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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개월 동안 남편(미국인)과 인도·네팔·동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다녀왔습니다. 한국에서만 평생 살아온 여자와 미국에서만 평생 살아온 남자가 같이 여행하며 생긴 일, 또 다른 문화와 사람들을 만나며 겪은 일 등을 풀어내려고 합니다. - 기자 말

칼리가트 사원 앞의 더스틴
 칼리가트 사원 앞의 더스틴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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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두교에는 3억 명이 넘는 신이 있다. 그중 칼리 여신은 잔혹하기로 유명한데, 이 여신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사람을 희생 제물로 바쳐야 한다. 콜카타에 있는 칼리가트 사원도 사람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의식이 행해졌던 곳이다. 영국 식민지 시대 이후 잔인하다는 이유로 사람 대신 염소를 바치는 의식으로 완화(?)되었다고. 이를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으면 의식 시간에 맞춰 사원을 찾으면 된다는 소문을 들은 터라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길을 잃고 헤매다 사원에 도착했을 때는 의식이 끝난 지 한참 지나서였다. 의식은 끝났어도, 칼리가트 사원은 어디에선가 모여든 힌두교도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사원 입구에 들어서면 사제를 가장하고 돈을 뜯으려는 사람이 있다. 별로 안내가 필요 없는 사원이니 도와준다고 해도 그냥 무시하고 들어가면 된다.'

가이드북의 여느 챕터와 마찬가지로, 칼리가트 사원 소개 글에는 사원에서 맞닥뜨릴 수 있는 사기에 대한 조언이 담겨 있었다. 우리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 입구로 들어섰다. 입구로 한 발짝 들어가자, 시간의 질량이 다른 세계로 들어온 것처럼 모든 것이 어지럽고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구원의 천사처럼, 하얀 옷을 말끔하게 입은 남자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칼리가트 옆 마더테레사 하우스
 칼리가트 옆 마더테레사 하우스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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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시오. 저는 이곳의 사제랍니다."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우리에게 밝은 주황색 꽃목걸이를 하나씩 걸어주었다. 순간 금전적인 요구가 있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이미 꽃은 내 목에 걸려 있었고,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통에 사제가 꽃값으로 얼마를 요구할지 따위를 계산해 볼 시간은 없었다. 사제는 사원에 꽃을 뿌려야 하니 꽃을 사라고 했다. 꽃목걸이를 두르고 손에 또 다른 꽃을 한주먹 쥔 우리는 사제와 함께 인파가 가득한 곳을 비집고 들어갔다.

"칼리사원은 인도에서도 아주 유명한 사원이오. 여기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는 사람들이 다 칼리여신을 영접하기 위해 인도 전역에서 모여든 사람들이지요. 여기서는 매일 아침 염소의 목을 따 그 피를 여신에게 올리는 의식을 거행한다오. 몇 시간 전에도 의식이 있었오. 바로 저곳이 그 의식을 거행하는 곳이오."

사제가 가리킨 곳에는 끈적이는 붉은 액체가 지워지지 못한 채 얼룩져 있었다. 사제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여있는 곳으로 우리를 이끌더니, 이리저리 몸을 밀치는 사람들 사이에 서서 큰 목소리로 사원에 대해, 칼리여신에 대해 떠들어댔다. 중간중간 말은 사람들의 웅성댐 속에 묻혀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사제는 한참을 떠들다 더 큰 목소리로 우리에게 물었다.

"저기 사람들 앞쪽에 있는 성상이 보이시오? 그게 바로 위대한 칼리여신이라오!"

조금의 빈틈도 없이 사람들이 이렇게 빽빽이 서 있는데, 성상이 보일 리가. 우리는 사제에게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사람들로 붐볐던 그곳에 신비의 길이 열렸다

콜카타의 거리
 콜카타의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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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사제는 눈에 불을 켜더니 작은 공간에 와글와글 모여있는 50여명의 사람들을 둘로 가르기 시작했다. 기도를 올리고 있던 사람들은 그런 사제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조금씩 양옆으로 물러났다. 놀랍게도, 사람들의 무리가 양쪽으로 갈라지더니, 신비의 사람 길이 열렸다.

"보이시오?! 저기 세 개의 붉은 눈을 가진 칼리여신이! 자 이제, 손에 들고 있는 꽃을 던져요!"

뭐 꽃? 꽃이 어째? 손에 들려있는 꽃이 던지기 위한 것이었으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던 우리는, 당황한 눈빛으로 사제를 바라봤다. 사제는 이렇게 하면 된다는 듯이 팔을 휘휘 저으며 꽃을 던지는 시늉을 했다. 하라면 하는 수밖에. 우리는 사제의 모습을 흉내내며, 기도하는 사람들의 머리 위로, 주황색 꽃을 힘껏 던졌다.

