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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살 아줌마의 특별한 여름휴가

지난 7월 말, 아이들이 여름 방학을 맞아 시골의 할머니 댁에 내려갔다. 서울에 살며 집안일 돌보고 아이들과 지내는 '아줌마'에게 모처럼의 휴가가 생긴 것이다. 늘 아쉬웠던 혼자만의 휴가를 즐기기 위해 적당한 휴가지를 물색하던 중 밀양이 떠올랐다. 신문 기사를 보니 나라의 산업, 통상, 자원을 관리하는 중요한 부서의 장관님도 올여름 휴가는 밀양에서 보내신단다.

밀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지난 5월, 76만 5천 볼트 고압 송전탑 건설 때문에 아수라장이 된 밀양의 산골 마을 소식이 전해졌다. 나이 많은 어르신들이 공권력에 맞서 맨몸으로 싸우는 장면, 힘센 장정들에게 끌려 나오고, 들것에 실려 나오는 장면은 처참했다. 그전에, 2012년 1월에는 어르신 한 분이 분신을 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다고도 했다.

내 나이 마흔, '행복한 노년'에 대한 고민을 시작할 때라고, 우아하고 품위 있게 늙고 싶다고 막연하게 생각하는 요즘, 노인들의 처절한 모습은 지켜보기 불편했다. 그리고 한편, '이분들은 대체 왜? 무엇 때문에 싸우는가? 몸을 던져 지키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궁금해졌다.

대학 사진 동아리와의 인연으로 지금까지 사진을 찍고 있는데, 한동안 우리 아이들 사진만 찍다가 요즘 주변의 '어머니들'의 사연을 취재하고 있다. '미래 세대의 관점에서 세상을 아끼는 사람들의 연대'에서 '백만 어머니 사진 운동'에도 참여하고 있는데 이런 관심과 조그만 활동들이 나를 밀양으로 이끌어 준 것이다.

위양리 아홉 가구 사는 마을
 위양리 아홉 가구 사는 마을
ⓒ 빈진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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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양리 아홉 가구 사는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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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양리 아홉 가구 사는 마을
 위양리 아홉 가구 사는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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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 전 일을 고스란히 기억하는 할매들

"어서 오이소."
"커피 한 잔하고 가이소."

태어나서 처음 가본 밀양, 사투리만큼이나 낯설었는데 다행히 찾아가는 곳 어디나 나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괜찮다고 손사래 쳐도 그냥 가면 서운하다고 커피 한 잔, 수박 한 조각 내미는 모습에서 결혼한 첫 해의 설날, 남편과 시아버님의 고향에 인사드리러 갔던 일이 떠올랐다. 시가(媤家)의 고향은 밀양과 가까운 창녕, 담장과 대문이 허술하고 안과 밖의 경계가 느슨한 시골집들의 모습도 닮았다.

'딩동' 초인종을 누르거나 문을 두드려 누가 왔음을 알리는 '최소한의 절차'(내 상식에서의)도 없이 그저 문 열고 들어가 "아지매요!" 부르면 "하이고, 어서 오이소!" 하고 반갑게 맞아주는 것이 참 낯설었다. 내가 속한 도시라는 공간에서는 이웃끼리 속속들이 알고 정을 나누며 사는 것은 TV 광고에나 나오는, 더 이상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과거의 모습이었다. 그랬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의 어느 한순간으로 미끄러져 들어온 것 같은 착각. 밀양의 첫 느낌은 십수 년 전, 시아버님의 고향 마을에서 점심으로 떡국을 열 그릇이나 먹었던 그때와 비슷하게 다가왔다.

"밥 묵은나? 밥은 묵고 다녀야제."

밀양에서 사흘 지내며 제일 많이 들은 말은 이것이었을 것이다. '밥 묵은나?'는 단순히 '밥을 먹었는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편안히 지내고 있느냐는 물음일 터다.

