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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29일치 <한겨레> 1면 사진 '나는 모른다, 대통령 닉슨을 기억하라'
 지난 달 29일치 <한겨레> 1면 사진 '나는 모른다, 대통령 닉슨을 기억하라'
ⓒ 김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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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29일 치 <한겨레> 1면에 실린 사진 한 장이 SNS에서 확산됐습니다. 해당 사진은 리차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1974년 8월 8일 사임을 발표하는 모습입니다. 사진 설명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국가정보원의 대선개입 의혹은 점점 1972~73년 벌어진 미국 워터게이트 사건의 거울이 돼 간다. 리처드 닉슨 미국 37대 대통령은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단 한 번도 인정하지 않았다. 닉슨을 대통령 자리에서 끌어내린 것은 은폐와 거짓말이었다."

닉슨 "나는 모른다"... 박근혜 "나는 모른다"

이 사진이 SNS 공간에 확산된 이유는 박근혜 대통령이 같은 6월 24일 국정원 부정선거와 관련해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국정원이) 왜 그런 일을 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대선 때 국정원이 어떤 도움을 주지도, 국정원으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않았다"고 한 발언때문입니다.

"나는 모른다"는 박 대통령 이 발언은 지난 대선 기간 자신이 한 발언을 스스로 부정하는 셈이었습니다.

"국가 안위를 챙기는 정보기관마저 자신들의 선거 승리를 위해 의도적으로 정쟁의 도구로 만들려고 했다면 이는 좌시할 수 없는 국기문란 행위."(2012년 12월 14일 긴급기자회견)

"문 후보는 스스로 '인권 변호사'라고 했는데 이번 국정원 여직원 사태에서 발생한 여성 인권 침해에 대해선 한 마디 말도, 사과도 없다. 그 여직원이 (인터넷에 '문 후보 비방') 댓글을 달았는지 증거도 없는 걸로 나왔고, 집 주소를 알아내기 위해 (민주당 관계자는) 고의로 (직원) 차를 받는 등 성폭행범이나 쓰는 수법을 썼다."(2012년 12월 16일 대선 후보 TV 3차 토론)

"경찰이 (여직원의) 컴퓨터 노트북을 뒤져봐도 댓글 하나 단 흔적이 나오지 않았다. 2박 3일 동안 감금당하고 고생한 젊은 여직원, 그 여직원만 불쌍하게 됐다. 민주당은 지금도 이렇게 하는데 정권을 잡으면 도대체 어떤 세상을 만들려고 하는지 두려운 생각까지 든다."(2012년 12월 17일 경기도 수원 지동시장 유세)

'깨알 대통령'이 여섯 달 전 발언도 기억 안나나

고위공직자들이 청문회에 나와 "오래 전 일이라 기억이 안 난다"는 말을 종종합니다. 그런데 박 대통령은 불과 여섯 달 전에 목에 힘을 주면서 했던 말을 스스로 모른다고 했습니다. 책임 회피도 이런 회피가 없습니다. 박 대통령은 '수첩공주' '깨알 대통령'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지난 5월 20일 박 대통령은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하면서 유치원 방과후 영어학습에서 북극 개발에 이르기까지 국정 전반 14개 분야에 대해 지시를 했습니다.  분량이 무려 200자 원고지 59장, 글자 수로는 1만1800자였습니다. 대통령인지, 과장급 공무원인지 구별을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박 대통령은 이만큼 꼼꼼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한 말을 여섯 달도 안 돼 "모른다"고 했습니다.

물론 자신이 한 말을 모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검찰이 국정원이 선거개입을 했음을 밝혔습니다. 지난 6월 14일 검찰은 국가정보원 관련 의혹 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과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을 불구속 기소했습니다. 검찰 공소장은 이랬습니다.

"결국 피고인은 국가안보 본연의 기능에 한정한 국가정보원법의 원칙과 한계를 뛰어넘어도 된다는 그릇된 인식으로 대통령과 정부여당 정책에 반대하는 의견을 가진 사람과 단체 모두를 종북세력으로 규정, 직원들에게 사이버 공간에서 각종 정치 이슈와 선거에 관해 이들을 공격하게 함으로써 선거운동이 금지된 공무원이 그 지위를 이용해 낙선운동을 했다."

검찰도 국정원이 선거개 개입했다고 밝혔는데 "나는 모른다"고 한 것은 대통령으로서 직무유기입니다. 이는 발뺌입니다. 닉슨도 그랬습니다.

1973년 3월 20일 그는 "백악관은 이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했고, 4월 들어 워싱턴포스트를 통해 존 미첼 위원장이 워터게이트 사건 모의 과정에 참여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나는 워터게이트 사건과 관련해 사전에 아무것도 몰랐다"고 발뺌했다.(6월 29일 <한겨레> 40년 전 미국의 '워터게이트'가 2013년 '국정원게이트'에게 기사 중)

닉슨이 아마 도청에 대해 사과했다면, 국회가 그를 탄핵(닉슨은 탄핵 직전 사임)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국민은 대통령이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면 대통령에게 직접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하지만 변명과 함께 나는 모른다고 끝까지 발뺌하면 인정할 수 없습니다.

