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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안정숙씨 자리인가요?"
"예, 그런데요. 누구신지요?"
"안녕하세요! 저 환우회 '울보'인데요"
"아! '울보'님…."

그렇게 불쑥 병실로 들어선 그녀는 아주 오랜 경력자(?)만 할 수 있는 문병 스타일을 알고 있었다. 컵라면을 종류별로 담아온 큰 비닐봉지를 들고, 나이 드신 어르신과 함께 왔다. 참 반갑고, 고마운 그 사람은 우리에게 정말 귀한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사실 우리는 초면이었다. 몇 달 전, 다섯 번인지 여섯 번인지 계속된 재발과 욕창, 병원을 떠돌아다니는 동안 아내와 나는 몸도 마음도 지치고 다 식은 풀빵처럼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앞에 다녔던 강남의 S병원도 아내가 재발할 때마다 코스요리처럼 반복해서 돌리기만 했다. 응급실, 중환자실, 일반 입원실, 재활과를 거치면서 스테로이드 5일 주사, 재활 3주 그리곤 퇴원! 그렇게….

두 번째인가 재발하여 입원했을 때, 또 재발할까봐 두려워 퇴원 직전에 이렇게 물었다.

"집에 내려갔다가 또 재발하면 어쩌지요?"
"그럼 또 응급실로 오세요."
"다른 치료법이나 약은 없나요?"
"지금으로서는 별 방법이 없네요."

그것이 대답의 전부였다. 말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 뒤 3번째, 4번째, 재발로 입원했을 때 실재 과정이 그랬다. 재발하면 응급실로 오는 걸 몰라서 물어본 것이 아니었는데, 대답은 그랬다. 희귀난치병으로 지정받는 질병이니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지만, 너무 속수무책이고 다른 시도를 해보지 않는 모습이 몹시 실망스러웠다.

한 번은 주치의사가 이렇게 말했다.

"혈장교환술이라는 치료법이 있기는 한데, 비용은 넉넉해요?"

나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이미 통장은 바닥나고, 빚으로 녹초가 된 지경이라 솔직히 여유는 없다고 말했다. 주치 의사는 '한 번에 80만 원씩 여러 번 해야 하는데…'라고 혼잣소리로 말하더니 그냥 돌아가 버렸다. 그리곤 다시는 말 꺼내지 않고 흐지부지되었다. 나중에 퇴원할 때 발급받은 의무기록지를 보니 그 날짜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담당 레지던트의 소견 - 보호자들의 형편이 비용 부담하기 힘들어 혈장교환을 포기함."

그렇게 기록되어 있었다. '아니, 꼭 필요하고, 하면 분명 좋아질 치료라면 해보자고 말이라도 했어야하지 않나?' 정말 억울하였다. 여유가 넉넉하지 않다고만 했을 뿐, 못한다는 말도 안 했는데, 시도도 해보지 않고 아예 포기했다고 적다니.

그런 상태에서 이 병을 가진 분들이 모이는 카페에 답답한 심정을 계속 올리고 있었는데 집사람의 상태를 본 그녀가(그때 닉네임이 '울보') 연락을 해왔다. 자기도 2년 가까이나 전신이 마비되어 거동도 못하며 침대 생활을 했는데 지금은 일할 정도로 회복되었다면서 증상이나 상태가 많이 비슷하니 자기가 치료받은 병원으로 꼭 옮겨서 항암주사요법을 받으라고 권했다. 얼마나 간곡하고 진지하게 말을 하는지 처음엔 흘려듣다가 점점 희망이 되어 갔다. 지푸라기가 동아줄이 된 것이다.

혹시나 하고 S병원 담당선생님께 이 병원에서도 그 치료를 좀 해줄 수 없는지 직접 물어보았다. 돌아온 대답은 한 마디로 "노!"였다. 그 항암주사제는 백혈병과 악성류머티스성 외에는 보험적용도 안 해준다고 했다. 만약 개인이 전적으로 비용을 비보험으로 부담한다고 해도 이 병원에서는 의사들이 모여 윤리위원회라는 걸 통해 결정해줘야만 가능하단다. 더 결정적인 말은 설사 허가가 나도 자기는 주사제의 부작용이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고 싶지 않다며 돌려서 거부했다.

실낱 같은 희망으로 예약했던 그곳, 3개월 후 겨우 들어가

서울대병원 전임시절 고교 담임선생님이 걸린 다발성경화증 소식을 듣고 전공을 바꾸어 유학까지 가신 분, 스승과 사제의 깊은 정은 우리 가정에까지 도움이 되는 운명을 가져왔다. (중앙일보 기사 자료)
▲ 절망에서 희망으로 유턴하게 해 주신 의사선생님 서울대병원 전임시절 고교 담임선생님이 걸린 다발성경화증 소식을 듣고 전공을 바꾸어 유학까지 가신 분, 스승과 사제의 깊은 정은 우리 가정에까지 도움이 되는 운명을 가져왔다. (중앙일보 기사 자료)
ⓒ 김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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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옮겨온 여기 일산 국립암센터에서는 그 주사제로 치료를 해주신다. 나중에 어느 의료지에 기고하신 지금 담당 의사선생님의 글을 보고야 알았다. 왜 그렇게 다른 병원과 의사들이 책임문제, 위험도가 따른다고 기피하는지 그런데도 그 위험하고 비싼 비용의 항암주사 치료법을 우리 담당선생님은 마다하지않고 감수하며 사용하시는지.

