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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손위 형 그림
▲ 김창억씨 그림 아버지 손위 형 그림
ⓒ 김창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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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1957년생이니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아버지가 발견한 작품이다. 아버지는 일본이 우리나라를 점령하던 시기에 도쿄에 있는 아테네 프랑스(도쿄에 있는 외국어학교)에서 불문학을 공부했는데 그 시기는 아마 1940년 전후부터 1945년 해방될 때까지 걸쳐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미술 공부를 하던 손위형 김창억씨(화가, 홍대 교수 역임)와 함께 할아버지가 도쿄에 사준 집에서 비교적 여유있게 시와 불문학을 공부했다. 아버지의 절친 조병화씨는 어디에선가 우리 아버지 형제들이 도쿄에 집까지 있으면서 공부했던 것에 대한 추억담을 기술했던 것으로 들은 적이 있다.

아버지는 원래 로망 롤랑을 좋아했다. 그래서 아버지의 본격적인 번역 첫 작품은 로망 롤랑의 <장 크리스토프>였고 얼마 안 있다 로망 롤랑의 <매혹된 영혼>을 번역했다. 아버지가 마르셀 프루스트를 염두에 둔 것은 바로 로망 롤랑의 <매혹된 영혼>을 읽고 나서였다. <매혹된 영혼>에서 로망 롤랑이 프루스트를 당시 프랑스 젊은이들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라고 꼽은 것을 보고 아버지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문고본을 찾아 읽었다.

당시 아버지는 일본의 징병이나 징용을 피했는데 그것은 절친 조병화씨의 형이 일본형사로 있었기 때문에 그랬었다고 한다. 아버지와 조병화씨는 평생의 지기로서 내가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따라 등산을 가면 조병화씨가 있곤 했다. 조병화씨가 아버지의 성격을 평한 것 중에는 "끈질기다"는 면이 있었다. 바로 이 성격이 아버지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완역하게 만든 결정적인 동기가 아니었을까?

김창석 시집
▲ 하루 김창석 시집
ⓒ 김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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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씨가 그랬듯이 아버지도 시인으로 자처했다. 학창시절에 함께 우정을 나눈 조병화씨 및 여러 시우(詩友)들과 동인시지 <형상>(1946년)을 함께 냈다. 그 이후 아버지는 평생 <둔주곡> <하루> <조율> <뜻> <나의 평균율(平均律)> 등의 시들을 출간했으나 세상사람들의 인지는 물론 먹고사는 데 필요한 돈이 들어오는 게 없어서 그리 다작을 할 형편이 못 되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젊은 시절에는 시를 하는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여 심지어는 시인 정지용씨와의 일도 떠올린 적이 있다. 정지용씨가 6·25 당시 북한의 모 기관을 책임지고있었는데 아버지가 찾아가서 가입한다고 하자 정지용씨는 "자네는 들어올 데가 아니다"라고 만류를 했다는 것이다.

문인으로서의 아버지의 인생에 브레이크가 걸리는 시점은 6·25였다. 할아버지 시대의 우리 집안은 상당한 재력을 지녔고 자손들도 번성했다. 아버지의 형제들은 6남 3녀로 아버지는 그 중 넷째 아들이었다. 6·25가 발발하자 집안의 경영을 책임지셨던 첫째, 둘째 형이 사망하여 아버지가 그 대신 집안을 꾸려 나아가야 했다. 그 이전까지 아버지는 우정국의 프랑스어 번역을 하면서 비교적 만족한 생활을 했던 것 같다. 당시 번역을 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대우는 쏠쏠했던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집안의 비상사태가 발생하였기 때문에 아버지가 나선 것이었다. 아버지의 사업은 군화 납품이었는데 처음 몇 년 동안은 괜찮았다. 할머니 말에 따르면 아버지는 전쟁 중에도 지프차만 타고 다니고 돈을 집안에 가져올 때에는 가마니로 싸가지고 왔었다. 그러던 생활이 아버지가 어머니와 결혼하기 직전 쇠락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아버지가 솔직하게 고백하기를 별로 결혼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어머니가 지금의 고대 의학과에 다니던 재원이었고 미모였기 때문에 남자로서의 욕심으로 결혼을 하지 않았나 싶다.

어머니는 외할머니의 강력한 추천에 의하여 결혼을했지만 결혼한 지 얼마 안 있어 결혼반지도 잡혀야 하는 등 애로가 많았다. 못 견디던 어머니는 결국 한 살배기 나를 들쳐업고 친정으로 도망가 아버지는 그때부터 일종의 처가살이를 시작하게 되었다. 역시 재력이 있었던 외할아버지가 우리 부모님 내외에게 서울 중학동에 조그만 집을 마련해주셨고 아버지를 갓 지은 종로 서울예식장의 관리상무로 앉혔다. 아버지는 그 일을 제법 잘했는지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그 직책을 유지했다.

