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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미술관 본관 입구 대형전시홍보물. 1층에는 김구림전이, 2층과 3층에는 고갱전이 열리고 있다
 서울시립미술관 본관 입구 대형전시홍보물. 1층에는 김구림전이, 2층과 3층에는 고갱전이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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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림(1936~) 초대전 '잘 알지도 못하면서'가 서울시립미술관(SeMA 김홍희 관장) 서소문본관 1층에서 오는 10월 13일까지 열린다. 이 전시에선 영원한 전위작가라는 별명이 붙은 김구림의 60~70년대 작품을 중심으로 회화, 설치, 영상 등을 만날 수 있다. 이 중에는 당시 여건부족과 당국의 제재로 발표 못했던 작품도 있다.

김구림은 기존가치의 해체, 파괴, 전복을 통해 60~70년대 실험미술을 개척하고, 매체의 확대를 시도한 작가다. 그의 작품이 큰 미술관에서 전시된 것은 2000년 미국에서 귀국한 뒤 문예진흥원(현 아르코미술관)에서 연 회고전 이후 처음이다. 전위예술에 조예가 깊은 김홍희 관장은 그에 대한 재조명을 항상 심사숙고 했으리라.

비롯 늦기는 했지만,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김구림의 예술세계를 정리하는 도록작업도 이루어졌다. 3시간 인터뷰를 정리한 임근준(AKA 이정우)외 윤난지, 유진상 미술평론가, 이숙경 테이트 리버풀 큐레이터 그리고 김남수 무용평론가 등이 도록작업에 참가했다.

지난해 12월 런던의 현대미술 갤러리 테이트모던에서 김구림의 '바디페인팅' 작품이 세계적 거장 폴록, 호크니, 쿠사마 등과 함께 소개돼 반가웠다. 한국 작가로선 백남준 이후 두 번째였다. 그의 걸작 중 하나인 실험영화 '24분의 1초의 의미'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16mm필름 4개의 에디션으로 복원됐는데 테이트 모던 관계자들은 이 작품을 소장하기 위한 논의 중이란다.

유복한 유년기를 보낸 독학체질의 작가

김구림 I '불가해의 예술(art of incomprehensiblity)' 공간지 1970. 아래는 라이프지의 '쓰레기가 넘쳐난다(1969)'라는 제목의 기사와 사진. 그가 <라이프> 등을 통해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엿볼 수 있다
 김구림 I '불가해의 예술(art of incomprehensiblity)' 공간지 1970. 아래는 라이프지의 '쓰레기가 넘쳐난다(1969)'라는 제목의 기사와 사진. 그가 <라이프> 등을 통해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엿볼 수 있다
ⓒ 서울시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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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림 작가는 1936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다. 조부가 한의사라 유복한 편이었다. 중고시절은 대구에서 보냈고, 미대에 입학했으나 자신의 질문에 대답조차 못하는 교수와 등지고 독학의 길로 나선다. 처음엔 막막했으나 미국공보관 등에서 본 <타임>이나 <라이프>에서 희열을 느끼며 큰 영감을 받는다.

1958년 대구공보관에서 서정적 추상화 경향의 첫 전시회 열었다. 1960년엔 2차 평면 안에서 실험적 회화기법을 시도한다. 당시 붓 대신 손가락을 사용해 획기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라우젠버그'를 연상시키는 캔버스에 오브제와 신문을 붙이고 패널에 비닐을 오려붙이거나 유화를 칠한 다음 불로 태우고 다시 담요로 끄는 독특한 방식이다.

1967년 부산정보센터에서 열린 단체전 '예술문화초청'전에서는 당시 전성기였던 방적섬유회사 관리직을 맡고 있어 거기서 얻은 옷 꿰매는 도구나 공장에서 주운 부속물을 활용했다. 그는 그만큼 재료에 대해 고민이 많았던 작가다.

거의 전업 작가가 되면서 '회화68', '아방가르드(AG)그룹', '제4집단' 등 한국전위예술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김구림은 개성과 창의를 중시하는 미술 속에서도 당시로는 드물게 '차용'과 속돼 보이는 '키치' 등을 활용하며 독자적 길을 걸었다.

