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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4천미터가 넘는 알티플라노 고원(2011년 6월 사진).
▲ 알티플라노 고원 해발 4천미터가 넘는 알티플라노 고원(2011년 6월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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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사막 입구의 소금 호텔과 만국기(2011년 6월 사진),
▲ 우유니 소금사막 소금사막 입구의 소금 호텔과 만국기(2011년 6월 사진),
ⓒ 정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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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리비아는 남미의 중앙부에 위치하며 브라질과 칠레, 페루 등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국토의 절반 이상이 안데스 산맥의 일곱 봉우리가 중앙부를 관통하여 지나가는 알티플라노 고원에 위치한 천상의 나라다. 세상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소금사막 우유니,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국가의 수도 라파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티티카카 호수 등 지구 최후의 아름다운 풍경을 간직한 나라이기도 하다. 또한 남미의 여러 나라 중에서도 원주민 인디오의 인구 비율이 가장 높아 남미 전통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나라다.

지금의 볼리비아 지역은 토착 원주민 인디오인 아이마라 족이 북쪽에서부터 내려와 이 지역에 정착해 볼리비아 서부, 페루 남부, 칠레 북부에 세력을 넓힌 이래로 2천여 년간 계속 사람이 살아왔던 곳이다. 볼리비아는 북부 지역 티와나쿠 유적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기원전부터 형성된 티와나쿠 문명의 발상지이며, 한 때는 안데스 최고의 문명을 꽃피웠다. 현재 원주민 아이마라 족은 자신들을 볼리비아 북부의 티와나쿠에서 번영했던 발달된 문명의 후손이라고 믿고 있다.

계단에서 쉬고있는 원주민 할머니(2011년 6월 사진).
▲ 아이마라족 원주민 계단에서 쉬고있는 원주민 할머니(2011년 6월 사진).
ⓒ 정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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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리비아의 고대 문명 티와나쿠는 기원전부터 이 지역에서 농업에 기반을 둔 작은 마을로부터 시작하였다. 이 공동체는 서기 600년에서 800년 사이에 점차 도시로 성장하여 안데스 남부의 중요한 지역 세력이 되었다. 도시가 가장 번성했던 시기에는 인구 3만 명 가량의 주민들이 티와나쿠에 거주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티와나쿠 문명의 전성기에는 그 세력권을 동부 아마존 상류의 지역까지 확대했으며 그들의 문화와 생활 방식을 페루, 볼리비아, 칠레의 다른 문화들에게 전파하였다.

티와나쿠 문명은 서기 10세기 중반까지 번성하며 계속 커져 나갔으나 10세기 말에 들어서면서 알티플라노 고원의 기후에 급격한 변화가 발생하였다. 이 시기에 티티카카 분지의 강우량이 급격하게 감소하였고 일부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대가뭄이 발생했다는 설도 있다. 가뭄에 따른 영향으로 강우량이 갈수록 줄어들자 티티카카 호수로부터 많이 떨어진 많은 도시들은 물을 공급받지 못해 곡식 생산이 줄어들었다.

이렇게 티와나쿠 문명은 권력의 주요 원천인 식량 생산이 불가능하게 되면서 서기 10세기 말에 사라져 버렸다. 그 이후 상당 기간 동안 티와나쿠 문명의 대지에는 사람들이 살지 않게 되었다. 이후 알티플라노 고원에 뿔뿔이 흩어져 살던 티와나쿠의 원주민 아이마라 족은 11세기경 케추아족 지배하에 들어가 이 땅은 잉카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1535년 잉카제국이 스페인의 군인 피사로에게 정복된 이후에는 스페인의 식민 지배를 받게 되었다.

라파스 도심의 현대식 빌딩들(2011년 6월 사진).
▲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스 라파스 도심의 현대식 빌딩들(2011년 6월 사진).
ⓒ 정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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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리비아는 1825년 인접국인 페루와 함께 시몬 볼리바르 장군 휘하의 수크레가 이끄는 군대에 의해 해방된다. 나라의 이름을 '해방자' 시몬 볼리바르의 이름을 따서 볼리비아 공화국이라고 이름 지었다. 독립 이후에도 페루와 칠레 등 이웃 나라들과의 끝없는 국경 분쟁으로 짧은 근대의 역사에 비해 많은 수난을 겪은 나라다.

이웃 나라인 칠레와는 1879년 아타카마 사막에 매장되어있는 초석을 두고 전쟁이 벌어져 태평양 해안에 접한 리토랄 주를 빼앗기면서 볼리비아는 바다가 없는 내륙국가가 되었다. 칠레와의 전쟁에서 빼앗긴 땅을 회복하기 위하여 바다가 없는 볼리비아의 해군은 지금도 티티카카 호수에서 해군훈련을 하고 있다.

또한 1903년에는 브라질과의 전쟁에서 국토의 일부를 잃었으며 1935년에는 파라과이와의 차코전쟁에서 국토의 많은 부분을 빼앗겼다. 이와 같이 인접 국가와의 여러 차례 전쟁으로 국토의 절반 이상을 잃은 볼리비아는 이후에도 빼앗긴 대부분의 국토를 회복하지 못했다. 그런 역사적인 배경으로 인하여 남미의 다른 나라들에 비하여 외국인에 대하여 조금은 배타적이며 경계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예를 들면 외국인의 비자 발급이나 입국이 남미의 다른 나라들에 비해 무척 까다로우며 외국인의 방문 자체를 그리 반기는 분위기가 아님을 여행을 하면서 느낄 수 있을 정도이다. 이렇게 사방이 다른 나라의 육지로 둘러싸인 볼리비아는 남미의 티베트라고 불리기도 한다.

볼리비아는 아직까지도 남미에서 가장 인디오가 많은 나라이며 인구의 절반을 넘는 이들 원주민 인디오들은 아직도 전통적인 그들의 가치와 신앙을 보존하고 있다. 남미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지만 다양한 볼거리를 기대하는 여행자들에게 있어서 볼리비아는 풍요로운 문화와 경이로운 자연을 간직한 나라로 여겨진다.


태그:#볼리비아, #티와나쿠, #알티플라노, #우유니, #라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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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한가운데의 니나 또는 슈타인처럼, 여행과 사진 그리고 건축, 머나먼 이베리아 반도의 끝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와 숭산 스님의 선의 나침반, 수타니파타의 그물에 걸리지않는 바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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