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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낭대성당에서 만난 사제 수품 연

다낭 대성당에서 사제 수품 연습을 하는 예비신부들
 다낭 대성당에서 사제 수품 연습을 하는 예비신부들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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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일 아침에 다시 다낭 대성당을 찾았다. 성당의 본당 건물이 열렸다. 건물은 고딕양식으로 단순하면서도 위엄이 있다. 나는 내부를 살펴보려고 본당 안으로 들어가는데 통제를 한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사제품을 받는 신부들이 연습을 하고 있었다. 무릎을 꿇기도 하고 오체투지 형식으로 엎드리기도 한다. 자료를 보니 8월 3일 다낭 교구 사제수품식이 열리는 것으로 되어 있다.

수계식(Chuc Linh Muc)은 말씀의 전례(Phung Vu Loi Chua)를 행한 다음 의식(Nghi Thuc Phong)을 진행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의식은 3단계 과정을 거친다. 1단계가 준비의식이다. 2단계가 주요의식이다. 3단계가 강론이다. 이러한 과정을 미리 연습해 보는 것이었다. 나는 더 이상 안에 머물 수 없어 제대 부분만 멀리서 살펴보고 성당을 나온다. 제대 부분 역시 단순하면서도 고상하다.

다낭 대성당
 다낭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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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옆에는 다낭 성당 출신 신부의 석상이 있고, 성당 앞에는 베드로와 바울의 석상이 서 있다. 이곳은 성심성당(Sacred Heart Cathedral)이다. 나오면서 보니 성당의 담장 벽에 다낭 성당의 역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이야기가 그림으로 설명되어 있다. 이곳에 가톨릭이 처음 전파된 것은 1615년 1월 18일 프란시스코 부조미(Francesco Buzomi), 디에고 카르발류(Diego Carvalho) 신부에 의해서다. 그리고 다낭 대성당이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923년 2월이다. 성당은 1924년, 1963년, 2013년 세 번의 수리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다낭박물관은 종합박물관이다

대성당을 보고 나서 우리는 다낭박물관(Bao Tang Da Nang)으로 간다. 다낭박물관은 다리를 건너 들어가게 되어 있다. 정문을 들어서면 넓은 정원이 나오고, 좌우에 대포가 진열되어 있다. 다낭박물관이 군사박물관을 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박물관 앞에는 투옹 푸옹(Dánh Tương Nguyễn Trị Phương: 1800-1873) 장군의 석상이 서 있다. 푸옹 장군은 프랑스 군의 침입에 맞서 싸운 응유엔 왕조의 장군이었다. 그는 1858년 다낭에서 프랑스군과 싸웠고, 1873년 하노이에서 싸우다 부상을 당해 죽었다. 프랑스군이 그에게 링거주사를 놓으려 했지만, 그는 명예로운 죽음을 선택했다고 한다.

다낭박물관
 다낭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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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은 2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1층에 고대에서 근대까지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면, 2층에는 현대사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1층 입구에는 동판으로 베트남 역사의 한 장면을 표현해 놓고 있다. 칼과 창을 들고 말을 끌고 깃발을 날리며 진군하고 있는 군대의 모습이다. 동판 오른쪽 위로 '삼경야정동룡월(三更夜靜銅龍月) 오고풍청노학선(五鼓風淸鷺鶴船)'이라는 한시가 보인다. '삼경이라 깊고 고요한 밤 동용문에 달 떠오르고, 다섯 번 치는 북소리 바람 따라 노학선에 전해지네'라는 뜻이다. 프랑스군과 싸우는 푸옹 장군의 모습으로 보인다.

관람은 왼쪽으로 이어진다. 첫 번째 코너에 동식물과 광물이 전시되어 있다. 자연사박물관을 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 코너부터 고대사 유물이 전시된다. 석기와 토기, 골각기와 장신구가 보인다. 다음엔 청동기와 무문토기가 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문명의 교류를 알 수 있는 주전자가 있다. 주전자 다음엔 불상과 도자기가 있다. 중국 남방 지방과의 문화교류를 느낄 수 있다.