"요새는 배 곯지 않아도 되니 얼매나 좋아졌노?"라고 말씀하시면서도 아직도 어린 나이에 시집 와, 밥상에 물, 된장, 밥밖에 올릴 수 없었다는, 그마저도 굶는 날이 많았다는 수십 년 전 일을 고스란히 기억하는 할매들.

조상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고향 땅을 지키며, '지금 이대로' 살고 싶다는 이야기가 '서울뜨기'가 된 나(나는 대전, 도시의 변두리에서 나고 자랐다. 스무 살에 서울에 올라와 마흔이 되었으니 인생의 절반을 서울에서 살아온 셈이다)로서는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고향', '조상' 같은 단어가 나의 일상 사전에는 존재하지 않는 단어이고 법적 구속력도 없이 이미 땅속으로, 하늘로 사라져버린 '조상님과의 약속'이 그렇게 절실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배 곯지 않게 되었는데도 밥을 먹고 다니는지로 일상의 안부를 묻는 할매들의 이야기에 다가가려면 문득 이분들이 살아온 세월,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할매들의 '이바구(이야기)' 속으로 빠져 들어가 보기로 했다.

조상 대대로 물려받아 자손에게 전해줄 고향

위양리 손희경 할머니
 위양리 손희경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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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살 먹어 시집왔어. 뭐가 제일 좋았냐, 가정이 좋고 양반(남편) 좋고, 와서 우리 아버님 제일 좋고. 내 참 17세에 무슨 시근이 있었겠노(철이 있었겠나)? 나한테 잘해주셨지. 나도 시아버님한테 잘했고.

하루 저녁에는 나를 부르시길래, 꾸중하실라 싶어서 벌 주시면 달게 받을게요, 하고 꿇어 앉았더니 '니가 뭘 잘못해서 벌을 받겠노? 내한테 효부인데' 그러시면서 니한테 집 남기려고 한다, 아무리 봐도 고향을 맡길 데가 없다, 나도 물림 받고 물림 받았는데 니가 고향을 지켜라, 하시는 기라.

네, 아버님도 지켜왔는데 저도 잘 지키고 후손 물려주고 갈게요, 했더니만 인자 됐다, 이 짐을 어케 누르면서 갖고 가나? 인자 다리 펴고 가겠다, 말씀하시고 그 이듬해 삼월에 돌아가셨네.

논 서 마지기, 시아버님이 남기고 가신기라, 자기가 모은 재산, 고향 잘 지키라고. 우리집 양반은 손재주가 좋아 나가 살고 싶어 했어. 주변에서 논 서 마지기 가지고 자식들 공부 못 시킨다 하니까 팔아서 나간다 하는 거야.

당신 부모인데 내 부모 아니다, 못 간다, 하고 내가 막았어. 그때 갔으면 애덜 공부시키는데 이래 고생 안하고 살았을지 몰라. 옷, 신발 안 사주고 참 험하게 키웠어. 그러면서 한 푼씩 모아 논 사고 땅 늘리고 그랬지. 그래도 자식들이 대학까정 보내줬으니 엄마 할 일 다 했다, 그래 말한다. 우리집 양반도 마지막에 갈 때는 '내가 괜히 트집을 잡았다, 농사짓기 너무 힘들어서 그랬다 미안하다' 그랬고."

위양리 손희경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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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양리 손희경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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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양리 손희경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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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양리 손희경 할머니의 시아버님
 위양리 손희경 할머니의 시아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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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전탑 반대 운동에 앞장서서 활동하신다는 70대 후반의 손희경 할머니, 요즘도 시아버님 사진 앞에서 아버님과 이야기를 나누신단다. "아버님, 서울 다녀오겠습니더." 먼 길 떠날 때는 인사를 드리고, 때로는 "아버님 힘들어 죽겠슴더, 고향 지키기 힘들어예" 하고 마음을 털어놓기도 하신단다.

