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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아내는 2008년 5월 9일 발병한 희소난치병, 데빅씨병, 좀 더 폭넓게 알려진 이름으로는 '다발성경화증'으로 목 아래가 마비되어 투병 중입니다. 평지도 드물고 대개는 내리막인 난치병의 코스. 제 아내도 예외 없이 가정도 무너진 채로 각종 합병증과 마비된 장기들을 안고 병상투병 6년째입니다. 모든 비슷한 분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투병을 응원하면서 이 글들을 올립니다. - 기자 말

"이쪽 길로 쭉 가면 어떤 아저씨가 기다릴 거야. 그 아저씨 따라가서 주는 밥 먹고 보내주는 학교 다녀!"
"…."
"우린 이제 못 볼지도 몰라, 말 잘 듣고 살아!"
"안 돼! 여보,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아이 놀라게…."

정말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이가 등교하는 학교까지 차를 타고 따라와서 아이를 붙잡고 학교도 그만두고 어디론가 가서 살라고 말하는 아내, 기가 막히고 아이가 상처 받을 게 마음이 아파 얼른 아이를 학교로 밀어 보냈다.

"엄마가 몸이 너무 아파서 생각도 말도 좀 이상하게 나오는 것뿐이다. 절대 어디로 가거나 집에 안 들어오면 안 된다, 알았지?"

충격을 받고 혼란스러워 하면서 고개를 떨구는 아이를 안아주고, 얼른 학교를 떠났다. 거의 저주에 가까운 이해 못할 스토리를 말하면서 점점 심해지던 아내의 착란증세는 정말 견디기 힘든 위험한 수준까지 도달했다. 이대로는 자칫 생명까지 위험할 수도 있겠다 싶어 그 길로 교회로 갔다.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도움을 청해야만 했다.

시작은 20일쯤 전으로 올라가서 두 번째 퇴원을 하고 집에 내려와서부터 아내는 이상한 행동과 말을 하기 시작했다. 팔을 한 시간, 어떤 때는 두 시간씩 빙빙 돌리며 이상한 소리도 냈다. 강남 S병원에서도 의학적으로 너무 이상하다고 비디오 카메라로 주치의가 몇 번을 인터뷰하면서 동영상을 촬영했다. 의학적 보고서 등에 사용하는 걸 동의해 달라는 양식에 서명도 해주었다.

앞사람 머리위 귀신을 쫓아내야 한다고...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이상한 동작이 시작되었다. 손목이 90도로 꺾어지고 심하게는 두 시간씩 진동을 했다. 누가 일부러 따라해보기도 힘든 동작으로, 강남 S병원의 재활과 인턴의사도 비디오로 찍었다. 연구자료로 쓴다고.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이상한 동작이 시작되었다. 손목이 90도로 꺾어지고 심하게는 두 시간씩 진동을 했다. 누가 일부러 따라해보기도 힘든 동작으로, 강남 S병원의 재활과 인턴의사도 비디오로 찍었다. 연구자료로 쓴다고.
ⓒ 김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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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온 후 아내는 새벽기도회를 오고 가면서 캄캄한 차도 주위로 귀신들이 떼로 몰려 있다고 두려워하고 고개를 숙이고 숨곤 했다. 교회 안에서도 앞자리 사람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리고 귀신을 쫓아내야 한다고 괴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하도 이상해 가지고 있던 휴대폰으로 여러 장면들을 동영상으로 찍어 놓았다.

그러더니 좀 더 심한 소리를 했다. 둘째아이가 도둑질, 강도질 등 온갖 못된 행동을 하고 다니다 맞아 죽어 시체를 찾아가라는 경찰의 연락이 올 거라고 날짜까지 말했다. 일을 마치고 오면 방바닥에 귀신이 잔뜩 깔려 있다고 옷도 벗어 뭉쳐놓고 책도 밀어내놓았다. 손대면 옮겨 간다고 절대 만지지 못하게 하면서….

그러더니 기어코 이 날은 아이에게 충격을 주었다. 교회에 도착한 아내는 같이 와주신 교회 목사님 내외와 집사님, 권사님들에게도 입에 담지 못할 말들을 쏟아내었다. 붙잡고 진정시키려 했으나 불가능했다. 눈으로 직접 보는, 성경에 나오던 귀신 들린 상태, 딱 그 장면이었다.