그는 예술가답게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는 의지가 강했고 그 누구에게 지시받는 걸 싫어했다. 초등학교시절엔 외과의사가 되고 싶었고, 중학교 땐 과학자가 되는 싶어 집안에 시계 등 남아나는 물건이 없었다. 영화감독, 연극연출, 무대조명, 무용안무 등 못하는 것이 없었으나 결국 종착역은 통역이 필요 없는 미술이었다.

치열한 실험정신을 구현한 전위작가

 김구림 I '매개항 1(Meditation Clause 1)' 광목, 물, 돌(cotton cloth water and stone) 500×700×30cm 1971. 전시장에 자연을 그래도 옮겨놓은 작품으로 그 발상이 놀랍다. 이우환의 '관계항'과 비교되는 또 다른 세계다
 김구림 I '매개항 1(Meditation Clause 1)' 광목, 물, 돌(cotton cloth water and stone) 500×700×30cm 1971. 전시장에 자연을 그래도 옮겨놓은 작품으로 그 발상이 놀랍다. 이우환의 '관계항'과 비교되는 또 다른 세계다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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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순이 다 되어가는 그이지만, 그는 아직도 자신에게 "미술이 뭔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던지면 여전히 치열한 실험미술을 계속하고 있다. 그는 지난 15일 기자간담회에서 "60년 당시에 나는 당시 화가가 아니라 미친 사람이었다"며 그동안 겪은 대중의 몰이해에 대한 서운함도 토로했다.

그는 첨단을 걸었고 항상 미술의 본령인 미지의 새로운 세계를 추구했다. 시대정신을 외면한 작품은 위선적이라고 생각했다. 또 예술의 경계를 없애면서 창조적 상상력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키고 대중에게 비전과 상상력을 유희방식으로 제시했다.

그는 세계적 미술운동인 '플럭서스'와 상통했고 구르는 돌이나 흐르는 물처럼 시대에 따른 변화를 시도했다. 이는 팔순나이에도 노트북과 인터넷으로 작업하는 모습에서도 알 수 있다. 그는 세월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 작가는 매너리즘에 빠진 작가로 봤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신은진 큐레이터는 "김 화백은 평생 열정적 작가였으나 모르는 이가 많고 또한 70년대 단색화 작가군에 비해 너무 안 알려져 재조명이 필요했다"고 설명한다. 이번 제목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 <잘 알지도 못하면서>(2009)에서 차용한 것으로 작가의 넋두리인지 몰라도 관객의 호기심을 끌만큼 매우 참신하다.

2011년 <김달진미술연구소>에서 미술전문가들 대상으로 실시한 '재조명해야 할 한국현대미술가' 조사에서 김구림은 2위에 올랐다. 매년 500점 이상의 작품을 한다는 말에서 그의 작가적 프로기질과 정열을 확실하게 가늠할 수 있다.

기존미술에 몸과 시간의 담론 도입

김구림 I '바디페인팅(Body Painting)' 퍼포먼스 1969. 몸도 캔버스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다. 2012년 12월 영국 '테이트모던'에서 폴록, 호크니, 쿠사마 등과 함께 전시됐다
 김구림 I '바디페인팅(Body Painting)' 퍼포먼스 1969. 몸도 캔버스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다. 2012년 12월 영국 '테이트모던'에서 폴록, 호크니, 쿠사마 등과 함께 전시됐다
ⓒ 서울시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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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술에 김구림이 없다는 것을 몸에 비유하면 한쪽 팔이 없는 것과 같다. 회화와 조각에만 집중되었던 60~70년대에 바디페인팅, 개념미술, 오브제(레디메이드), 판화, 세라믹, 대지미술, 환경미술, 과정미술, 메일아트, 일렉트릭 아트, 행위예술 등 미술영역의 확장을 시도했다. 그런 면에서는 그는 한국미술의 축복이자 자랑거리다.

그는 당시 드물게도 미술에 몸과 시간성을 도입했다. 요즘 몸 철학이 화두지만 그에게 몸이란 또 다른 세계와 만나는 시간이고 예술을 실행하는 과정이다.

그중 공공시스템을 활용해 지문이 찍힌 종이를 봉투에 넣어 발송한 '매스미디어의 유물'이란 '메일아트'는 관객 참여 방식이다. 편지를 오브제로 삼아 그 용도를 뒤집은 개념미술이기도 하다. 그가 이런 작품을 만든 이유는 활자미디어를 곧 없어질 유물로 봤기 때문이다. 이런 개념은 "종이의 시대는 죽었다"라고 말한 백남준의 생각과 똑같아 놀랍다.

