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전란의 잿더미 속에서도 시장은 열리다(서울, 1951. 7. 6.).
 전란의 잿더미 속에서도 시장은 열리다(서울, 1951. 7. 6.).
ⓒ NARA, 눈빛출판사

관련사진보기


#15. 동대문시장

결혼

1965년 봄, 김준기는 김교문 교수 처조카 장미영과 결혼했다. 김 교수 부부가 적극 권유한데다가 남쪽에 피붙이 하나 없는 외로운 신세, 그리고 준기 자신도 오랜 자취생활을 끝내고 싶은 마음 등이 얽힌 때문이었다. 게다가 준기도 이제 그만 최순희를 잊어야겠다는 마음이 그를 결혼식장으로 향하게 했다.

결혼식 후 그들 부부는 직장 가까운 대전 유성에다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준기는 일단 결혼하면 그때부터는 최순희를 잊게 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새록새록 생각이 더 솟아났다.

그와 함께 구미 형곡동 김교문 행랑채에서 순희와 함께 지냈던 그 순간이 떠오르거나, 금오산 아홉산골짜기에서 아기자기하게 지냈던 산골 피난생활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준기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자꾸 다짐하면서도 마음 속 깊이 연기처럼 피어나는 순희에 대한 그리움을 지울 수가 없었다. "빛과 사랑은 지울 수 없다"는 말 그대로였다.

그해 8월 15일이 다가오자 준기의 마음은 더욱 갈팡질팡했다. 8월 15일 준기는 아내에게 병원에 출근한다고 거짓 핑계를 댄 뒤, 대전 역에서 열차를 타고 서울시청 앞 덕수궁 대한문으로 갔다. 그날도 땅거미가 질 때까지 대한문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터덜터덜 발길을 돌렸다.

결혼 이듬해 딸이 태어났다. 이름을 영옥이라고 지었다. 김영옥은 백일이 지나자 방실방실 웃었다. 준기는 딸의 웃는 모습을 보면 세상만사를 잊을 수 있었지만, 불을 끄고 잠자리에 누우면 또다시 순희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레 왜 부모를 버리고 남쪽에 남았는가?'

준기는 스스로 물어보았다.

'최순희 때문이디.'

답이 저절로 나왔다. 준기는 자기의 결혼이 경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순희 누이를 꼭 만나, 자신이 좀 더 느긋하게 기다리지 못하고 결혼한데 대해 사과하는 게 바른 도리라는 생각에 미쳤다. 준기는 그 이듬해 8월 15일에도 슬그머니 덕수궁 대한문에 갔다.

미 해군 전투기가 폭탄을 잔뜩 달고 북한 진지를 폭격하고자 항공모함을 떠나고 있다(1951.9. 4.).
 미 해군 전투기가 폭탄을 잔뜩 달고 북한 진지를 폭격하고자 항공모함을 떠나고 있다(1951.9. 4.).
ⓒ NARA, 눈빛출판사

관련사진보기


'빨갱이'

그날도 대한문 앞에서 오후 내도록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허탕을 치고 밤늦게 대전 역에 내렸다. 그런데 어쩐지 맨 정신으로 집에 들어가기가 싫었다. 준기는 대포 집으로 가서 폭음을 하고는 통금 직전에야 집에 돌아갔다. 그날 아내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았다.

"당신 오늘 어디 갔다 오노?"
"……."
"왜 대답을 못하노."
"……."
"또 빨갱이 그년 만나러 갔지."

준기는 '빨갱이'라는 그말에 술이 번쩍 깨었다. 그 말에 이성을 잃었다.

"메라구? 빨갱이 거(그)년!"
"그 년이 빨갱이가 아니면 이 세상에 누가 빨갱이고! 지 발로 인민의용군에 입대한 그년은 아주 새빨간 빨갱이지."
"기럼, 네 서방은!"
"……."

준기는 빨갱이라는 말에 더 이상 분을 참지 못하고 방안에 있는 물그릇을 집어던졌다. 하필이면 그 물그릇에 화장대 거울이 박살났다. 그가 남쪽에서 살아오면서 가장 듣기 싫은 말은 '빨갱이'라는 말이었다.

대한민국은 인민군 포로들에게 언젠가는 반공 포로가 되라고, 북으로 돌아가는 송환을 거부하라고, 온갖 감언이설로 꾀어 붙잡아 놓았다. 그런 뒤, 늘 뒤에서 빨갱이 전력이 있다고, 이북 포로 출신들을 감시하거나 사상을 의심하는데 준기는 질력이 났다. 왜 백성들이 한때 공산주의 사상에 물들었는지 생각은 하지 않고, 공산주의자라면 무조건 죽여 버리는 세상이 무섭고 싫었다.

학살 현장(진주, 1950. 10.). NARA 캡션에는 가해자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었다.
 학살 현장(진주, 1950. 10.). NARA 캡션에는 가해자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었다.
ⓒ NARA, 눈빛출판사

관련사진보기


한국전쟁 중 많은 남과 북의 젊은이들이 북한 측이 조국을 미 제국주의로부터 해방시킨다는 말에 자의로, 타의로 붉은 머리띠를 두르고 전선으로 나갔다. 남한 군경 당국이나 우익들은 그들의 처지를 이해하려 하거나, 설득시키기에 앞서 잡는 족족 총살하거나 죽창으로 찔러 죽였다.

북한 당국이나 좌익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지주나 자본가를 무조건 타도 대상으로 백안시하거나, 국군이나 경찰, 그 가족을 반동으로 몰아 인민재판에 회부하거나 즉결처분했다. 문명한 나라에서 사람들이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다른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일들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숱하게 이루어졌다. 그렇게 학살된 이가 한국전쟁 전후로 일백만 명 전후로 추산하고 있다.

편지

이튿날 아침, 아내는 준기와 등을 진 채 일어나지 않았다. 준기는 아침밥도 먹지 못한 채 출근했다. 그날 저녁 예삿날처럼 퇴근했는데 어쩐지 집안이 썰렁했다. 아내도, 딸 영옥이도 보이지 않았다. 방안 책상 위에는 편지 한 통이 놓여 있었다.

영옥 아버지 보세요.
저는 오늘 당신 곁을 떠나갑니다. 어쨌든 부부의 인연을 맺은 이상 저는 많이 참으며 살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당신 가슴 속에는 저는 없었고, 온통 그 여자만 있었습니다. 세월이 지나면, 아이가 태어나면, 당신 마음속의 그 여자가 지워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짙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도 여자입니다. 남자의 뜨거운 사랑을 받고 싶습니다. 살림이 가난한 것은 참고 살 수 있어도 애정 없는 부부생활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영옥이를 데리고 갑니다. 당분간 떨어져 살면서 서로의 앞날을 깊이 생각해 보는 게 좋겠습니다.
단기 4299년 8월 17일
영옥 모

한 유엔군 병사가 묵주를 꺼내들고 기도하고 있다.
 한 유엔군 병사가 묵주를 꺼내들고 기도하고 있다.
ⓒ NARA, 눈빛출판사

관련사진보기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여기에 실린 사진은 대부분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수집한 것입니다. 본문과 사진이미지가 다를 경우 한국전쟁의 한 자료사진으로 봐주십시오.



태그:#어떤 약속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이 기자의 최신기사"아무에게도 악을 갚지 말라"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