문명교류를 보여주는 차 주전자
 문명교류를 보여주는 차 주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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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으로 유물도 적고,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도 않다. 문화유산은 시대를 많이 뛰어 넘어 19세기에서 끝나고, 다음은 민속관이다. 의복과 상제(喪祭)를 보여주는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그 다음은 생활사 박물관이다. 그 중에서도 탈 것과 관련된 유물이 많다. 배의 닻과 키, 인력거와 오토바이 등이 있다. 그리고 어촌과 농촌의 생활상이 실물 크기의 모형으로 전시되고 있다. 우리네 삶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음 공간에는 베트남 근대사의 마지막 황국 응유엔 왕조의 역사가 제시되고 있다. 무기와 교지, 동판과 조각 등이 보인다. 대포는 서양식이고, 교지는 한자로 쓰여 있다. 동판은 프랑스 군과 싸운 이야기가 표현되어 있다. 조각은 다낭박물관 앞에 서 있는 푸옹 장군의 좌상이다. 그렇다면 푸옹 장군은 베트남 근대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인가 보다. 이들을 지나면 자연스럽게 베트남 전쟁기념관으로 이동한다.  

전쟁과 상처

전쟁의 유산
 전쟁의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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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 그것은 베트남 현대사에서 가장 슬프고도 지루한 전쟁이었다. 1955년부터 시작되어 1975년에 끝났기 때문이다. 베트남과 프랑스가 벌인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끝난 다음 해인 1955년 시작되었기 때문에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전쟁은 1965년 동서냉전의 대리전 성격으로 변질된다. 그리고 1975년까지 10년간 베트남 사람들을 더 치열한 전쟁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다. 이때를 베트남 사람들은 미국과 벌인 대미전쟁이라고 부른다.

베트남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미제국주의로부터 나라를 지켜내기 위한 저항전쟁(Resistance War)이었기 때문이다. 이 전쟁에 우리나라 군대도 파견되어 많은 희생을 치르게 되었다. 1964년 의료지원에서 시작, 공병부대인 비둘기부대의 참전으로 이어졌고, 1965년 마침내 전투부대가 참전하게 되었다. 이후 1973년까지 베트남 전쟁에 파병된 군인은 총 32만 명이나 되었다. 파병된 병력이 가장 많았던 때는 1968년으로 5만 명을 넘었다. 베트남 전쟁 중 한국군은 5000여명이 전사했고, 1만여명이 부상당했다.

자전거에 거치된 총포
 자전거에 거치된 총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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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전쟁의 흔적이 이곳 전시실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벽 한 칸이 전쟁에 사용하던 물품으로 채워져 있다. 총칼, 총알과 수류탄도 있지만, 더 인상적인 것은  수통, 악기, 전화기 같은 생활용품이다. 전쟁에 닳고 달아 찌들었지만 군인들과 애환을 같이 했을 물건들이다. 또 다른 쪽에는 빛바랜 군복이 있다. 우리처럼 카키색이나 얼룩무늬가 아니고 회색이나 갈색이다. 군복 안에 입는 조끼는 누비질을 해 좀 더 튼튼하게 만들었다. 그 옆에는 푸른색 방탄모도 보인다.

전시실 한 가운데는 자전거에 거치된 소형총포가 있다. 기관총, 박격포, 무반동총도 있다. 그리고 주변에는 전쟁을 설명하는 사진과 패널이 붙어 있다. 다른 공간에는 라디오와 불상도 있다. 바깥 소식을 들어야 하니까 라디오는 필수고, 죽음이 두려우니 불상에 의지했던 모양이다. 또 멀리 살펴보기 위한 망원경도 있고 커다란 물동이도 있다.

베트남 전쟁에서 사용된 비행기 포탄
 베트남 전쟁에서 사용된 비행기 포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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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전시실에는 비행기에서 떨어진 거대한 포탄이 세워져 있다. 크기가 사람 키의 두 배 또는 세 배가 된다. 저런 것이 하늘에서 떨어졌을 경우 그 폭발력이 어느 정도였을까? 제공권을 장악한 미군의 힘에 당할 수 밖에 없었던 약소국 군대의 비애가 느껴진다. 다른 방에는 미군으로부터 노획한 장비가 전시되어 있다. 쌍안경, 무전기, 카메라 등이 좀 더 좋아 보일 뿐 기본 장비는 베트남의 것과 다르지 않다. 전쟁은 결국 보병이 최후의 거점을 차지해야 이기는 것이니 그런 모양이다.

