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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영화에는 한글자막이 나온다. 영화 자막 작업이 가장 활발하게 이뤄지는 곳은 어디일까? 바로 전국에서 열리는 영화제 현장이다.

부산 국제영화제·부천판타스틱영화제·서울국제여성영화제 등, 우리나라에선 한겨울을 제외하곤 1년 내내 영화제가 열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평소 쉽게 만나는 영어권 영화뿐만 아니라 다양한 국가의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점은 국제영화제의 큰 장점이다.

그런데 해외 작품을 감상할 때 관객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자막이다. 자막이 없다면 영화 속 연인들의 사랑스런 대화조차 시끄러운 소음으로 들릴 뿐이다.

'21세기 자막단'(대표 김빈)은 영화제 자막팀에서 시작해 어엿한 사회적기업으로 성장했다. 6월 28일, 서울 광진구에 자리한 21세기자막단 사무실을 찾았다. 휴가를 앞두고 마음이 들떠 있다는 김빈(37) 대표를 만났다.

정규직은 거의 없는 영화제 판

'21세기자막단' 직원들. 맨 왼쪽이 김빈 대표다. 직원 세 명은 휴가라 출근하지 않았다. 왼쪽 아래로 이들과 함께 사는 개 '재인'도 보인다. 재인은 유기견 보호소에 있다가 이들에게 왔다.
 ‘21세기자막단’ 직원들. 맨 왼쪽이 김빈 대표다. 직원 세 명은 휴가라 출근하지 않았다. 왼쪽 아래로 이들과 함께 사는 개 ‘재니’도 보인다. 재니는 유기견 보호소에 있다가 이들에게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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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제에서 영화 자막과 관련한 업무는 크게 번역팀과 자막편집팀에서 맡는다. 번역팀은 말 그대로 영화 대본을 한글로 옮기는 작업을 한다. 그런데 영화 번역은 일반 번역에 비해 신경 써야할 것이 있다. 대사가 나오는 시간과 관객이 글자를 읽는 시간을 맞춰야한다는 점이다.

자막편집팀은 대본을 적절한 길이로 미리 나눠 번역가에게 넘기는 일을 한다. 번역가는 자막편집팀이 표시해놓은 시간에 따라 글자 수를 맞춰 번역한다. 자막편집팀은 이를 최종 확인해 자막작업에 들어간다. 우리가 보통 극장에서 보는 작품은 판권 계약을 마친 것이 대부분이라 필름에 자막을 새긴다. 하지만 영화제 상영작은 자막을 새길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영화제 자막편집팀은 자막 상영을 위한 영상을 따로 만든다. 그리고 영화를 상영할 때, 상영실 한편에 마련된 또 다른 상영기에서 오직 자막만이 가득한 이 영상을 동시에 상영한다. 이 과정에서 21세기자막단 직원 7명이 번역을 제외한 모든 일을 해낸다.

김 대표가 기업을 꾸린 것은 오랜 영화제 생활에서 나온 당연한 결과였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 영화 만드는 일을 하고 싶었다. 대학에 가는 대신, 아르바이트를 하며 영화 만드는 워크숍에 참가해 친구들과 단편영화를 만들었다. 영화제 탐방도 즐겼다. 1999년엔 처음으로 서울다큐멘터리영상제에서 자원활동을 했다. 그는 여기서 기술·자막팀 소속이었다.

그를 잘 본 덕분인지, 이듬해 다른 영화제 자막팀장으로 일을 하게 된 팀장은 김 대표에게 연락했다. 스태프로 함께 일을 하자는 거였다. 자원활동가와 달리 영화제 스태프에겐 상황에 따라 숙식이 제공되고 급여도 지급된다. 그는 처음으로 자막팀 일을 하며 돈을 벌었다.

"영화제에는 정규직 일자리가 거의 없어요. 많은 사람들이 전국의 영화제를 돌며 몇 개월 단기계약직으로 일을 하죠. 팀장도, 스태프도 마찬가지에요. 우선 영화제에서 팀장을 선정하면 그 팀장은 자기 스태프를 직접 뽑아요. 팀장에게 일의 책임과 함께 작게나마 인사권이 주어지는 거죠."

후배 생기니 책임감도 생겨

이때부터 본격적인 '자막팀 인생'이 시작됐다. 경력이 쌓이자 2000년대 중반 무렵엔 그도 팀장이 됐다. 그가 스태프를 선발할 차례였다. 팀장은 선발한 스태프에게 업무에 차질이 없도록 관련 기술을 가르쳐야 한다. 자막팀의 경우, 팀원들은 거의 24시간 붙어 지낸다. 긴박하게 작업을 해야 하는 경우는 더욱 그렇다.

게다가 영화제 기간에 표를 발권하고 관객 안내를 돕는 다른 팀과 달리, 자막팀은 좁고 어두운 영사실에서 다른 이들과 접촉할 기회도 없이 그들끼리 일을 해야 한다. 팀원 사이에 친밀감이 안 생길 수가 없다. 친밀감은 그에게 책임감이라는 또 다른 감정을 불러왔다.

"후배가 생겼다는 생각에 처음엔 뿌듯했어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처음 자막팀 일을 했을 때와 비교해 근무환경이 하나도 나아지지 않았더라고요. 3월부터 10월까지 영화제가 열리고 나면, 나머지 기간은 백수나 마찬가지에요. 제가 선발해서 교육까지 시킨 이 친구들이 앞으로 계속 단기계약직으로 1년에 서너 개씩 전국 영화제를 돌 생각을 하니 미안한 마음과 함께 책임감이 생기더군요. 영화제 일이란 게 언제 사라질지 모르고, 다음 해에도 내가 고용될 거란 보장이 안 되는, 정말 불안정한 일자리거든요."

