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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존가치가 있는 자연이나 역사 건축물과 환경을 기부금, 기증, 유언 등으로 취득하여 이것을 보전, 유지, 관리, 공개함으로써 차세대에게 물려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NGO단체인 한국내셔널트러스트(http://www.nationaltrust.or.kr) 회원 20여명과 지난 27일 오후 2시 망우리공원에서 진행된 '서늘한 감동을 따라 거니는 근현대 산책'행사에 참가했다.

망우리공원
▲ 망우리공원 안내도 망우리공원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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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행사 안내는 망우리공원의 묘비명으로 읽는 근현대 인물자료인 <그와 나 사이를 걷다>(도서출판 골든에이지)를 집필한 수필가이며 번역가인 김영식 선생이 수고해 주셨다.

<그와 나 사이를 걷다> 김영식 저작
▲ 망우리공원 <그와 나 사이를 걷다> 김영식 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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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목동 쪽에서 오후 2시를 넘기고 출발했다. 해가 중천에 있는 때라 약간 더운 느낌도 들었지만, 숲이 좋은 공원이라 묘지들 사이를 거닐면서 이내 시원함이 감도는 즐거운 여행이었다. 인물에 대한 공부는 물론 사회·역사·문화적인 고민도 함께하는 자리가 된 것 같다.

먼저 정말 가파른 길을 올라 당도한 곳은 27살에 요절한 가수 차중락(車重樂)의 묘다. 조용필 보다 먼저인 1960년대 후반 '오빠부대'의 원조였던 그는 사후 40년이 다 되어 숨겨진 미국인 여대생 애인 알린의 편지와 사진이 공개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는 1968년 공연 도중 쓰러져 뇌막염으로 요절하였다. 그의 부친은 큰 인쇄소를 경영하여 집안이 매우 부유하였고, 시인 김수영이 그의 큰이모 아들이었으니 이종사촌간이었다.

경복중·고 재학 중 육상선수로 활약하였고 한양대 연극영화과 재학 시절에는 보디빌딩을 하여 1961년 미스터코리아 2위에 입상하기도 했다. 그림도 매우 잘 그렸던 영화감독 지망생었던 그는 우연한 기회에 지인의 권유로 가수가 되기 위해 일본 밀항을 결행하기도 했다.

이후 사촌형 차도균(키보이스 멤버 중 한 명)의 도움으로 1963년 키 보이스에 합류하여 가수로 활동했다. 미8군 무대에 오른 첫날부터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공연 시 자주 검은 고무장화를 신고 나갔는데 이 모습까지 비슷하다하여 '한국의 엘비스'라 불렸다.

망우리공원 안내도
▲ 망우리공원 망우리공원 안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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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중락의 산소
▲ 망우리공원 차중락의 산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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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길에 오르다
▲ 망우리공원 답사길에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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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11월 10일, 엘비스 프레슬리의 'Anything that's part of you'를 번안 및 편곡한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이 크게 히트했다. 그의 묘비의 글 <낙엽의 뜻>은 조병화 시인이 짓고, 그의 맏형 차중경이 썼다.

묘비의 아랫부분에는 당시의 유명 배우들과 가수들의 이름이 나와 있으며, 그 다음 해부터 가수 차중락을 기리는 낙엽상이 제정되어 그 해 가장 뛰어난 신인들에게 이 상이 주어졌다. 낙엽상은 나훈아와 김세환 등이 수상했다.

<그와 나 사이를 걷다> 저자 . 김영식 선생
▲ 망우리공원 <그와 나 사이를 걷다> 저자 . 김영식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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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운 여름이라 운치는 별로 없었지만, 낙엽 떨어지는 가을밤에 노래를 들으면서 참배를 한번 오는 것도 좋을 것 같은 곳이다. 이어 길을 조금 더 올라 이병홍(李炳洪) 선생의 묘소다.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이며 국회의원을 지낸 이병홍은 경남 산청 출신으로 제2, 3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이병홍 의원 묘소
▲ 망우리공원 이병홍 의원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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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 국회의원 임기 중 사망했으며 해방정국에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제1조사부 위원장으로 이승만과 대립했던 인물이다. 이병홍의 산소에는 해공 신익희(申翼熙) 선생이 쓰신 묘비 글을 보기 위해서 방문했다.

