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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군 안면읍 백사장 항포구 인근 해역에서 사설 해병대 캠프 훈련을 받다 실종됐던 공주사대부고 2학년 이모 군의 시신이 19일 수색대에 의해 인양되는 가운데 유족이 오열하고 있다.
▲ '사설 해병캠프' 고교생 시신 인양 충남 태안군 안면읍 백사장 항포구 인근 해역에서 사설 해병대 캠프 훈련을 받다 실종됐던 공주사대부고 2학년 이모 군의 시신이 19일 수색대에 의해 인양되는 가운데 유족이 오열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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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을 극기 훈련으로 몰아넣는 것은 한국 사회 특유의 군사문화에서 비롯한 시대착오적 발상. - 공주사대부고 해병대캠프 사고 학부모가 대통령에게 보낸 서신 중에서

기어이, 또,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아무 죄 없는 생명들이 바다에서 목숨을 잃었다. 학교에서 하는 말로는 병영체험활동, 시쳇말로 해병대캠프에서 벌어진 일이다.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바닷물에 놀란 가슴을 진정시킬 새도 없이 삶의 문턱을 넘어가버린, 공주사대부고 5명 학생들의 명복을 빈다.

지난 18일 오후 해병대캠프에 참가한 공주사대부고 학생 가운데 5명이 활동 중에 바다에 빠져 숨지는 사고가 발생한 이후 언론 보도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해병대캠프를 운영한 업체가 미등록이라거나 당시 조교들이 무자격자라거나 사고 당시 학생들이 구명조끼를 안 입었다거나 하는 것들부터 해병대캠프는 진짜 해병대와는 상관이 없는 짝퉁이라는 것 등.

쏟아지는 보도는 많으나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하는 기사는 찾아보기 어렵다. 유가족들도 해병대를 '사칭'한 캠프의 중단을 요청할 정도이니 해병대캠프를 짝퉁 대 진품으로 구분해 논점마저 흐려지는 분위기이다.

가정을 하나 해보자. 만일 해당 업체가 정식인가를 받은 업체이고 조교들이 모두 경험이 풍부하며 관련 자격증을 서너 개씩 지녔고 최신식 구명조끼를 학생들이 입었고 짝퉁이 아닌 진짜 해병대에서 한 병영체험활동캠프였다면, 해병대캠프가 아닌 일반 청소년캠프였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며 그래도 괜찮은 것일까.

학생들이 학교에서 '극기' 혹은 '리더십 함양' 등의 이름으로, 최근에는 '학교폭력' 대응의 차원으로 그와 같은 군대 혹은 군대형식의 수련장으로 떠나 군대식 훈련을 받는 것이 당연한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필요한 시점이 바로 지금이다.

학생에게 '군기'가 필요한 이상한 학교

한 병영체험캠프에서 학생들이 총기 교육을 받고 있다.
 한 병영체험캠프에서 학생들이 총기 교육을 받고 있다.
ⓒ 경기도교육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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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진 학생들의 유가족들이 "해병대를 사칭한 모든 캠프의 중단"을 요청했고 이에 교육부가 "해병대를 사칭한 유사 캠프에 학생들이 더 이상 참여하지 않도록 22일 시도교육청 교육국장 회의를 통해 긴급 지시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이제 해병대를 '사칭'한 캠프에 학생들이 체험학습을 가지 않으면 모든 문제는 해결되는 걸까. 아니다. 그렇다고 이제부터 '진짜' 해병대캠프에 모든 학생을 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여전히 본질적인 문제는 남는다. 짝퉁 해병대 때문에 진짜 해병대가 수혜를 입는 게 문제의 해결이 될 수는 없다. 짝퉁 해병대 캠프뿐만 아니라 진짜 해병대에서 하는 캠프도 마땅히 중단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더불어 군대식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청소년 수련단체들도 모두 해당 프로그램 운영을 중단하거나 군대식이 아닌 학생들의 자율과 인권을 존중하고 주체적 참여와 활동을 보장하는 내용으로 프로그램을 바꾸어야 한다.

군대를 사칭하거나 군대식 프로그램을 이용해 초중고생들을 대상으로 이익을 챙기고 이미지를 제고하는 집단이 무수히 많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국격은 볼품없고 초라하기 짝이 없으니 정부 당국도 더욱 과감하게 나서야 한다. 해병대 캠프뿐만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병영체험이나 군부대 체험활동은 이명박 정부 이후 부쩍 늘었고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 '학교=군대'라는 등식이 성립한 지는 오래되었다. 오히려 학교가 군대보다 못하다는 말도 공공연하다. 아무리 그렇다한들 군인도 아닌 학생들이 군대식 훈련 체험을 해야 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어쩌다 초중고생들이 스스로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것도 제대로 배우기 전에 '이기는(克己)' 기술부터 배우려 병영체험을 하는 게 당연한 교육과정처럼 돼버린 것일까.