그는 뜻 맞고, 실력 있는 친구들과 함께 한다면 영화제가 열리지 않는 나머지 기간에도 뭔가 일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막연했던 생각은 조금씩 구체화됐다. 그러던 중, 누군가 '사회적기업 아카데미'가 열린다는 이야기를 그에게 전했다. 그곳에서 세 달 동안 사회적기업에 관한 공부를 했다.

2011년 가을 네 명이서 팀을 꾸리고 친구 사무실 한쪽에 첫 둥지를 틀었다. 2012년엔 고용노동부와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이 주최한 '청년 등 사회적기업가 육성사업'에 선정돼 사업비와 사무실을 지원받았다. 21세기자막단이라는 이름도 지었다. 영화제 팀에서 기업으로 변신한 최초 사례다.

현 사무실은 올해 사단법인 '씨즈'에서 지원한 것이다. 작년부터 올해 초 사이, 직원 세 명을 새로 고용해 전체 직원은 일곱 명으로 늘었다. 수입에서 인건비를 제외하면 수익은 거의 남지 않지만, 그래도 쫓기듯 일하고 싶지는 않다.

'활력상영회'로 독립영화 알리고 싶어

활력상영회
 활력상영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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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대표는 21세기자막단을 시작하며 안정적인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 이외에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영화제에서 만난 저예산영화나 단편영화, 독립영화 등을 곳곳에 알리는 것이다.

"한 해에 수백 편의 영화를 보다보니, 참 아까운 영화가 많다는 걸 알았어요. 환경영화제나 인권영화제, 여성영화제에서 상영된 작품으로 제 시야도 많이 넓어졌죠. 감독들은 영화 만드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 비용을 들이는데, 그에 비해 이런 영화를 만날 수 있는 환경은 아직 마련되지 않은 게 아쉬웠어요."

그는 '활력상영회'라는 이름으로 두 종류의 상영회를 열고 있다. 첫째·셋째 토요일마다 사무실 옥상에서 열리는 '루프탑 활력상영회'와 한 달에 한 번 주제와 어울리는 곳에 찾아가 영화를 상영하는 '찾아가는 활력상영회'가 그것이다. 김 대표는 옥상에서 상영회를 열기 위해, '돈 못 버는 일에 왜 돈을 쓰느냐'는 직원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스크린과 음향기기까지 구입했다.

"문화를 접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추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영화를 몇 번이라도 본 사람이 다음에도 관심을 갖지 않을까요? 주민들이 이 공간을 좋은 영화를 볼 수 있는 곳'이라고 떠올릴 수 있으면 좋겠어요."

1회 찾아가는 활력상영회는 작년 12월 '우발적으로' 시작했다.

"벌교에 있는 낙성초등학교가 폐교될 위기에 놓였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주민들이 신입생을 늘리기 위한 방책으로 입학생에게 장학금을 주기로 하고는, 장학금 마련을 위해 고구마 농사를 짓는다는 거예요. 힘을 보태고 싶었어요."

그는 무작정 학교로 전화했다. 상영회를 하고 싶다는 그의 말을 시작으로,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작품은 그동안 쌓아 놓은 인맥을 통해 거의 무료로 제공받았다. 온 가족이 볼 수 있는 애니메이션과 함께, 그는 유기농 이야기가 담긴 영화 상영본도 챙겼다. 학부모들에게만 따로 보여줄 생각이었다.

"아이들이 과연 영화를 좋아할지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정말 재밌게 영화를 보더군요. 그리고 학부모들도 영화를 보시고는 '유기농 농사를 짓고 싶었는데, 방법을 몰랐다. 이런 자료는 어디서 구할 수 있냐'며 관심을 보이셨어요. 뿌듯한 순간이었죠."

이후로 위안부 할머니들이 사는 광주 '나눔의 집',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를 돕는 '와락 센터' 등에서 상영회를 진행했다. 그는 앞으로 감독과 제작사에게도 수익이 돌아가도록 할 계획이다.

"상영회를 흔한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 상영회는 어떤 영화를 누구에게 상영할지 깊게 고민해야 해요. 앞으로 상영회를 관공서에서 위탁받아 진행하는 건 어떨까 싶어요. 감독들이 잘 돼야 영화제도 잘 되고, 그래야 저희도 커 나갈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주민들에게도 무조건 무료로 영화를 보게 하는 건 장기적으로 좋지 않다고 봐요. 뭔가를 관람할 때 돈을 지불하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문화도 만들어나가고 싶어요."

김 대표는 인터뷰 말미에 뜻밖의 이야기를 남겼다.

"지금은 사회적기업 육성 사업이 서울에 몰려 있어 이곳에 있지만, 언젠가는 지역으로 사무실을 옮기는 게 꿈이에요."

너도나도 서울로 향하는 마당에, 무슨 이유일까?

"우리나라에서 서울과 수도권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지역이 문화소외지역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곳에 우리가 가야죠. 그게 우리 뜻과 맞아요. 다른 생각은 없어요."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사인천에도 실렸습니다.



태그:#21세기자막단, #청년일자리, #시사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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