해공은 정치가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로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부의장,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국회의장을 지냈으며 1956년 민주당 후보로 대통령에 입후보, 자유당의 이승만에 맞서 호남지방으로 유세 가던 중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급사했다.

해공 선생이 쓰신 글씨. 힘이 좋다
▲ 망우리공원 해공 선생이 쓰신 글씨. 힘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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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공 선생의 글은 워낙 달필에 힘이 좋았던 관계로 당시 많은 정관계인사들의 묘비 글을 써 주었다고 하는데 정말 기운이 넘치는 글이 보기에 좋았다. 이어 <동아일보> 창간 3인방 가운데 하나였던 장덕수(張德秀)의 묘소가 있는 안내석을 발견한다. 아쉽게도 말년에 친일을 하기는 했지만 동아일보 초대 주필을 지낸 설산 장덕수를 기리는 비문이다. 

설산은 1920년 동아일보초대 주필이 되었고, 1923년 미국으로 건너가 3·1신보를 발간했다. 193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재무위원을 맡았다. 이후 귀국해 보성전문 교수를 거쳐, 1936년 동아일보사 부사장이 되었다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 선수 사진에서 일장기를 삭제하는 사건으로 사임하였다.

설산 장덕수
▲ 망우리공원 설산 장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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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에는 친일단체인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경성분회 제4분회장, 1940년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1941년에는 조선임전보국단 준비위원, 1945년 7월에는 국민의용대 경성부 연합 간부 등으로 활동하면서 친일 활동을 하기도 했던 인물이다. 친일을 했던 인물이라 애써 묘소는 찾지 않았다.

망우리공원묘소
▲ 일인 묘소 망우리공원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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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일본인들의 가족묘를 발견하고는 잠시 둘러 본 다음 일제 강점기에 산림학자로 총독부 산림과장을 지내면서 한반도에 포플러와 아카시아를 심은 사이토 오토사쿠(齋藤音作)의 묘소를 찾았다.

사이토 오토사쿠(齋藤音作)의 묘소를 찾았다.
▲ 망우리공원 사이토 오토사쿠(齋藤音作)의 묘소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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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토는 조선 땅에서 영림창장까지 지냈다. 아직도 그의 공(功과 과(過)가 제대로 평가되지 않은 일인 관료지만 산림녹화에 기여한 공이 분명히 있고 한국을 사랑하여 무덤도 망우리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를 위해 잠시 기도했다.

다음은 조봉암(曺奉岩)선생의 묘소다. 이곳 망우리공원에서 가장 넓고 큰 묘역을 차지하고 있는 곳이다. 독립운동가 겸 정치가였던 선생은 아나키스트에서 공산주의자로 다시 진보적 민족주의자로 활동했던 큰 인물이다.

조봉암 선생의 묘지 앞 안내석
▲ 망우리공원 조봉암 선생의 묘지 앞 안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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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이승만 정부에서 제헌의원·초대 농림부장관이 되어 농지개혁과 농업협동조합운동을 전개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재선되어 국회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1952년 제2대 대통령에 출마하여 차점으로 낙선, 1956년 다시 제3대 대통령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했다.

조봉암 선생 묘소
▲ 망우리공원 조봉암 선생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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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진보당(進步黨)을 창당, 위원장이 되었다. 1958년 1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대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며칠 만에 처형되었다. 2011년 1월 20일 대법원에서 간첩죄와 국가보안법 위반 등 주요 혐의에 대해 무죄선고를 받았다.

사실 이번 답사에서 가장 기분이 좋았던 곳은 바로 조봉암 선생의 묘소를 참배한 것이다. 시대를 앞서건 어르신의 산소를 평화롭게(?) 찾아볼 수 있는 세월이 되었는지 아직은 판단이 잘 되지 않지만, 그래도 무죄선고를 받은 선생의 묘소를 자유롭게 찾을 수 있는 기쁨이 상당했다. 눈물이 난다.

이름자 이외에는 다른 글이 없는 죽산의 묘비석. 침묵의 외침이 들리는 듯 하다
▲ 망우리공원 이름자 이외에는 다른 글이 없는 죽산의 묘비석. 침묵의 외침이 들리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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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선생의 이름 이외에는 별 다른 글이 없는 비석을 보면서 그가 살아서 마음 속으로 전하고 싶었던 민중을 행한 깊은 침묵의 소리를 생각하게 하는 시간이 되었다.


태그:#망우리공원, #조봉암, #차중락, #그와 나 사리를 걷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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