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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지론은 '창문만 열어도 선풍기 하나로 충분하고, 그래도 더우면 샤워 한 번 더 하면 된다.' 여름이면 에어컨은 우리 부부의 부부싸움 단골메뉴다.
 아내의 지론은 '창문만 열어도 선풍기 하나로 충분하고, 그래도 더우면 샤워 한 번 더 하면 된다.' 여름이면 에어컨은 우리 부부의 부부싸움 단골메뉴다.
ⓒ sx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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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여름만 되면 우리 부부는 '에어컨' 때문에 싸운다. 연일 섭씨 35도 안팎을 오르내리는 찜통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데도 아내는 에어컨을 켜지 말라고 경고한다. 지난 27일 남부지방 기온이 섭씨 38도까지 올라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잠깐 에어컨을 켜놓고 샤워를 했는데, 아내는 그 틈을 타 에어컨을 꺼버렸다.

'창문 열고 선풍기 하나만 있어도 충분하다, 그래도 더우면 샤워 한 번 더 하면 된다'는 아내의 협박 때문에 나는 여름이면 반바지에 러닝셔츠를 입고 지낸다. 아내가 에어컨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기요금을 절약하기 위해서? 아니다. 더위에 강해지기 위해서? 더더욱 아니다. 아내가 폭염에도 발코니 창문을 열고 선풍기를 고집하게 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벌써 15년 전의 일이다. 그 해 여름은 유난히 무더웠다. 때는 8월 중순, 한낮 기온은 섭씨 35도를 오르내렸다. 아내는 숨이 막히고 입맛이 떨어진다고 했다. 아내는 원래 더위에 약하긴 했지만, 어느 날부터 헛구역질에 메스꺼움을 호소하며 괴로운 나날을 보냈다. 혹시나 싶어 병원에 갔더니…. 아내가 첫째를 임신했단다. 임신의 기쁨도 잠시, 불행하게도 엄청난 폭염이 시작됐다.

뉴스는 연일 '올여름, 한반도 역사상 가장 덥다'는 자극적인 제목을 단 기사를 내보냈다. 뉴스 기사 제목답게 어디를 가도 무더운 삼복더위였다. 임신을 하면 보통 체온도 올라간다고 하던데, 임신 6주를 넘어가니 아내는 더위로 인한 체력 소모와 열대야에 의한 수면 장애 때문에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배·엉덩이·다리 등 안 쑤시는 곳이 없었다.

입덧 심한 아내... 버스에서 결정타 맞다

행복했던 시댁 나들이는 돌아오는 길 버스 안에서 대형사고로 이어지고 말았다.
 행복했던 시댁 나들이는 돌아오는 길 버스 안에서 대형사고로 이어지고 말았다.
ⓒ 김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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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어느 날 입덧이 좀 나아지는 것 같다고 해 모처럼 여수 시댁에 다녀오기로 했다. 시댁 식구들에게 임신의 기쁨도 전할 요량이었다.

아내는 자신을 위해 시어머니가 정성껏 준비했을 산해진미를 생각하며 어린 아이처럼 들떠 있었다. 광양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1시간 정도의 거리를 달려, 무사히 시댁에 도착한 아내는 시댁 식구들의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행복은 딱 거기까지였다. 일사천리로 잘 다녀왔다 싶던 나들이는 돌아오는 길에 생각지도 못한 대형사고로 마무리됐다.

아내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일을 내고 만 것. 날씨는 덥고 아가는 뱃속에서 태동하니 시외버스에 오르자마자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던 모양이었다. 특히 시외버스 특유의 케케묵은 에어컨 냄새는 '결정타'였다.

우리는 버스 안에 자리가 마땅치 않아 맨 뒷자리에 앉았는데, 버스 뒷쪽의 덜컹거림이 심했던 게 화근이었다. 버스는 출발부터 놀이기구를 탄 것처럼 전후좌우 요동치기 시작했다. 출발하자마자 아내에게는 이미 비상사태가 터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으윽… 자기야, 나 메스껍고 속이 너무 안 좋아…."
"어? 어떻게 안 좋은데? 글쎄, 조금만 참아보라니까…. 거의 다 왔어, 잠시만…."
"아니야…, 도저히 못 참겠어…."
"…."