부모님 결혼 사진
▲ 결혼 부모님 결혼 사진
ⓒ 김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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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본격적인 번역 인생은 그 시대부터였다. 절친 조병화씨는 아버지를 정음사에 소개했다. 정음사의 최영해 사장과 아버지는 의기가 투합했는지 아버지는 정음사에서 번역자 중 가장 많은 번역을 했다. 로망 롤랑의 <장 크리스토프> 3권, <매혹된 영혼> 3권을 위시하여 폴 클로델의 <삼종>, 발자크의 <풍류해학담> <골짜기의 백합> 그리고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1권인 <스완네 집쪽으로>를 연달아 번역했다. 아버지는 1970년부터 <스완네 집쪽으로>를 번역했는데 정음사판 '세계문학전집' 속에 들어가 출간된 것은 1972년이었다.

아버지가 예식장 상무로 있던 시절 우리 집은 잘 살았으나 외할아버지의 뒷배로 앉아 있던 자리라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마자 그 자리에서 물러나오게 되었고 서대문에 있었던 제일예식장으로 물러났다. 내가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가를 처음으로 깨달은 것은 아버지가 있던 서대문 제일예식장 사장실에서였다.

아버지는 왼손에는 파이프를 물고 오른손에는 만년필을 쥐면서 뭔가를 쓰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버지가 당시 어떤 번역을 했는지는 전혀 모르지만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아버지는 글쟁이였다. 아버지가 왜 글을 쓰고 말하자면 왜 시를 썼는지는 아버지의 시 <나의 평균율>의 머리말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언어란 갖가지물상을 부르기 위해 우리가 사용하는 기호(signe)이다. 그런표시를 어떤 개념에서가 아니라, 제 눈으로 보고 제 귀로 듣고, 제사지로 접촉하고, 제 코로 맡고, 제 혀로 맛보는 지각을통해 물상에 바르게 붙여주는 게 언어의 절간에 몸담고 있는 시혼의 나날의 소임이다. 시혼을 지닌 자는사물에 대한 신뢰의 정에서 우러난 감동을 통해 창작하는 자로서 구체적인 실재의 세계를 상징으로 가득찬 숲같이 여긴다. 그 숲을 걸어가노라면 시혼은 도처에서 사물과 사물과의, 상징과 상징과의사이의 교감(correspondence, 대응.조화)에 부딪힌다. 교감이란 다시금 내적 관계의 체험이니, 그 관계는 스스로 제 창조성을 통해 삶과 문화에 새로운 방향을 가리킨다. 이러한교감을 시혼은 에술이 갖는 매력과 정확한 꼴(forme 리듬)로 표현한다…모든 게 유수같이 지나가고 어떠한 것도 현재(present)가 아니다. 왜냐하면 우주라 일컫는 틀 안에 있는 모든건 다 되어 있는 게 아니라 되어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운동해가며 지속되어 가고 있는것이기 때문에 재현(representer)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작업 중의 하나가 시를 짓는 공사라고 본다.
- 김창석, <나의 평균율(平均律)> p.3

아버지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번역하기 시작한 1970년은 어머니가 서울예식장 폐백실에서 번 돈을 남에게 꿔주다 다 날린 바람에 우리 집의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을 때다. 당시 아버지는 47세였다. 남 같으면 식구들을 먹여 살리려고 고심에 고심을 했겠지만아버지는 스스로의 시혼을 개화해서 우주에 있는 물상들의 재현을 하는 게 더 중요했다. 게다가 아버지의 아버지인 할아버지는 아직도 재산이 많았다. 그래서 아버지는 식구들을 데리고 할아버지가 계시던 서대문 송월동 집으로 들어갔다. 어머니가 시댁을 나간 지 어언 15년 정도 흘렀을 무렵이었다.

서대문 송월동 집은 대지가 150평에 건평이 70평 되었을 정도로 대단히 컸다. 그 집은 대식구가 살기에 알맞은 집이었다. 그 집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외에 아버지의 손아래누이 식구와 둘째 형 아들 딸이 이미 기거하고 있었다. 나는 사촌형과 한 방을 쓰고 나머지 우리집 식구는 한 방에서 생활했다.

아버지는 식구들의 불편을 아랑곳하지 않고 특유의 스타일로 번역에 들어갔다. 아버지의 책상은 아주 넓었다. 그 위에는 번역 원서와 사전, 기타 참고 자료와 원고지가 보기 편하게 배열되어 있었고, 특히 소주와 소줏잔, 안주, 파이프 담배가 늘 자리를 함께 했다. 술과 담배와 하는 작업은 아버지가 도저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었다. 아버지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번역을 끝내고 신장결석에 걸리는 데 그 영향이 크지 않았나 싶다.

여하튼 그 자리에서 아버지는 우주의 물상의 재현에 총력을 기울였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번역은 아버지가 느끼는 우주를 재현하는 것과 묘한 일치를 나누지 않았을까 싶다. 아버지에게는 돈을 벌라고 하는 어머니의 잔소리보다는 마르셀 프루스트가 유도하는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가 더 영향력이 컸다. 마침내 번역을 시작한 지 7년이 지났을 때 아버지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번역을 끝냈다.