할머니가 사시는 마을, 두 개의 송전탑이 마을을 에워싸게 될 위양리는 안동 권씨 문중이 500년 넘게 대대로 살아온 곳이다. 권영길 이장님 말씀에 의하면 위양리 주민 중에 안동 권씨가 절반이 넘는다고 한다.

위양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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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양리 아홉 가구 사는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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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양리 아홉 가구 사는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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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양리 권영길 이장님 댁
 위양리 권영길 이장님 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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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백 년, 우리 조상 대대로 자리 잡고 살았는데 어예 돈하고 바꾸노? 자기 고향이고 선산  밑인데, 조상들 눕혀 놓고, (송전시설을 세우다니) 내사 이해가 안 간다."

이장님은 얼마 전에 큰 수술을 받아 아픈 몸인데도 송전탑 걱정에 쉴 수가 없다고 하셨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고향을 지키겠다는 어르신들의 소명의식은 상상 이상이었다. 송전탑 때문에 조상 뵐 면목이 없어 산소에도 가지 못한다는 한 어르신은, "손발이 닳도록 이래 고생해 가지고 지켜온 고향, 자손들에게 물려주지 못한다면 우린 아무것도 아닌 기라, 살아온 게 헛산 게 되는 거야"라며 헛헛해 하셨다.

손희경 할머니는 걱정되어 말리는 자식들에게 "너희들이 내 자식인 것처럼 나도 할아버지 자손이다, 고향 팔아 묵고 조상을 무슨 낯으로 보나?"라며 윗세대와의 약속을 꼭 지켜야 한다고, 송전탑을 막아내지 못하면 그 밑에 들어갈 테니 그곳에 묻으라고 하셨단다.

송전탑이 들어서면? 고압 송전탑의 피해

어르신들은 송전탑이 들어서면 '죽음의 땅'이 된다고 한결같이 말했다. 구불구불 산길을 올라 산속 깊이 자리 잡은 평밭 마을에는 오래전부터 반세기 넘게 살아온 분도 계시지만, 현대 의술로 어쩌지 못하는 병을 얻었거나, 자연 속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기 위해 이주해온 분들도 계셨다.

집 바로 가까이 송전선이 지나가게 된다는 이금자 할머니도 그런 분 중 한 분이시다. 마흔여덟에 정신적인 충격 때문에 온몸이 마비되어 산골 생활을 시작하셨다는 할머니, 기적처럼 몸과 마음을 낫게 해준 고마운 땅을 지키려고 송전탑 반대 운동에 나선 것이다. 지난 5월 송전탑 현장에서 한전 직원, 용역들과 대치하던 중에 쓰러지셔서 몇 달 동안 병원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평밭마을 이금자 할머니
 평밭마을 이금자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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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공사재개에 맞서 싸우다가 쓰러져 몇달 동안 병원 치료를 받으신 이금자 할머니, 그날 일을 이야기 하시다 그자리에 털썩 주저 않으셨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몸이 오들오들 떨린다고.
 지난 5월 공사재개에 맞서 싸우다가 쓰러져 몇달 동안 병원 치료를 받으신 이금자 할머니, 그날 일을 이야기 하시다 그자리에 털썩 주저 않으셨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몸이 오들오들 떨린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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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들어와 산 지는 한 삼십 년. 집을 세 번이나 지었어. 처음에는 오솔길로 와서 텔레비전에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그런 집이었어. 대충 살다가 비포장도로가 들어와, 경운기로 보로꾸를 올려가지고 스라브(슬레이트) 집을 하나 지었고, 길도 좋아지고 설령 사람이 사는데 그리 무서운 게(송전탑이) 들어올 수 없다 생각하고 몇 년 전에 이 집을 다시 지었지.

밤이 되면 우리 마을은 칠흑같이 어두워요. 일반 전기에도 천둥 번개 치는 날에는 스파크가 일어나는 거야. 전기가 다 나가버려. 그런데 고압 전기가 지나가면 어떨지 나는 상상이 안돼요. 텔레비전 켜놓은 거 맹키로, 우우웅, 찌지직 소리도 난다는데, 비가 오면 더 심해지고, 날마다 그런 소리 들으매 어찌 살아요?"


