니까 따르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으시겠죠.

그들이 문제 삼은 9명의 해고자들이 무슨 비리에 연루되어 학교에서 내쫓긴 게 아니잖습니까. 자신에게 불이익이 올 걸 뻔히 알면서도 기꺼이 그것을 감수한 그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주지는 못할망정, 형식 논리를 내세워 그들이 몸 담았던 조합에서 탈퇴 시키라는 건 과연 어느 나라의 법도인가요.

어쩌면 전교조 활동을 하다 해고된 조합원이 있다면, 생계를 꾸리고 사회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그런 해고자들을 보호하는 것이 노동조합의 존재 이유가 아닐는지요. 만약 해고와 동시에 조합원 자격이 박탈된다면 어느 누가 열심히 활동을 하려 할 것이며, 누군들 노동조합에 가입하겠습니까.

합법화된 지 벌써 14년이 지난 전교조를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하루 아침에 불법화하겠다는데 손 놓고 가만히 있을 조합원이 어디 있을까요. 집회에 참여하면 처벌한다는, 달랑 공문 한 장으로 교사들의 분노를 잠재울 수 있으리라 여기시는지요. 고용노동부의 막무가내 칼춤에 부화뇌동하여 장관님의 교육부마저 상식을 배반해서야 되겠습니까. 보기 참 딱합니다.

지난 대선 때 국정원이 전교조를 '내부의 적'으로 규정하더니, 불과 몇 달 만에 고용노동부가 나서서 불법화 시키고, 교육부가 전교조를 교사들로부터 고립해 와해시키려는 일련의 움직임이 마치 퍼즐 조각처럼 맞춰지고 있습니다. 눈에 뻔히 보이는 그 어설픈 공작이 현 정부의 뜻대로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요. 시간은 다소 걸리겠지만 단언컨대, 필패입니다.

물론, '군계일학' 장관님마저 변절케 한 정부의 '강공'에 움찔거리는 분이 더러 있긴 합니다. 얼마 전 제가 근무하는 학교의 젊은 선생님들 몇몇 분들이 최근 전교조에 가입하려다가 조금 더 고민해 보겠다고 물러서더군요. 이른바 '신공안 정국'이라는 최근의 시국 상황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겁니다. 설마 정부가 이 점을 노리는 건 아니겠죠.

그러나 희망의 싹은 마치 두꺼운 콘크리트를 뚫고 피어나는 민들레처럼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전교조의 '법외 노조화'를 막아달라는 교문 앞 1인 시위에 많은 아이들과 학부모들이 지지한다며 호응을 보내주고 있고, 전교조가 정치적이어서 싫다는 분들조차 고용노동부가 전교조를 불법화하려고 꼼수를 쓰는 거라며 정부를 매섭게 질타했습니다.

장관님! 끝으로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얼마 전 국립대학, 시도교육청, 민간 자문위원회 등의 의견 수렴을 거쳐 '교육부 정부 3.0 실행 계획'을 야심차게 내놓았더군요. 거기에서 밝힌 청사진의 첫머리가 바로 '국민과 소통하는' 교육부였습니다. 차라리 청사진을 내걸지나 말지, 그 실행 계획의 첫 번째 사업이 고작 고용노동부와 짝짜꿍해 전교조를 불법화시키는 것인가요.


태그:#전교조 법외노조화, #서남수 교육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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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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