피카소보단 뒤샹의 후손으로 당시미술 해체

김구림 I '삽(Shovel)' 설치미술 89×26cm 1974. 뒤샹의 영향이 보이는 작품
 김구림 I '삽(Shovel)' 설치미술 89×26cm 1974. 뒤샹의 영향이 보이는 작품
ⓒ 서울시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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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서양미술은 '피카소'계열과 '뒤샹'계열로 나뉜다. 60~70년대 한국미술은 95% 이상이 피카소계열이었고 뒤샹계열은 없었다. 그는 그런 부족한 구석을 채워주었다. 뒤샹의 오브제아트를 처음 열어준 사람이 바로 김구림이다. 지금 세계미술의 대세는 피카소보단 뒤샹이다. 김구림은 그런 면에서 또한 선구자다.

윤난지 미술평론가는 70년대 장욱진, 천경자, 박서보를 비교해 볼 때 "김구림은 너무나 달랐다"고 말한다. 그를 해체주의자로 본다. 윤 평론가는 김 작가가 회화, 조각 중심의 미술에서 가시성을 거부하고 시간을 도입하고 시각화를 해체시켰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렇게 한국미술전반에서 '해쳐 모여'를 시도해 광인처럼 보였다.

그는 마치 60~70대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처럼 답은 없는 물음을 계속 던지면서 관객이 스스로 결론을 내리도록 유도하는 방식을 취한다. 텍스트와 함께 콘텍스트 즉 상황, 시대성도 중시한다. 틀에 박힌 사고를 쉼 없이 깬다. 그리기보다는 지우기, 코스모스보다는 카오스 속에서 오히려 시공간을 초월한 창조의 본질을 찾았다.

결론적으로 윤난지 교수는 그의 예술을 '데리다'가 말한 "질식할 것 같은 세계의 바깥으로의 탈출(une sortie hors du monde)"로 봤다. 기존예술의 파괴 없이 새로운 예술의 탄생은 없다는 원리다. 지구에서 우주를 보는 게 아니라 그 반대로 보는 대전환을 시도한다. 백남준은 이런 점을 위성아트를 통해 구현했는데 김구림도 똑같다.

1970년 한국문화의 독립선언을 한 '제4집단'

70년 '제4집단'이 명동에서 벌린 거리퍼포먼스. 기성문화의 장례식을 거행하려다 교통방해죄로 긴급 체포되는 해프닝이 일어났다. 당시 관련 기사가 주로 가십을 다루는 매체에 실리기도 했다. 현재는 이 사진의 출처가 불분명하다. 제4집단의 기획이 세련되지는 못했지만 그 '시대정신'만은 녹슬지 않았다
 70년 '제4집단'이 명동에서 벌린 거리퍼포먼스. 기성문화의 장례식을 거행하려다 교통방해죄로 긴급 체포되는 해프닝이 일어났다. 당시 관련 기사가 주로 가십을 다루는 매체에 실리기도 했다. 현재는 이 사진의 출처가 불분명하다. 제4집단의 기획이 세련되지는 못했지만 그 '시대정신'만은 녹슬지 않았다
ⓒ 서울시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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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예술가의 면모가 농후한 김구림이 1970년 '제4집단'의 대표가 된 건 당연이다. 이 단체는 그해 6월 20일 서울 을지로 소림다방에서 결성됐다. 소울과 사이키, 새소리, 파도소리, 브람스곡이 울리 펴지는 가운데 선언서를 채택한다.

1970년 한국이 근대화로 넘어가는 과도기 내지 분수령이었다. 그해는 김지하의 필화사건, 전태일의 분신, 장발과 미니스커트 단속, 김민기의 아침이슬 발표, 경부고속도로 개통 등 굵직굵직한 사건이 많았고 산업사회로 전환하는 시대였다.

한국문화의 해방을 알리기 위해서 '기성문화의 장례'라는 구호를 내걸고 김구림을 비롯하여 정찬승, 정강자, 강국진, 손일광 등이 그해 8월 15일 광복절 25주년을 맞아 "우리는 인간을 본연으로 해방한다" 등의 강령을 발표하며 사직공원에 모였다.