선행학습이 온 나라에 창궐해 전염병처럼 번졌다지만 군대(문화)까지 선행학습을 해야 한다는 건 비극을 넘어 참극이다. '극기', '리더십과 공동체의식 함양', '학교폭력 예방', '도전정신 계발' 등이 '불굴의 해병대 정신'이 아니면 안 된다는 말인가. 그런 걸 기필코 함양·계발해야 하는가도 의문이지만 만일 그렇다면 온 국민이 자원입대해 군인이 돼야 하겠다. 온 국민이 군인정신으로 똘똘 뭉친 세계 최초의 군인국가, 이걸 바란다면 말이다.

전국의 초중고교에서 학생들을 해병대캠프라는 이름의 병영체험활동에 사실상 강제로 보내는 이유는 간단하다. 학생들의 '군기'가 빠졌다고 보기 때문. 군인이 아닌 학생들에게 처음부터 빠질 '군기'라는 게 없는데도, 그렇게 생각하는 학교들은 매우 많다. 병영체험활동이라는 말보다는 해병대캠프나 수련회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의 군기를 잡기 위해 군대식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시설로 학교들은 수련회를 떠난다. 시기는 군기를 잡아야 하는 학기초나 학기말이 일반적이다.

얼마 전 국방부와 교과부는 교사들에게까지 수업 대신 전투체험에 참여하라는 공문을 전국 학교에 보내 교사들의 군기잡기를 시도한 바 있다. 경기도의 한 초등학교에서는 현역 군인들이 단독군장을 한 채 총기를 들고 학교에서 학생들을 모아 행사를 벌인 일도 있었다. 도처에 군대와 군기가 도사리고 있는 셈이다.

지난해(2012년) 경기도교육청이 내놓은 자료를 살펴보면 지난 한 해에만 경기도내 중고교에서 해병대캠프로 병영체험활동을 떠난 학교가 중학교 14개교에 동원한 학생 4219명, 고등학교 42개교에 13043명으로, 약 2만여 명의 중고교생들이 동원됐다. 전국적인 상황을 조사해보면 그 규모가 더욱 엄청날 것은 뻔하다.

상당수의 대한민국 초중고교생들이 매년 실제 군부대 입소나 군대 이름을 빙자한 사이비 군대 캠프에 끌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 안에서 벌어지는 별의별 일들이야 이번 같은 대형 참사가 아니면 밖으로 드러나지 않고 묻힌다. 은폐와 엄폐에 능숙하다는 것이 학교와 군대의 공통점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니 말이다.

'군대식 체험학습'의 무서운 폭력, 당장 멈추어야 한다

병영체험캠프에서 학생들이 훈련을 받는 모습
 병영체험캠프에서 학생들이 훈련을 받는 모습
ⓒ 경기도교육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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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의 한 학교에서는 2007년을 전후해서부터 지난해까지 최소 6년 이상 해병대캠프에 학생들을 참가시키고 '학교폭력예방'이나 '학교폭력 가해피해학생 해병대캠프' 등의 이름으로 병영체험캠프를 진행했다. 경기도교육청에서는 올해 초 이 학교의 모든 교원에게 승진가산점을 준다고 밝혔다. 학교폭력 예방 및 해결 등에 기여했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해병대캠프를 통해 어떻게 학교폭력을 예방하고 해결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근거자료를 내놓지 않았다.

이 학교 측이 당시 가정통신문에서 밝힌 해병대캠프의 목표는 "체력단련 및 인내심 배양"이었다. 이를 통해 학교폭력을 예방하고 심지어는 학교폭력 가해-피해학생이 함께할 수 있다는 논리다. 지금 국가적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학교폭력 문제 해결의 답이 바로 해병대캠프라는 것인가. 3박 4일짜리 병영체험캠프로 학교폭력을 예방하고 해결까지 할 수 있다면, 모든 학생들을 당장 입대시켜 군사훈련을 시킨다면 학교폭력은 학교와 함께 영원히 사라지지 않겠는가. 지나가던 소도 웃을 일이다.

아무리 시설이 훌륭하고 조교나 강사의 자질이 뛰어나다해도 학생들을 대상으로 병영체험활동을 사실상 강제, 강요하는 짓은 여기에서 멈추어야 한다. 시설 개선이나 유능한 조교와 강사를 더 확충하라는 것이 아니다. 병영체험활동, 해병대캠프, 온갖 수련회 등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군대식 체험학습'의 무서운 폭력을 당장 멈추어야 한다는 말이다. 학생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반인권적, 비교육적 행위들을 학교의 이름으로 더 이상 공공연히 자행해서는 안 된다.

해병대캠프 훈련을 받지 않아서 학생들이 '극기'를 못하고 '리더십과 공동체 의식'이 부족하며 '학교폭력'이 만연한 게 아니다. 모든 학생들이 다 그렇지도 않거니와 지금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스스로와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며 협력하는 것이다.

이는 지시와 명령, 복종과 굴종을 강요하는 폭력적인 병영체험이 아니라 인권친화적인 학교문화에서 출발해야 한다. 국가와 사회가 책임 회피와 변명에만 급급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나서서 이를 도와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극기'이고 '리더십과 공동체 의식'의 출발이다. 그렇지 않다면 시대를 역주행하는 오늘의 참사는 알람시계처럼 끝없이 반복할 수밖에 없다. 고인이 된 5명의 학생들의 영혼이 하루라도 빨리 편히 영면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태그:#해병대캠프, #병영체험학습, #병영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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