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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산 계곡(2004. 12. 1.)
 금오산 계곡(2004. 12. 1.)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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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깊은 만남

금오산

금오산 일대는 평일인 탓인지 한적했다. 온통 매미들만이 가는 여름을 아쉬워하는 양 발악하듯 온산에서 '맴 맴' 울부짖었다. 그들은 금오저수지 언덕에서 내려 와 다시 승용차를 타고 금오산 쪽으로 더 달렸다. 한여름의 짙은 녹음 속에 호수를 끼고 달리는 길이 무척 아름다웠다. 준기는 카세트 테이프에서 요한스트라우스의 <아름답고 푸른 다뉴브강>을 선곡하여 밀어넣었다. 그러자 그 곡에 맞춰 순희가 지휘자인 양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음악이 끝나자 순희가 말했다.

"날마다 B-29 폭격기와 대포 포탄소리에 가슴 졸이며 살았던 이 고장이 이렇게 아름답고 평화스러울 줄이야."
"기러게 말입네다. 기때 조선인민군 소년전사가 다부동 전선에서 만난 최순희 동무와 이곳을 자동차로 드라이브 한다니 도무디 믿어지지 않는구만요. 꼭 꿈만 같습네다."

그 말에 순희가 준기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아야. 현실이구만요."

준기의 오른 손이 슬그머니 순희의 허벅지를 더듬었다.

"기사님! 안전운전합시다."
"알가시우."

금세 준기는 두 손으로 핸들을 잡았다. 금오 호수가 끝나자 야은 길재 선생을 기리는 채미정을 나타났고 곧 금오산 관광호텔이었다. 준기는 순희의 의사도 묻지 않고 핸들을 호텔 주차장으로 꺾었다. 순희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준기는 순희와 동행하는 동안 늘 황 병원장의 말을 되새겼다. 비록 품안에 든 여자일지라도 확실하게 내 사람으로 만들려면 '명분과 분위기를 만들어주라'는 말이었다. 준기는 주차를 한 뒤 객실로 가지 않고 곧장 호텔 바(Bar)로 갔다. 그곳은 도선굴과 명금폭포가 빤히 바라보이는 곳으로 언저리 경치가 매우 좋았다.

두 사람은 바에서 스카치 위스키를 청해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주 화제가 24년 전 그들의 금오산 아홉산 골짜기 피난시절 이야기였다.

"해평영감 내외분이 매일 새벽마다 정화수 떠놓고 신신령님께 빌어준 탓으로 우리가 요로케 무사히 살아왔나 봅네다."
"나두 그런 생각이 드네요.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죽을고비도 무척 많았는데 용케 넘어간 것은…."
"고맙습네다. 그 험한 길에도 살아줘서."
"내가 동생에게 하고픈 말이구만요."
"알가시오. 기럼, 우리 두 사람이 살아 다시 만난 것에 대한 축배를 듭세다."
"좋아요."

비행기에서 적군에게 선무공작을 하는 방송요원들이 비상시를 대비하여 낙하산 장비를 착용해 보고 있다(1952. 4. 20..
 비행기에서 적군에게 선무공작을 하는 방송요원들이 비상시를 대비하여 낙하산 장비를 착용해 보고 있다(1952. 4. 20..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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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락의 비명

준기는 스카치위스키 잔을 치켜 들었다.

"최순희, 김준기의 재회를 축하하며!"
"김준기, 최순희의 남은 인생을 위하여!"

두 사람은 한 마디씩 건배의 말을 하고 잔을 부딪친 뒤 스트레이트로 비웠다. 순희는 스카치위스키를 한 잔 더 스트레이트로 비우더니 금세 피로한 기색을 보이며 혀꼬부러진 말을 뱉었다.

"동생, 나 취했나 봐."

순희는 슬그머니 준기에게 쓰러지며 온몸을 기댔다. 준기는 바의 카운터에게 객실을 부탁하자 곧 303호로 안내했다. 준기는 순희를 부축하여 객실로 들었다. 

"커튼 좀 닫아주세요."

준기는 객실의 커튼을 닫았다. 갑자기 실내가 컴컴했다. 준기는 포성이 울리던 형곡동 행랑채에서 순희의 살 냄새를 맡았던 그날이 떠올랐다.

"무섭수?"
"아녜요."