이 단체는 그해 5월 15일에 동숭동 옛 서울대 앞에서 쥐약으로 오인될 수 있는 그러나 무해한 카바마인 가루와 찢어진 콘돔과 아무렇게나 숫자를 쓴 흰 봉투를 나눠주며 거리해프닝을 벌린다. 대중뿐 아니라 군사정부와도 부딪히며 시대를 꼬집었다.

이 '제4집단'은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를 넘어 제4부 문화부 같은 것으로, 김구림에 의하면 이 행사는 원래 사직공원을 출발하여 광화문과 남대문과 용산을 지나 제1한강교 밑 백사장으로 가는 것이었고 거기서 관을 땅에 묻는 이 문화시위였는데 거리행진에서 행위자들이 연행돼 중도에 불발로 그치고 만다.

그런 과정에서 김구림 작가의 부친까지 체포되는 사건이 터지고 당국의 집요한 방해로 결국 이 모임이 성사된 지 두 달도 채 못돼 해체할 수밖에 없었다. 김구림은 만약 이 단체가 유지되었다면 한국사회는 완전히 달라졌을 거라고 말한다.

70년 전후 사라지거나 출품 거부당한 작품들

김구림 I '공간구조 69(Space construction 69)' 공기 물 오일 비닐 그리고 전기(air water oil vinyl and electricity) 442×146×85cm 1969. 한국 최초의 일렉트릭 아트다
 김구림 I '공간구조 69(Space construction 69)' 공기 물 오일 비닐 그리고 전기(air water oil vinyl and electricity) 442×146×85cm 1969. 한국 최초의 일렉트릭 아트다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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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전시되는 작품을 몇 점 감상해보자. 1968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한국작가 11인전'에서 선보인 '공간구조 69' 우리나라에서는 빛으로 만든 최초의 일렉트릭작품으로 해외에서 분실되고 만다. 이번에 처음 그린 드로잉으로 다시 복원됐다.

이 작품은 탄피모양의 플라스틱을 겹겹이 붙이고 거기에 구멍을 내고 그 뒤로 형광등을 달았다. 그 틈새로 기하학적인 문양으로 빛과 광채가 나온다. 옵아트처럼 규칙적 리듬이 반복되는 효과도 난다. 당시 이런 재료는 방직공장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미싱 부속품이었단다. 그 밑으로는 물과 기름도 흐른다.

김구림 I '현상에서 흔적으로(From Phenomenon to Traces)' 얼음과 빨간 보자기(ice and red cloth) 1970-2013. 이 작품은 공간 속 시간을 표현한 것으로 매일 그 모양이 달라져 나중에 빨간 보자기만 남게 된다
 김구림 I '현상에서 흔적으로(From Phenomenon to Traces)' 얼음과 빨간 보자기(ice and red cloth) 1970-2013. 이 작품은 공간 속 시간을 표현한 것으로 매일 그 모양이 달라져 나중에 빨간 보자기만 남게 된다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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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현상에서 흔적으로_얼음과 붉은 천'은 커다란 얼음덩어리를 빨간 보자기에 싸놓고 얼음이 녹아내리는 과정을 보여줘 공간 속 시간성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작품도 당시 다른 작품이 얼음물에 상할 걸 우려해 출품을 거부당했단다.

또 자연을 하나의 거대한 캔버스로 생각한 작품인 '현상에서 흔적으로_김구림의 불과 잔디에 의한 이벤트'는 대지미술로 예술의 물질성에서 이탈시키고, 예술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 획기적 것으로 미술사적 가치가 높다.

무엇보다 이번에 관심을 끄는 건 김구림이 만든 한국최초의 실험영화 '24분의 1초의 의미'다. 이 작품은 영화의 24프레임을 차용해 근대화 속 통제가 심해지고 속도감에 쫓겨 소외감과 권태를 맛보는 현대인의 초상화를 그린 것이다. 작품발표 때 필름이 끊기자 미리 준비한 300장 슬라이드를 활용해 '정강자'와 함께 퍼포먼스를 했다.