사제는 만족한다는 듯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리는 기도하는 사람들 무리를 벗어나 큰 나무가 있는 곳으로 갔다. 나무에는 칼리여신에게 바치는 하얀 소원들이 달려있었다. 내 옆에는 애절한 눈빛으로 칼리여신을 올려다보며 기도를 올리는 젊은 남자가 있었다.

나는 잠시 남자의 눈빛을 바라봤다. 나는 저런 눈빛을 가진 적이 있었는가. 무언가를 저렇게 절실히 기원하고 바란 적이 있었던가. 저 남자가 저토록 절실히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분명, 자신을 위한 기도는 아닐 것이다. 고작 부자가 되자고, 출세를 하자고, 자기를 위하자고 저런 눈빛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타인을 위한 눈빛일 터이다. 칼리 여신이 제아무리 잔인하다고 해도, 남자는 모든 걸 용서받을 수 있겠지. 타인은 위로받을 수 있겠지.

당했다, 여행서에서 경고한 그대로 당했다

콜카타 거리의 염소 떼
 콜카타 거리의 염소 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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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는 커다란 장부를 들고 다시 나타났다. 장부에는 덴마크에서 온 누가 몇 월 며칠 1000루피(한화 약 2만 원)를 기부했다느니, 미국에서 온 누가 2000루피를 기부했다느니 하는 기록이 적혀 있었다. 우리는 300루피를 꺼내 들었다.

"미안해요. 돈이 이거밖에 없어서."

우리는 이상하게도 사과를 하고 있었다. 사제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손을 내저으며 우리를 다시 밖으로 안내했다.

"안내를 하면 소량의 팁을 받지요."

사제의 노고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팁으로 100루피를 내주었다. 팁을 앗아간 사제는 우리 이마에 붉은 티카를 찍어주었다.

"… 아까 그 장부. 조금 이상하지 않아? 어떤 외국인이 믿지도 않는 힌두 사원에 2000루피씩이나 기부를 해?"
"기부금 300루피에 팁 100루피, 꽃값 50루피. 450루피 나갔네."

당했다. 여행서에서 경고한 그대로 당했다. 말레이시아에서 따라주지 않던 운은 인도에 와서도 따라주지 않는구나. 콜카타 대학 주변의 활발한 모습을 보고 싶어 찾아갔지만, 하필이면 일요일이었던 관계로 모든 상점의 문이 닫혀 있었다.

타고르 박물관은 하필 월요일인 관계로 휴관이었고, 지도를 보고 은행을 찾아 나섰지만, 지도가 잘못 표시돼 있었던 바람에 3시간 동안 콜카타 골목 구석구석을 헤매야 했다. 이젠 급기야 사기까지 당했다. 사원에 발을 들인 그 순간부터 나올 때까지, 정신을 빼앗긴 채 무얼 한 건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곱씹어 보았다. 우리는 잠시 말없이 길을 걸었다.

"긍정적이자고 하는 얘기는 아닌데 말이야, 사실 기분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아."

겁돌이인 더스틴이 말했다.

"사실 나도, 하루 숙박비 더 되는 돈이긴 한데, 돈이 아깝다는 기분은 안 들어."

짠순이인 내가 말했다.

"저 사제 아저씨 아니었으면 별 재미도 없었을 걸. 누가 우리를 위해 그 많은 사람 사이에 길을 뚫어주고 이마에 티카를 찍어줬겠어."

길 뚫어주고 티카 찍어준 값치고는 좀 과했지만 상관없다.

"우리, 어깨에 힘 좀 빼야겠어. 여기 모든 사람이 우리한테 사기 치려고 대기하고 있는 건 아니잖아. 그리고 사기 좀 당하면 어때."

콜카타의 거리
 콜카타의 거리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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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 만 원 돈 되는 450루피는 우리의 재정 상황과 인도의 물가를 생각하면 큰 돈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만 원은 만 원이다. 몇 푼 안 되는 돈 때문에 사람들을 의심하고, 작은 것에 분노하는 것이, 사기를 당하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이다.

"이번 사기 마음에 든다."

여행 첫날, 배낭 속 물건이 없어질까봐 사물함을 두고도 배낭을 하루 종일 메고 다녔던 더스틴의 입에서, 사기가 마음에 들었다는 말이 나오다니. 사기도 마음에 들고, 사기가 마음에 든다고 느낄 수 있는 여행도 마음에 든다. 필요에 의해 손에 쥐고 있는 물건이라도, 마음에서는 비워야 한다. 가진 것에 대한 마음을 비우고, 여행이 주는 사기 행각을 만끽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사제가 찍어준 이마의 붉은 티카를 훈장처럼 달고, 당당히 하우라역으로 향했다. 콜카타의 분주한 거리가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태그:#칼리여신, #칼리가트, #힌두교, #콜카타, #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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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한 부부의 히말라야 여행,' '불량한 부부의 불량한 여행 - 인도편'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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