일상생활에서 전기 의존도가 높아진 요즘, 송전탑도 매우 흔한 풍경 중에 하나인데, 어르신들 이야기를 듣다 보니 송전탑이 '호환마마' 보다 무섭게 느껴졌다. 동물도 사람도 살 수 없고 농사도 지을 수 없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 송전탑 반대 주민들 이야기 속에서 피해 사실이 부풀려진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없지 않았는데, 다음날 오후 늦게 평밭 마을에 갔다가 소나기를 만났다.

시커먼 구름이 몰려와 순식간에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폭우가 쏟아지고 천둥 번개가 내리쳤다. 비를 피해 가까운 집에 들렀는데 요란한 천둥소리 뒤에 갑자기 불이 꺼졌다. 스파크가 튀며 차단기가 내려가고, 순간 이금자 할머니가 이야기한 그 상황에 직면했다. 집안은 캄캄하고 밖이지만 바로 내 머리 위에서 천둥이 나를 덮칠 듯 내리쳤다. 내 머리 위로 고압의 전류가 흐른다는 상상이 자연스럽게 떠올랐고 아찔해서 몸서리쳐졌다.

평밭마을, 80년 된 집에서 60년째 살고 계신단다. 옛날에는 육남매가 걸어서 산을 넘어 학교를 다녔다고.
 평밭마을, 80년 된 집에서 60년째 살고 계신단다. 옛날에는 육남매가 걸어서 산을 넘어 학교를 다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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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밭마을 유기농 토마토, 전원 생활
 평밭마을 유기농 토마토, 전원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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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밭마을 전원생활, 옥수수
 평밭마을 전원생활, 옥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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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밭마을 전원 생활, 옥수수
 평밭마을 전원 생활, 옥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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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밭마을 전원생활
 평밭마을 전원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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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력(한전)이 밀양에 세우려고 하는 송전탑에는 세계 최고, 76만5000볼트 초고압 전류가 지나갈 예정이다. 높이만 해도 100m가 넘어, 40~50층 아파트와 맞먹는단다. 내 집 가까이에 이렇게 거대한 탑이 들어서면 보기만 해도 두렵고 답답한 마음이 들 것 같다.

그러나 그보다 무서운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전자파, 이로 인한 건강상의 피해라고들 말한다. 내가 밀양에 도착한 그날(7월 29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장하나 의원(민주당)은 2009년 한전의 내부 보고서를 인용하여 76만5000볼트 송전선로 인근 80m 떨어진 곳에서 평균 3.7mG(밀리가우스, 전자파의 세기를 표시하는 단위)의 전자파에 노출되며, 이런 수치는 미국, 스웨덴 전문가들이 소아백혈병과 각종 암 발병률이 높아진다고 경고한 위험기준을 넘어선 것이라고 발표했다.

<경향신문>은 같은 날 한 기사에서 "장 의원은 '한국의 산업계에서 정한 833mG라는 전자파 노출기준은 스위스의 414배, 네덜란드의 108배, 이탈리아의 83배에 이르는 비정상적인 수준'이라며 한국도 선진국 수준으로 전자파 노출기준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보도했다.

사실 전자파의 유해성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이렇게 전자파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는 것이 유해하다는 연구 결과도 있지만, 한전 측에서는 이런 연구들이 '과학적 근거력'에 기반하는 위해성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인체에 직접 실험을 할 수도 없고 역학 조사를 하더라도 전자파라는 단일 요소와의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밝히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송전탑 인근의 주민이 암에 걸렸을 때, 이것이 전자파 때문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정확히 알아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자파에 대한 의구심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인체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기전을 밝히진 못했더라도(확증은 없지만), 전자파가 높은 지역에서 암 환자가 많다는 통계는 의미심장하다.