김구림 I '무제' 퍼포먼스 1969년(7월 21일). 흰 타이스를 입고 선보인 이 퍼포먼스 [더 자세한 내용은 아래 인터뷰참조]
 김구림 I '무제' 퍼포먼스 1969년(7월 21일). 흰 타이스를 입고 선보인 이 퍼포먼스 [더 자세한 내용은 아래 인터뷰참조]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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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미국에서 20년 그리고 귀국, 그의 때가 오다

1970년대 한국에서 인정을 받지 못한 김구림은 1973년 일본으로 건너간다. 당시 일본에선 '구타이(행위예술계열)' 등이 발달했었는데, 김구림의 작품은 일본서 재평가 받는다. 일본 <미술수첩>에도 그의 기사가 실리자 국내미술계도 김구림을 달리 봤다. 1974년부터는 일본의 선진판화를 배웠고 2007년엔 유려한 문체로 쓴 <판화_컬렉션>도 내놓았다.

일본에서 귀국한 후, 인맥과 학맥이 없는 그에게 특별한 일은 없었지만 작품이 조금씩 팔려나가자 "이건 내가 매너리즘에 빠진 증거"라며 1984년 미국으로 떠났다. 뉴욕에서 나우만과도 활동했고 다시 LA로 가 1992년엔 백남준과 '2인전'도 열었다.

작가생활 반세기가 넘었는데 그는 아직까지 크게 주목을 받지는 못한다. 그러나 지금 관객의 눈이 변하고 있다. '루이즈 부르주아'처럼 말년에 그의 시대가 오고 있다. 이번 전은 요즘 젊은이들이 봐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실험적이고 전위적이다. 한국미술사의 숨은 별인 그가 이제는 국립현대미술관 등에서 회고전을 열 때가 되었다.

"내 죽기 전 후배들 위해 작품을 한판 펼치고 싶다"
[인터뷰] 김구림 작가

2013년 7월 15일 서울시림미술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질문에 답하는 김구림 작가
 2013년 7월 15일 서울시림미술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질문에 답하는 김구림 작가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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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년에 결성된 '제4집단' 광복절 행사와 그 당시 상황이 어땠는지요?
"미술뿐 아니라 연극, 음악 등을 통합한 제4집단이 1969년에 생겼고 그 운동이 차츰 읍면 단위 확장되자 당국에서 경계를 해 당시 집회를 감시당했어요. 1970년 광복절에 사직공원에서 전국창립대회 열고 내가 대표연설을 했죠. 그날 기성문화에서 벗어나기 위해 상징적으로 장례식을 치르고 그 관을 한강에 띄우려고 했어요. 새로운 문화예술을 출발하는 상징으로 백기 들고 시청 앞까지 갔는데, 경찰이 덕수궁 앞 파출소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나에게 교통방해죄를 물어 남대문 경찰서로 끌고 가 심문했지요.

그런데 거기 갇혀있는 동안 신문이 안 팔리니까 뜻밖에 언론사 국장들이 경찰서장에게 전화를 걸어 빨래 내놓아라 야단이었어요. 경찰서장도 당시 언론은 무서워한 편이라 잘못하면 자신도 곤란에 빠질 것 같으니까 재판정에 넘겼어요. 재판부도 (날)감옥으로 보내면 큰일 날 것 같으니 속결로 판결을 내려 바로 풀려났어요. 그 이후도 아버님이 경찰서에 끌려가고 나도 6개월간 미행당해 결국 '제4집단'은 해체선언을 안 할 수 없었어요. 만약에 이 미술운동이 이어졌다면 한국은 완전히 달라졌을 겁니다."

- '24분의 1초의 의미'와 그 제작과정을 좀 설명해주세요?
"처음부터 '24분의 1초의 의미'를 만든 게 아니고 그냥 8mm로 만든 누드영화('문명 여자 돈')로 착안했어요. 요즘 별것 아니나 당시엔 일반인들은 여자가 옷을 벗는 걸 굉장한 거로 생각했고요. 너무 할 일 없는 실업시대이고 궁핍한 시대라 할 일 없이 잠을 자다 책을 본다거나 톱에 메니큐어 칠하거나 하는 무미건조한 일과를 보내는 19살 처녀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켰어요. 일종의 일인극 영화였어요.

그런데 촬영 중 이 처녀가 달아나 미완성으로 끝났어요. 필름은 없어지고 어느 날 정리하다보니 쪼가리가 남아 그게 증거가 되어서 작품을 다시 구상했죠. 이번에 8mm 필름이 아니라 작품다운 작품으로 하기 위해 16mm 필름으로 바꿨어요. 그게 바로 '24분의 1초의 의미'죠. 이 영화도 중간에 촬영기술자가 영화 같지 않은 이런 걸 왜 만들지 투덜거리더니 그만 뒀어요. 그래서 나머진 내가 다 촬영했지요.