온갖 약과 치료를 다 해보고도 듣지 않아 절망하고 있는 환자들을 생각하면 그래도 조금의 가능성과 효과를 본 이 치료법을 의사의 의무상, 또 동시에 자신의 양심상 포기할 수가 없다는 말씀이셨다. 당연히 심한 부작용시 자기가 져야 할 책임문제를 알면서도 불구하고, 그랬다. 그렇게 하기 어려운 결심을 하고, 까다로운 뒷 관리를 하면서, 이곳 의사 선생님은 치료를 강행하고 계셨던 것이다.

"세상에는 똑똑하면서 '비인간적인 성공'을 한 사람들도 있고, 똑똑하면서도 '인간적인 성공'도 한 사람들도 있다. 때로 후자는 해피엔딩이 안 될 경우도 있고, 바보라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분들은 이 땅의 희망이고 기쁨이다."

입원 예약을 해두었던 그 병원, 일산 국립암센터에서 병실이 비었다는 연락이 왔을 때, '이제 진짜로 가는 거야?'라며 아내는 아직도 조금은 불안해하며 내게 물었다. 그럴 만했다. 실낱 같은 희망을 가지고 예약을 해두었지만, 계속 어긋나면서 3개월이 넘도록 못 오던 참이니.

처음에는 돈이 마련되지 않아서 그러다가 KBS1 <사랑의 리퀘스트> 프로그램에서 모금방송 후 치료비를 지원해주어서 비용이 마련되니 또 병이 재발해서 발목이 잡혔다. 다시 응급실 중환자실, 일반실로 한 바퀴를 돌아야만 했다. 좀 나아서 갈 만하니 이제는 입원실이 없어서 기다려야 했다. 그러다 간신히 입원실이 나왔다고 연락이 왔는데 이번에는 간수치가 너무 높아져서 또 주저앉았다.

세상에 누가 일부러 지켜보면서 골탕을 먹이려고 하는 게 아니고선 이럴 수가 없다. 그건 내과 대상이라 신경과 환자로 들어올 수가 없어서 그대로는 입원이 불가능했다. 치료를 하고 오라고 해서 또 보류. 그렇게 3개월이 지나가니 막상 입원이 눈앞에 닥쳐도 불안했던 것이다. 또 무슨 일이 생길까봐.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옮겨온 병원에서 정말 혹독한 치료를 받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멀어져 갔다. 외로움이 몰려왔다. 몸이 고단해도 마음이 의욕을 잃지 않으면 견딜 수 있는데 슬슬 조용함이 서러움으로 변하는 중이었다. 누군들 안 그럴까? 긴 병에는 자식도 효자가 되기 어렵다는데 하물며 남들이야, 강남에 있을 때는 계속 문병도 오고 관심을 가지던 사람들도 일산이라는 반대편 먼 거리로 오고 나서는 하나 둘씩 뜸해지더니 발이 끊어졌다.

심신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힘들어하는 날에 우리를 이 병원으로 옮기게 한 그분이 문병을 온 것이다. 병실로 걸어서 들어오는데 도저히 몇 년을 침상에서 꼼짝 못 했다는 분 같지 않아서 많이 놀랐다. 걷는 모습이 약간의 불안하다고 하면 굳이 보일 정도지, 얼른 보면 모를 정도다. 아내보다 나이가 많이 어린 동생뻘이라며 대뜸 아내를 언니라고 불렀다. 힘내고 치료하면 자기처럼 회복되어서 생활로 복귀할 수 있다며.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했던가? 눈으로 보이는 결과는 정말 힘이 세다. 그리고 심리적 효과는 오래간다. 어찌 안 믿을 것인가? 바로 앞에 그 당사자가 설명하는데…. 그 뒤로 수시로 전화나 문자로 지금은 어떤지, 자기가 겪었던 과정마다 어려움도 알려주고 격려해 온다. 그리곤 달마다 통장으로 얼마의 돈을 송금해준다. '자장면 데이인데 자장면을 사드세요. 복날인데 삼계탕 드세요! 오늘은 언니 생일이네요, 케이크 값 보내요!' 등 그때에 어울리는 음식을 사 먹으면 좋겠다는 문자와 함께!

"세상에는 빚을 갚는 길이 두 가지가 있나보다. 하나는 직접 돌려주는 방법, 또 하나는 다른 곳으로 흐르게 하는 방법, 그렇지 않으면 잘 모르던 남에게서 선의로 오는 도움을 설명할 길이 없다."

만약 아내가 회복되어 일어난다면, 그녀가 개업한 공예점을 아내와 방문하고 싶다. 그녀를 치료했던 의사는 그녀에게 '유리공주'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그만큼 조심스런 상태다. 그럼에도 그녀는 아프기 전에 하던 피아노 학원을 그만두고 새로 공예점을 개업하는 도전을 했다.

누군가가 혈연관계도 이익관계도 아닌데 이렇게 정성으로 낫기를 빌어주는 분이 있다면 어떻게 포기하겠는가? 진정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 신세는 갚아야 하지 않을까? 그때마다 주저앉고 싶은 마음을 세워 일으킨다. 그리고 속으로 다짐한다.

"울보님, 용감한 유리공주님! 같은 병을 가지고도 길이 되어주고, 늘 격려해주신 마음을 꼭 갚겠어요. 병에 지지 않고 사는 모습으로…."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2009년 10월부터 2009년 11월 사이, 국립암센터에서 집중치료를 받던 이야기입니다.



태그:#희귀난치병, #투병,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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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내 인생의 핸들이 내 손을 떠났다. 아내의 희귀난치병으로, 아하, 이게 가족이구나. 그저 주어지는 길을 따라간다. 그럼에도 내 꿈은 사람사는세상을 보고 싶은 것, 희망, 나눔, 정의, 뭐 그런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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