순희도 그날이 생각났는지 대답을 하고는 피식 웃었다. 순희는 그날처럼 준기의 품을 파고들었다. 준기는 그런 순희를 포근히 감싸안았다. 그런 뒤 긴 키스를 나누었다. 준기는 순희의 옷을 하나하나 양파껍질처럼 벗겼다. 그러자 순희도 후근 달아 준기의 바지를 벗겼다. 순희가 너무 세게 당긴 탓으로 준기 바지 단추가 떨어졌다.

"어머, 어쩌죠?"
"괜찮수."
"나중에 달아드릴게요."
"알갓수다. 누이의 바느질 솜씨야…."

준기는 윗옷을 벗은 다음 순희의 벌거벗은 몸을 번쩍 들어 침대 위에 반듯이 뉘었다. 곧 두 사람은 실오리 하나 걸치지 않은 채 그들은 사랑을 나눴다. 온몸에 짜릿한 전율이 흘렀다. 그 전율은 상큼하고 기막히게 짜릿했다. 순희 혀가 준기 가슴을 핥았다.

"윽! 윽! 윽!…"

준기는 비명을 질렀다. 준기 혀도 순희의 가슴팍에서 차츰 아래로 옮아갔다. 이윽고 준기의 혀는 순희의 젖무덤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순희의 육체는 40대 초반으로 터질 듯 한창 무르익어 있었다. 순희는 가벼운 신음을 하며 몸을 뒤척였다.

"아! 아! 아!…."

준기는 까마득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살리며 순희의 젖무덤에 얼굴을 묻었다. 순희는 그런 준기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마치 어미가 자식에게 젖을 먹이며 흐뭇하게 바라보는 그 모습이었다.

피난민 양곡배급소 바닥에 떨어진 낙곡을 모자가 빗자루로 쓸어 담고 있다(1950. 10.).
 피난민 양곡배급소 바닥에 떨어진 낙곡을 모자가 빗자루로 쓸어 담고 있다(1950. 10.).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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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 냄새

모든 여성은 모성애를 지녔다. 그 순간 순희에게 준기는 잃어버린 자식을 다시 찾은 어머니의 마음이었다. 순희는 준기의 등을 다독거렸다. 그리고 자그맣게 노래를 불렀다. 24년 전 밤새 낙동강을 건넌 뒤 형곡동 행랑채에 숨어 밤을 기다릴 때처럼.

엄마가 섬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 노래에
팔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순희 몸에서는 우유냄새, 향수냄새 그리고 짭짤한 바다 미역냄새가 났다. 그 냄새로 준기는 더욱 황홀했다. 곧 두 사람은 한 몸이 된 채 먼 여행을 떠났다. 그들은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골짜기를 지나자 곧 산새가 즐겁게 노래하는 숲이 나왔다. 두 사람은 꼭 끌어안은 채 경쾌한 새들의 노래를 음미했다.

다시 굽이굽이 비경의 산등성이를 오르자 마침내 사방이 탁 트인 산등성이가 나왔다. 멀리 멧부리들이 여울지듯 겹쳐 보였다. 그들은 다시 서로 밀고 당기면서 마지막 오르막길을 헐떡이며 오르자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금오산 최고봉이었다. 거기서 그들은 번갈아가며 "야호!"를 외쳤다.

준기 이마에서 솟은 땀이 순희 가슴에 떨어졌다. 순희는 머리맡 수건으로 준기 이마의 땀을 훔쳤다. 순희의 이마에도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준기는 그 수건으로 땀방울을 닦았다.

"이 땀냄새 얼마만인가요?"
"길쎄."

"그때가 1950년이니까 꼭 24년 만이네요. 그런데도 그때 땀 냄새는 그대로네요."
"정말 그렇구만요. 순희 누이의 노래 솜씨도. 그리구 땀 냄새와 살 냄새, 앞가슴 감톡(감촉)도. 내레 그날 그 순간을 못 닞어 거제포로수용소에서 'S'를 쓰고 남쪽에 남앗디."

두 소녀(1951. 3. 1.).
 두 소녀(1951. 3. 1.).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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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여기에 실린 사진은 대부분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수집한 것들과 답사 길에 직접 촬영하거나 수집한 것입니다. 본문과 사진이미지가 다를 경우 한국전쟁의 한 자료사진으로 봐주십시오.



태그:#어떤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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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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