촬영이 끝나고 충무로에 갔더니 편집을 안 해줘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지금 영화계에서는 난리 났다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당신을 벼르고 있으니 조심하라고 자신들이 편집을 해 줬다고 소문나면 다 망한다고 그러면서 귀띔해 주길 편집기를 빌려줄 테니 직접 해 보라고 해서 그 자리에서 바로 기술자들에게 배워서 혼자 밤새워가며 편집을 했지요.

난 당시 명동 무영섬유회사 기획실장으로 근무해 남산에 작은 호텔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저녁에 충무로로 산책을 나왔는데 그때 청년들에 떼로 몰려와 날 군화발로 차고 몰매를 주는 바람에 심하게 얻어맞아 일주일간 앓아누운 적이 있어요. 나중 알아보니 영화계 사람인데 내가 한국영화를 방해하는 자이기에 저지하려고 그랬다는 거예요.

이런 우여곡절 끝에 이 영화가 발표됐어요. 미리 영사기를 돌려보니까 필름이 자꾸 끊어져 상태가 안 좋았지만 지금 안하면 사장될까싶어 발표를 결심했지요. 그날이 하필 미국의 암스트롱이 달나라 가는 날이었고요. 지금 조선일보 코리아나호텔 자리인 '아카데미 뮤직홀'을 빌려 발표했죠. 그런데 중간에 혹시 필름이 끊기면 큰 망신이다 싶어 슬라이드 300장을 따로 준비했어요. 아니다 다를까 영화를 돌리는데 사고가 생겨 슬라이드를 대신 비추고 같이 온 동료 정광자와 남자가 없어 내가 직접 흰 타이즈를 입고 퍼포먼스를 했죠. 그게 '무제'예요. 이 영화와 퍼포먼스가 같은 날 이뤄져 사람들이 혼돈하죠"

- 선생님 작품에 에로틱한 여성이미지 작품이 많이 나오는데요.
"요즘 강남에 성형외과간판이 즐비하고 거리에 마네킹 공장에서 찍어낸 것 같은 개성이 없어요. 백화점에서 파는 것 중 거의 모두가 여성용이고 여성 잡지뿐이잖아요. 그렇고 예쁜 여자가 많지만 성형 부작용으로 고생하고 그런 것에만 과도한 관심을 보이고 공장에서 빼내듯 그저 기계적으로 매끈한 몸매를 가진 여성을 빼내는 것 같아 난 그런 시대조류가 싫어서 그걸 풍자한 거예요."

김구림 작가의 작업실. 앤디 워홀말대도 그의 작업실은 팩토리 같다
 김구림 작가의 작업실. 앤디 워홀말대도 그의 작업실은 팩토리 같다
ⓒ 서울시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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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독학을 하게 되었나요?
"나는 뭐든지 혼자 하는 것을 좋아했어요. 지금도 조수가 없어요. 미대에 들어가 첫해 학교에서 유망주로 상도 많이 탔지만 내 질문에 대답도 제대로 해주는 교수가 없는 걸 보고 난 혼자 공부하기로 했어요. 학교를 그만 두고 나니 막막해 헌책방에 미군부대에서 나온 <라이프>지, <타임>지를 보고 현대미술의 흐름을 읽어내고 국내 식으로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감탄했죠. 거기서 현대음악가 존 케이지와 슈톡하우젠, 현대무용가 커닝햄도 알게 되고 작가는 인기와 금전에서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 대중의 외면에도 열정적 작품을 할 수 있는 힘은 어디서 왔나요?
"나는 어려서 유복한 집안의 외동아들이었고 작가기질이 있어 그런지 군대생활이 무척 힘들었어요. 군악대에 차출돼 본 적이 없는 악기를 배워야 했어요. 군대시절이니 조금만 연습해도 배가 고프고 잠도 못자고 입술이 날마다 터지고 못하면 엉덩이에 피가 맺히도록 맞고 그런데 어느 날 선임하사가 날보고 명령을 해 연주를 했는데 발길질 대신 "연주는 이렇게 하는 거야"라며 칭찬을 해줘 한숨 돌렸죠.