뒷좌석에서 한참 동안 널브러져 있던 아내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손으로 입을 부여잡고 고통스러워했다. 아무 곳이라도 괜찮으니 내려달라고 하려던 찰나, 사고가 터져버렸다.

아내의 갑작스런 멀미에 버스는 아수라장

목적지를 약 5분 정도 남기고, 영화 <엽기적인 그녀>의 유명한 장면이 내게 현실로 닥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아내는 시댁에서 산모에게 좋다며 만들어준 귀한 음식을 토해냈다. 앞이 캄캄했다. 냄새도 냄새였지만, 승객들의 웅성거림과 따가운 시선은 견디기 힘들었다. 고개를 들 수조차 없었다.

"아…. 정말 짜증 나네…. 날도 더운데, 냄새까지…. 거기요, 빨리 안 치우고 뭐해요! 진작 좀 내리지!"

눈앞은 캄캄해지고 호흡은 빨라지고, 주위를 둘러봐도 치울 만한 도구는 없었다. 다행히 좌석 그물망 속에 검정 비닐봉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일단 두 손으로 바닥의 내용물을 움켜쥔 채 비닐봉투에 주섬주섬 담기 시작했다.

하지만 검정 비닐봉투는 사태 수습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여기저기 구멍이 나 있었기 때문. 별다른 도구 없이 그냥 손으로 '아내의 흔적'을 치우려니 큰 건더기만 수습할 수 있을 뿐, 점액성 물질은 담아내기 힘들었다. 맨 뒷자리에서 흘러내린 토사물은 타들어 가는 내 속마음도 모른 채 주르륵 출입문 쪽으로 흘러갔다.

버스는 아수라장이었다. 서서히 풍겨오는 냄새에 버스 안 승객들은 하나둘씩 고통스러워했다. 어떤 이는 짜증을 내기 시작하며 가쁜 숨을 내쉬었고, 어떤 이는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아무리 '임산부의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는 하지만, 내가 감당하기에는 상당히 큰 사건이었다.

멀미에 비위까지 약한 아들... 이게 다 엄마 때문?

15년 후 엄마 키보다 훌쩍 자란 아들은 얼굴에 성격에 비위까지 엄마와 꼭 닮았다.
 15년 후 엄마 키보다 훌쩍 자란 아들은 얼굴에 성격에 비위까지 엄마와 꼭 닮았다.
ⓒ 김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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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의 원성을 사고 있던 사이, 버스는 목적지인 터미널에 도착했다. 나는 도착과 동시에 버스에서 잽싸게 튀어 내렸다. 이후 다시 버스로 돌아와 대합실에서 구한 대걸레로 바닥을 연신 닦아냈다. 양동이에 물을 퍼 담아 와 부으면서 여러 번을 닦았지만, 버스 안에 이미 퍼진 냄새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아내의 구토가 시작되면서 나는 이승과 저승을 몇 차례 오간 기분이었다. 현장을 어느 정도 수습한 나는 파김치가 되고 말았다. 지금도 당시 버스 안 승객들의 '따가운 시선'과 '분노 찬 항의'는 영원히 잊지 못하리라.

그 사건으로부터 15년이 지난 지금. 아내는 폭염, 버스 그리고 에어컨을 떠올릴 일이 생길 때마다 고개를 저으며 몸서리를 친다. 아내가 에어컨 바람을 강하게 거부하는 이유는 바로 그때의 악몽 때문이다.

더위에 유난히 약한 15살 아들, 처음에는 아빠를 무척 많이 닮아서 좋았는데 자라면 자랄수록 엄마랑 닮은 게 많아진다. 같은 핏줄 아니랄까봐…. 이미 엄마를 통해 강력한 '멀미의 악몽'을 경험한 터라 비위가 약해 음식도 가리고, 에어컨 바람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게다가 아들은 유난히 버스를 싫어하고 멀미를 많이 한다. 이게 다 엄마 때문이다.

아, 언제쯤 에어컨 바람 쐬는 쾌적한 생활을 누릴 수 있을지 의문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폭염이야기' 응모글입니다.



태그:#폭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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