우리는 박물관을 한 바퀴 돌고 다시 일층으로 내려간다. 그리고는 들어갈 때와는 다른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간다. 정원의 녹슨 대포와 다낭의 상징으로 건설되고 있는 노보텔 호텔이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고층 빌딩이 다낭의 현재를 상징한다면, 대포는 다낭의 과거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박물관을 나오니 버스가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이제 베트남 전쟁 당시 남북의 경계였던 하이번 고개를 넘어 북베트남 후에(Hue)로 갈 것이다.  

하이번 고개에서 분단의 흔적을 보다.

하이번 고개
 하이번 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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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번 고개로 가는 길은 다낭 해변을 따라 이어진다. 다낭만을 따라 나 있는 이 도로의 이름은 응유엔탕이다. 곧 이어 길은 송트라 반도를 넘는 하이번 고개(Deo Hai Van) 로 이어진다. 고도를 높이며 다낭 시내가 내려다 보이고, 남촌만(Vinh Nam Chon)의 포근한 해수욕장이 잡힐 듯 가까이 보인다. 구불구불한 길을 왔다 갔다 하다 좀 더 높은 곳에 이르니 송트라 반도 끝의 송트라 섬이 보인다. 이제 고갯마루가 멀지 않았다. 다낭에서 30분은 달려야 하이번 고개에 이를 수 있다.

하이번 고개는 과거 베트남(Dai Viet) 왕국과 참파(Champa) 왕국의 경계였고, 현대에는 분단 베트남의 상징이었다. 베트남은 20세기 들어 프랑스, 미국 등 제국주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민족주의 세력이 북쪽 하노이를 중심으로 외세와 저항을 벌였다. 그들은 하이번 고개 북쪽에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을 세우고 미국과 강렬하게 싸워 1975년 마침내 완전한 통일국가를 이룰 수 있었다. 그 하이번 고개 정상에 오르니 과거 프랑스 식민지 시절 만들어 놓은 초소와 망대 그리고 요새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산신각에서 내려다 본 하이번 고개
 산신각에서 내려다 본 하이번 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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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들을 보기 위해 산쪽으로 올라간다. 이들 식민지 잔재는 세월에 따라 부서지고 무너지고 떨어지고 나갔지만,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 서 있다. 길 가운데 서 있었을 문은 성벽처럼 벽돌로 쌓았다. 그 옆 요새는 콘크리트로 방호벽을 쌓았다. 또 다른 곳에는 주둔군의 막사도 보인다. 이들을 지나 조금 더 올라가자 산신각도 보인다. 이것은 주둔군의 흔적이기 보다는 베트남 사람들의 신앙의 흔적이다. 이곳에서는 우리가 지나온 다낭 쪽 해변과 앞으로 나갈 랑꼬(Lang Co)쪽 해변이 잘 조망된다. 산위로는 구름이 걸렸지만 산 아래로는 맑은 날씨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하이번 고개라는 이름도 구름이 잦은 고개라서 붙여졌다. 고개에서 우리는 베트남식 커피도 한 잔씩 마시고 기념품도 사면서 한 30분 정도 휴식을 취한다. 이 고개를 경계로 남쪽의 다낭 지방과 북쪽의 후에 지방이 나눠진다. 남쪽의 중심도시가 사이공(호치민 시티)와 다낭이라면, 북쪽의 중심도시는 하노이와 후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하이번 고개를 중심으로 다낭과 후에가 이쪽과 저쪽에 있다. 우리는 하이번 고개에서 앞으로 갈 랑꼬 비치를 조망해본다. 길이 구불구불 이어진 끝으로 랑꼬 해변이 길게 펼쳐져 있다.


태그:#다낭 대성당, #다낭 박물관, #베트남 전쟁기념관, #하이번 고개, #남북 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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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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