아버지가 번역을 시작할 때에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출간하기로 마음먹은 곳은 당연히 정음사였다. 하지만 아버지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번역에 매진할 동안 정음사는 사업 전개에 차질을 빚어 아버지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발간할 역량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아버지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출간할 수 있는 새로운 출판사를 알아보는 중에 갑자기 삼성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다.

담당자는 박훤이라는 편집차장이었다. 삼성출판사에서도 <스완네 집쪽으로>를 펴내려고 하는데 들어온 원고가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라 아버지에게 원고 수정을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돈이 아쉬운 아버지는 당연히 그 제안을 수락했다. 박훤씨는 얼마 뒤에 삼성출판사를 퇴직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출간하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돈이 모자란 박훤씨는 능성출판사와 섭외하여 자신은 원고의 편집을 맡는 조건으로 아버지와 능성출판사와의 계약을 성사시켰다. 급기야 1977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대망의 완간을 능성출판사에서 했다. 그러나 그 계약으로 능성출판사는 사업을 더 이상 할 수 없는 지경까지 갔다. 결국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얼마 못 가 출판시장에서 존폐의 위기에 놓였다.

그러던 중 정음사와의 끈질긴 인연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부활을 알렸다. 그때 정음사를 새로 이끌게 된 최동식 사장이 아버지를 직접 찾아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재출간을 제안했다. 아버지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 제안에 화답했고 이윽고 1985년 정음사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제2차본이 출판되었다.

그렇게 해서 '김창석 역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운명이 순조로웠으면 좋았으련만 정음사에서 유통하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원판 필름이 화재로 불타버렸다. 정음사에서 다시 제작비를 투입하여 조판하기에는 책의 분량이 너무 방대했다. 아버지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부활을 위해서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책표지
 책표지
ⓒ 국일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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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국일미디어의 이종문 사장이 아버지에게 접근했다. 자신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출판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국일미디어가 어떤 출판사인지 모르던 아버지는 반신반의하다가 다른 출판사에서 제안이 없었기 때문에 마침내 국일미디어에서 제3차본을 내기로 결심했다.

국일미디어에서 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전체 내용의 약 40%를 수정하고 문장을 손질했었다. 물론 아버지의 성격상 편집자들이 고치는 것을 수수방관하지 않고 엄격한 감독을 했다. 따라서 제3차본도 아버지의 번역이라고 완벽하게 말할 수 있다. 1998년부터 유통되는 국일미디어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한동안 시중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이제는 후학(後學)들도 어떤 분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완역을 했고 어떤 분들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완역을 목표로 분투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아버지는 뼛속 깊이 시인이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우주의 물상을 언어로 구체적으로 재현하는 역할을 포기할 사람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그 길을 못 갔다면 평생을 후회하면서 살았을 것이다. 한때 아직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출간이 안 되었을 무렵 우리 집안이 미국 이민으로 소란스러운 적이 있었다. 만약 그때 아버지가 이민을 가겠다고 했다면 아직 우리나라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완역은 요원했을지도 모른다.

내 나이도 적지 않은데 살아온 경험으로 보면 뭔가를 처음 한다는 것은 그토록 힘들다. 누가 뭐래도 아버지는 우리나라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처음 완역한 불문학자요 시인이다. 그리고 그 영향이 후학(後學)과 후세(後世)에 크게 긍정적으로 끼쳤을 것이고, 끼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머리 숙여 서로 인사해야 하는 것들이!

힐끗 뒤돌아본
허다한 얼굴과 재빠른 걸음걸이 속에
그저 휩쓸려 들어간다.
다시 찾아볼 겨를 없이
멍하니 걸어간다.
소요와 잡스러운 형태 사이를 지나가는사이에
존재의식이 망각돼가는 느낌.
보고 듣는 것에
사념이 옮겨간다.
온몸이 산산이 흩어져
거리에 날린다.
그 조각들이
간판에 상품에 모자 위에 걸인의 다 떨어진신에
전선 줄에 성당의 종루 위에
붙는다.
자기 아닌 자기가
자기 아닌 자기에게 옮겨간다.
낯익은 것들! 서로 닮은 것들! 서로 한 가족인 것들!
꽃가게의 철이른 한 떨기의 장미꽃에도
심술궂게 생긴 골목대장의 때묻은 손에도
똑 같은 고움이
숨은 유대가 있다.
마리아상에서 언뜻 느낀 성스러움이
마주친 어느 여인의 미소에서 보인다.
그 미소가 지어낸 삶의 존엄성이
시선이 가는 마음이 가는
유형 무형에
4월의 하늘 아래
있다.
낯익은 것들이! 서로 닮은 것들이! 서로 한 식구인 것들이!
머리 숙여 서로 인사해야 하는 것들이!
- 김창석, <나의 평균율> p. 168


태그:#김창석,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나의 평균율,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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