어르신들이 고압 송전시설의 피해에 대해 소상히 알게 되고 심각성을 느끼게 된 것은 고압 송전시설이 들어선 '경과지'를 답사하고 그곳에 사는 주민들과의 만남을 통해서다. 충청도 당진, 예산, 청양, 경기도 양주, 강원도 평창 등에는 이미 76만5000볼트와 같거나 낮은 전류의 고압 송전 시설이 가동 중인데 밀양의 '선배' 격인 이 지역 주민들의 '증언'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송전시설이 지어지고 나서 소음이 심해 밥맛도 잃고 잠을 잘 못 잔다는 이야기, 집에서 기르는 개나 축사의 동물들이 유산을 하고 기형을 낳았다는 이야기, 노환과 교통사고가 주요 사망원인이었던 장수 마을에 갑자기 암환자가 많아졌다는 이야기, 항공 방제를 할 수 없어 농사 피해가 크다는 이야기, 땅값이 시세의 30%로 떨어지고 매매가 어렵다는 이야기 등등. '선배' 지역의 현재로부터 유추할 수 있는 송전탑 건설 이후 밀양의 모습은 밝지 않다. 답사한 지역의 주민들은 멋모르고 고압 송전시설을 받아들인 걸 후회한다면서 밀양에는 절대로 세워지지 않게 하라고 당부를 하였단다.

"내가 강원도 평창 땅에 다녀왔거든예, 거기도 765(76만5000볼트 송전탑)가 섰는데 30만원 하던 땅이 5만 원에도 매매가 안 되는 기라."(위양리 권영길 이장님)

당장 눈앞의 걱정은 농사 피해와 땅값의 하락에서 오는 재산상의 손실. 밀양에서도 이미 "땅을 사러 왔다가 저기에 철탑이 들어선다 하면 두말 않고 가 버려" 거래 자체가 안 된단다. 은행에서는 담보 가치가 없다고 대출도 해주지 않아서 "OO네 둘째 아들이 생전 처음으로 아부지한테 도와 달라 했는데 못 해줘서 부자(父子)가 며칠을 끌어안고 울었다더라"와 같은 이야기를 흔히 들을 수 있었다.

송전탑 건설 공고가 난 지 올해로 9년째, 재산의 전부인 농토와 집의 가치가 '제로' 상태라서 자손들 학비와 결혼자금 마련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고 했다.

2012년 1월, 분신 자결한 이치우 어르신의 논
 2012년 1월, 분신 자결한 이치우 어르신의 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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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우 어르신 부인
 이치우 어르신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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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외면 희곡리 보라마을. 2012년 1월, 분신 자결한 이치우 어르신의 논에 가 보았다. 송전탑이 논 한가운데 세워져 송전선이 논을 가로질러 지나갈 예정이었다. 이치우 어르신 삼 형제가 평생을 바쳐 이룬, 목숨과도 같은 열 마지기의 땅, 그 땅에 아파트 40층 규모의 철탑을 꽂고 전자파 흐르는 고압선이 지나는 대가로 받을 수 있는 보상금은 보잘것 없었다.

"3형제의 시가 약 6억9000만 원 상당의 토지에 대한 실제 보상은 8700만 원에 불과한 셈이다. 한전에서는 송전탑과 송전선로가 인근에 건설되더라도 '농사는 계속 지을 수 있다'는 전제하에 보상금을 지급한다. 광범위한 지역에서 토지의 가치가 폭락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전제 때문에 송전탑 부지와 선하지(송전선로 좌우 3m) 소유자에 대해서만 소액의 보상금을 개인에게 지급한다."(밀양765kV 송전탑 인권침해조사단 보고서)