결국 여기저기 부탁해도 다스려 주거나 진정 시키지도 못하고, 집에도 도저히 있을 수 없어 어딘가로 가야만 했다. 사실은 20여 일이 넘는 내내 나는 그런 증상을 남들에게 숨기고 지냈고, 행여나 아내가 상처를 받을지도 모른다 싶어 터무니없는 온갖 부탁을 다 들어주었다. 멀쩡한 옷과 성경책을 다 갖다 태우고, 보험도 해약하라고 해서 해약해 버렸다. 차분한 이성으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이상한 행동과 말들이었지만….

결정적으로 아내는 산에서 자기를 부른다고 맨발로 집을 뛰쳐 나갔다. 깜짝 놀란 장인어른의 소리에 곧 따라가서 아내를 붙잡았다. 아내는 부들부들 떨면서 산에 있는 묘지에서 자기를 기다린다고, 내가 자기를 속이고 있고, 곧 죽일 거라는 소리가 들려온단다.

몸 아프고 가족들 생고생을 하는 것도 힘든데, 이제는 환청 환각에 사로잡힌 영적 싸움도 해야 하다니…. 잠시도 곁을 떠나 내버려둘 수 없다는 것은 거의 가정파멸과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그 20일의 지옥 같은 시달림에 지친 내 몸은 완전 뼈만 남은 해골 같아졌다.

'이걸 못 고치고 정신병원에라도 가둘 바에야 차라리 이참에 죽어버릴까…?'

교대 간병으로 '난민' 같은 생활이 시작됐다

12월 혹한에 들어간 강원도 깊은 산속 기도원, 주차장 내 차를 파묻어버리며 쌓인 70센티미터의 눈을 혼자서 오전 내내 다 치우고 충주 일터로 가야 했다. 그 고단했던 한겨울의 5개월 은둔 요양생활은 평생 우리 가족에게 난민의 추억을 남겼다.
 12월 혹한에 들어간 강원도 깊은 산속 기도원, 주차장 내 차를 파묻어버리며 쌓인 70센티미터의 눈을 혼자서 오전 내내 다 치우고 충주 일터로 가야 했다. 그 고단했던 한겨울의 5개월 은둔 요양생활은 평생 우리 가족에게 난민의 추억을 남겼다.
ⓒ 김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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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위기의 순간이 닥치고 있었다. 혼자서는 감당해낼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힘들어 벽에 기대어 넋을 잃고 있는데 친구가 달려왔다. 멀리 안산에서 충주까지 차를 몰고! 오래 가족처럼 지낸 친구는 대뜸 아내를 붙잡고 울었다.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보고 있는데도 한 시간여 가까이 눈물로 기도하고 달래고 이야기를 건넸다.

간신히 의욕을 좀 회복하는데 아내의 오빠가 왔다. 데리고 갈 곳에서 승낙해서 차로 태우고 가겠단다. 나는 회사의 일을 서둘러 정리하고 아이를 학교에서 데려다 놓고 뒤따라가기로 했다.

만일 그 두 사람이 그 시간에 때맞추어 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장담을 못하겠다. 그만큼 힘든 순간이고 지쳐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론 그것은 아직 우리 가족이 최악의 비극으로 내던져지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는, 하늘의 뜻이었다. 그러니 살 수밖에! 그 고마운 하늘의 뜻과, 몸으로 다가와서 도움을 준 두 사람의 봉사….

"고맙습니다, 고마우이, 두 분이 아니면 그대로 땅 바닥에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고 싶지 않은 순간이었는데…."

그날 이후로 병원도 가지 못하고, 집에서도 살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린 아내를 중심으로 우리 가족들은 때론 이산가족으로, 때로 교대 간병으로 난민 같은 생활을 시작했다. 그 다음 날로 아내와 나는 강원도의 한 기도원으로 갔다. 그곳밖에 갈 곳이 없었다.

곧이어 부득이 막내딸아이를 양궁을 그만두게 하고 전학을 시켰다. 도저히 더 돌볼 수도, 방치할 수도 없어서였다. 다니던 초등학교의 교감선생님이 옮길 학교로 전화를 해서 40분이 넘도록 설득하시며 반대를 했다. 선수를 그만두면 충북도교육청에까지 보고해야 한다고 만류를 했지만…, 결국 양궁을 포기했다.

덧붙이는 글 | 2008년 12월부터 2009년 1월 사이의 이야기입니다.



태그:#희귀난치병, #투병,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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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내 인생의 핸들이 내 손을 떠났다. 아내의 희귀난치병으로, 아하, 이게 가족이구나. 그저 주어지는 길을 따라간다. 그럼에도 내 꿈은 사람사는세상을 보고 싶은 것, 희망, 나눔, 정의, 뭐 그런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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