박 대통령, 문재인 의원에게 사과해야

박근혜 대통령 후보시절은 지난 해 12월 14일 긴급기자회견을 통해 "민주주의의 근간을 무너뜨린 것은 민주당과 문재인 후보"라고 문재인 후보를 맹비난했다.
 박근혜 대통령 후보시절은 지난 해 12월 14일 긴급기자회견을 통해 "민주주의의 근간을 무너뜨린 것은 민주당과 문재인 후보"라고 문재인 후보를 맹비난했다.
ⓒ 유트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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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이 "(국정원)이 선거운동이 금지된 공무원이 그 지위를 이용해 낙선운동을 했다"고 밝혔는 데도 대통령은 "죄송하다"는 말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국가정보기관이 부정선거에 개입했는데 사과 조차하지 않는 것은 대통령으로서 심각한 자격 미비입니다. 특히 개인적으로도 박 대통령은 사과해야 합니다. 경쟁자였던 문재인 후보를 향해 "공당이 젊은 여성 한 명을 집단 테러한 것은 심각한 범죄행위가 아닐 수 없다"며 "민주주의의 근간을 무너뜨린 것은 민주당과 문재인 후보"라고 맹비난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검찰 수사만으로도 박 대통령 발언은 부정됐습니다. 그럼, 문재인 의원에게 사과해 야 합니다. 그것이 예의 아닐까요. 하지만 문재인 의원에게 자신이 한 말이 잘못됐다고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국정원은 국가 안보와 국익 증진을 위해 모든 역량을 집중하는 국가 최고의 정보기관이다. 안보와 국익을 저해하는 어떠한 위협에도 대한민국이 세계일류국가로 도약할 수 있도록 일한다.'

국가정보원이 밝히는 국정원 존재 이유입니다. 직원들은 얼마나 자부심을 강할까요? 하지만 국정원이 특정 정당과 후보를 위해 일했습니다. 국정원 직원들은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울 것입니다. 부정선거 개입 의혹과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해 '정보기관이 정보 유출자'라는 비아냥까지 들었습니다. '국가 최고 정보기관'이란 딱지를 떼어버려야 합니다.

회의록 공개를 몰랐다면 직무유기... 국정원장은 야당 인사로 앉혀야

지난 6월 24일 오후 국정원이 국회 정보위 여야 의원들에게 공개하기 위해 제작한 <2007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사본의 표지.
▲ 국정원이 공개한 '2007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사본 지난 6월 24일 오후 국정원이 국회 정보위 여야 의원들에게 공개하기 위해 제작한 <2007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사본의 표지.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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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국정원장이 회의록을 공개하는 것을 대통령이 몰랐답니다. 이는 직무유기입니다. 국정원장이 대통령을 허수아비로 생각하지 않았다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총칼로 대통령을 끌어내리는 것만 반란이 아닙니다. 대통령 직속기관 수장이 대통령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국가기밀을 공개하는 것도 반란에 준하는 범죄 행위입니다. 이를 몰랐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라 부끄러운 일입니다. 대통령 자격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정말 몰랐다면, 국민에게 직접 사과해야 함과 동시에 남재준 국정원장을 파면해야 합니다. 이래야 앞으로 국정원장이 국익에 반하는 행위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알았다면, 사과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대통령직까지는 몰라도, 청와대를 완전 개편하고, 내각은 거국내각으로 구성하고, 특히 국정원장은 대통령 측근같은 인물이 아니라 야당이 지지하는 사람을 앉혀야 합니다. 국정원장을 어떻게 야당 인사로 삶을 수 있느냐고 하겠지만, 그래야 그나마 국정원의 정치개입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의'한 대통령이 되지 말아야

만약 끝까지 국민 앞에서 "나는 모른다"며 발뺌하면 국민은 저항할 수밖에 없습니다. 촛불이 점점 타오르고 있습니다. 지난주 1차 국정원 규탄 촛불집회 5000명, 6일 2차 집회 1만 명이 참여했습니다. 어쩌면 다음 주는 2만 명, 그 다음 주는 더 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들지 모릅니다. 국민들이 바라는 일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국정원인 범한 부정선거와 대화록 공개는 '정의'가 아닙니다. 대통령이 이를 알고도 "나는 모른다"며 침묵하는 것은 더더욱 정의가 아니라 불의입니다. 박 대통령은 불의한 대통령이 아니라 '정의'로운 대통령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국정원 부정선거에 대해 잘못을 인정하고, 국정원장 파면과 개혁 그리고 야당이 인정하는 인사를 하고, 그 인사들을 통해 국정을 운영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역사는 박근혜 대통령을 '불행'한 대통령이 아닌 '불의'한 대통령으로 기록할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오블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국정원 부정선거, #박근혜, #닉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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