한전에서는 전자파의 유해성에 대한 확증이 없다고 하지만, 철탑이 가로지르는 논에서 농사 짓고, 그 논에서 난 쌀을 먹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파트 40~50층 규모의 철탑 밑에서 날마다, 매 순간 윙윙 치지직, 소음을 들으며 나날의 일상을 밝고 건강하게 지켜낼 수 있을까? 한전의 보상 범위인 철탑 부지와 선하지를 넘어서 광범위하게 주변 지역의 땅값이 폭락한다는 사실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보상? 우리가 원하는 것은 보상이 아입니더. 할래야 할 수도 없고. (송전탑이) 여기 들어오면 평생 끌어안고 살아야 하는데, 그걸 무슨 수로 얼마로 보상해줄 수 있습니꺼? 돈 몇 푼 받아 어데 가서 뭐하고 살겠능교? 땅 없이, 농사 안 짓고 우예 살라합니꺼."(상동 김영자 아주머니)

고백하건대 밀양에 내려올 때 나는 '주민들이 아무리 백지화를 주장해도 결국엔 보다 합리적인 보상으로 마무리되지 않겠나?' 하는 패배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주민들의 현실적인 목표도 합리적인 '보상'에 있지 않을까, 내심 돈을 더 바라서 이 싸움에 동참하는 분들도 있겠거니, 하는 불순한 마음도 있었다.

우리는 크고 멋지게 만들어 준다는 이야기에 약하니까, 부수고 허물고 새로 짓는 걸 미덕으로 알고 살아왔으니까. 떠올려보면 '개발'의 논리에 우선하는 게 있었던가? 서울의 달동네를 밀어내고 새 아파트를 지을 때 그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형편을 봐준 적이 있었던가? 개개인의 손때가 묻은 삶의 흔적, 함께 나누고 어울리며 쌓아온 인정 따위를 돌아볼 겨를이 있었던가 말이다.

처음에는 '고향을 지키며 이대로 살겠다'는 외침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직접 어르신들을 만나면서 '돈 필요 없고 보상을 바라지 않는다'는 기백이, 물러섬 없는 용기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전과 정부가 이 사업을 밀어붙일 것이고 곧 또다시 공사를 강행할 텐데, 당장 내일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할매들은 고추를 따고 깻잎을 따고 깻단을 묶는다. 농성장 옆 자투리 땅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각종 채소를 길러 먹는다. 공권력의 폭력에 치를 떨면서도 '사람이 제일 중요한 기라, 설마 사람 죽이는 일을 끝까지 밀어 붙이겠나' 라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다.

절박한 현실에 비해 밝고 유쾌한 할매들의 모습은 무엇 때문일까? 외부의 폭압에도 흔들리지 않고 꿋꿋이 일상을 꾸려나가는 그 힘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문득 할매들이 나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리저리 떠돌아다니지 않고 한 곳에서 땅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선 나무. 할매들의 그 힘과 여유는 바로 오랫동안 '뿌리내린 안정감'이 아닐까. 짧게는 십수 년, 길게는 수백 년, 조상 대대로 이 땅에 깊이 뿌리내리고 살아온 안정감.

이치우 어르신 분신하신 장소. 흔적이 남아있다
 이치우 어르신 분신하신 장소. 흔적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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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우 어르신이 스스로 몸을 태우고 스러져간 흔적. 보상을 원하지 않는다고, 여기서 지금 이대로 살고 싶으니 다른 대안을 모색하자고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다는데 한전은 주민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고 공사를 계속 밀어붙이고 있다. 무리한 공사 강행으로 여론이 나빠지면 보상금을 올려주겠다는 말을 언론에 흘린다.

"얼마면 돼, 얼마면 되겠니?" 드라마에 나와 화제가 되었던 한때의 유행어가 떠오른다. 아무리 돈이 좋고 돈이면 모든 게 이루어질 것 같은 세상이라지만, 그래도 우리 마음속 어딘가에 최소한의 믿음은 있지 않은가. 돈으로 가질 수 없는 것도 있다는 것, 사랑, 사람.

밀양 희곡리 보라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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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희곡리 보라마을
 밀양 희곡리 보라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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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라면 마음 속에 다 갖고 있는 거예요, 돌아갈 곳, 고향!"(위양리 권영길 이장님)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블로그에도 게재됐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작성한 기사에 한해 중복송고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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