군대에 적응 못하고 어렵사리 휴가를 내면 귀대명령을 어기고 휴가증 없이 귀대하는 일 다반사였어요. 그러다 결국 내가 군병원으로 이송되고 거기서 근무하게 됐어요. 먹지도 못하고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해 동료들이 죽어나갔어요. 어느 날 금방 죽은 내 동료의 어머니가 면회를 와 황당했지요. 내가 대신 나가 휴가 갔으니 집에 있을 거라고 거짓말 했죠. 하여간 집에서 힘을 써 어렵사리 병원에서 제대했어요. 그런 죽음의 고비를 넘겼기에 평생 누구보다 더 열정적인 작업을 하는 것 같아요. 그때 나온 작품이 '태양의 죽음'과 '묘비명'인데 당시가 너무 참담한 현실을 경험해 블랙만 썼어요."

- 선생님 작품에 시간성과 관련된 작품이 많으시죠?
"설치미술 쪽에서 그런 게 많죠. 현상에 대한 문제나 잔디 태우기, 물과 얼음의 도입을 바로 시간성을 말하는 것이죠. 그런데 화랑에선 나보고 뭐라고 하냐면 연결성이나 정체성이 없다고 나처럼 일관성 있는 작가도 없는데 말입니다. 나는 노장이 되어서도 똑같은 작품만 하는 사람은 매너리즘에 빠졌다고 봐요. 공장에서 생산하듯 빼내는 상품과 뭐가 다릅니까. 그런데 일반인은 그들을 대단한 작가로 보죠."

- 1984년 왜 미국으로 떠났는지요?
"내 작품도 한때 팔린 적이 있었는데 '나도 끝났구나, 매너리즘에 빠지고 있구나'라고 생각했어요. 돈은 벌수 있어도 매너리즘을 나의 최대의 적이라고 봤기에 미국으로 도피하다시피 떠났죠."

- 지금 가장 하고 싶은 작업은 뭔가요?
"내가 내 작업을 후배들을 위해서 내가 죽기 전에 한판 펼쳐 보이고 싶어요. 미 발표물이 너무 많아요. 아무리 큰 전시장도 전관을 다 채울 수 있어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나 과천에서 해 보고 싶은 게 소원입니다. 봐야 좋아할 수도 있는데 제대로 보여준 전시가 없잖아요."

[약력 및 수상] 1971년 제7회 파리비엔날레(파리시립미술관, 프랑스) 1973년 제12회 상파울로비엔날레(상파울로, 브라질) 1974년 일본국제판화비엔날레(도쿄 국립현대미술관) 1976년 제7회 칸국제회화제(칸) 1978년 제4회 인도트리엔날레(뉴델리) 1981년 제16회 상파울로비엔날레(상파울로 브라질) 1984년 제8회 영국국제판화비엔날레(런던 영국) 1988년 국제소형판화비엔날레(프랑스) 1990년 침묵의 대화 서구일본의 정물화전(시즈오카 현립미술관, 일본) 1992년 시카고아트페어(시카고 미국) 1992년 김구림, 백남준 2인전(챨리위쳐갤러리, 미국) 1995년 협업전(LA 블랙갤러리, 미국) 1999년 한국현대미술전(캔사스 미국) 2003년 드로잉의 새로운 지평(덕수궁미술관) 2005년 서울미술대전(서울시립미술관) 2007년 한국의 행위미술(1967-2007, 국립현대미술관) [수상] 2006 제7회 이인성미술상

[소장처] 베켄카운티미술관(뉴저지, 미국), 프랑크푸르트 시민회관(독일), 이스라엘미술관(예루살렘), 홋카이도근대미술관(일본), 국립현대미술관, 호암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등 다수 미술관에 소장


덧붙이는 글 | [김구림 초대전_잘 알지도 못하면서] 전시안내: 홈페이지 입장 무료
http://sema.seoul.go.kr/kor/exhibition/exhibitionView.jsp?seq=298



태그:#김구림, #실험예술, #제4집단, #24분의 1초의 의미, #바디페인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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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중 현대미술을 대중과 다양하게 접촉시키려는 매치메이커. 현대미술과 관련된 전시나 뉴스 취재. 최근에는 백남준 작품세계를 주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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