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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모함에서 발진한 미 해군 전투기 편대가 적진을 맹렬히 공격하고 있다(1950. 10. 24.).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미 해군 전투기 편대가 적진을 맹렬히 공격하고 있다(1950. 10. 24.).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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쌕쌕이

김천에서 구미로 가는 도로 언저리에는 대부분 나무가 없는 시뻘건 민둥산이었다. 다른 지방도 이와 비슷했지만 주민들이 땔감으로 푸나무를 마구 베어간 탓이었다. 그 민둥산은 바라보기만 해도 한 여름의 더위를 더욱 증폭시켰다. 행군 중인 인민군 전사들의 수통은 금세 바닥이 났다.

그들은 쉬는 시간이면 길섶 도랑물을 담고는 그때마다 수통에 소금을 조금 넣은 뒤 흔들어 마셨다. 일사병 방지에는 소금물이 특효약이었다. 그새 신병들의 전투복은 땀이 말라 생긴 소금자국으로 하얗게 얼룩이 졌다. 마 상사는 행군 중 이따금 뒤를 돌아보며 신병들에게 큰 소리로 주의를 줬다.

"미제 쌕쌕이들이 언제 동무들에게 달겨들디 몰라. 거저(그저) 멀리서라도 쌕쌕이소리가 들리믄 행군 둥(중)이라두 별명 없이 재빨리 용수털터럼(용수철처럼) 튀어 아무데나 엎드려 숨어라우야. 기게(그게) 목숨을 구하는 상책이디."

"데(저) 미제 쌕쌕이만 아니면 우리 조선인민군이 발쎄(벌써) 대구까지는 밀구 내려가서야."

"쌕쌕이 폭탄 맞으면 거(그) 자리서 떼죽음을 당해. 기러니께(그러니까) 동무들 행군간 서너 걸음씩 떨어디라(떨어지라)."

"우리 동무들이 요곳으로 내려오는 중에 미제 쌕쌕이를 만나 도락구(트럭)채루 떼죽음을 당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디(아니었지). 내 말 멩심하라야."

사람도 전차도 망가져버린 국도변
 사람도 전차도 망가져버린 국도변
ⓒ 한 재미동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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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인민군 탱크

마 상사의 말에 신병들은 잔뜩 긴장을 하고 이따금 하늘을 쳐다보며 발걸음을 떼었다. 도로 곁에는 폭격을 맞아 부서진 인민군 트럭이나 T-34 탱크도 더러 있었다. 경부선 김천 역 아래 대신 역을 지나 아포 역에 이를 즈음 한 차례 미군 전투기들이 지나갔다.

미군 전투기를 본 신병들은 혼비백산하여 들로 산으로 튀었다. 아마도 조종사가 미처 행군 대열을 보지 못한 듯 그냥 지나쳐 갔다. 폭격기가 길다란 비행운을 남기며 사라지자 신병들이 다시 행군대열을 가다듬었다.

"동무들이 위장을 철저히 한 결과야. 요기 남조선 인민들은 데 쌕쌕이가 리승만 처가 나라인 호주에서 보내준 거라고 하더만. 기런데 사실은 거게(그게) 아냐. 내레 알아보니까 리승만 역도의 처가는 호주가 아니라 구라파 오지리란 나라이고, 데 쌕쌕이들은 죄 미국 놈 것이디."

마 상사는 하늘에 남은 하얀 전투기 비행운을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김천에서 구미까지는 20킬로미터 남짓 했지만, 도중에 틈틈이 쉬고 전투기를 피하느라 그날 밤 늦게야 구미초등(국민)학교에 도착했다. 그 무렵 구미초등학교는 인민군 제3사단 임시보충대로 쓰이고 있었다.

김천도 그랬지만 그새 구미 시가지도 반 이상이 부서져 있었다. 구미초등학교는 이미 여러 차례 폭격을 맞은 듯 대부분 교실들이 불타버렸다. 사단 임시보충대는 교실을 피해 운동장 한편에 있는 큰 미루나무 아래에다 천막을 치고 있었다. 천막 위는 푸나무로 잔뜩 위장을 하고 있었다.

미 전투기 폭격에 부서진 교량과 인민군 전차(1950. 10. 7.).
 미 전투기 폭격에 부서진 교량과 인민군 전차(1950. 10. 7.).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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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철 상사

이튿날은 8월 3일로 아침식사가 끝나자 신병들은 각자 배치된 전방 전투부대로 떠났다. 신병들은 마 상사의 인솔로 인민군 3사단 전선부대로 곧장 떠났고, 다만 위생병 김준기 전사와 남포중학교에서 입대한 손만호 전사만 남았다. 이들도 곧 야전병원 소속 장남철 상사에게 인계되었다. 아침나절인데도 불볕 더위였다.

"동무들, 먼 길 오누라 고생 많아시오(많았어요). 요긴 날씨가 갠 날은 미제 쌕쌕이들이 시도 때도 없이 날아오니까 걸어가는 게 더 안전하디. 동무들 개인 배낭은 오늘 저녁 도락구로 보내줄 거야. 기러니까 배낭은 요기다 두고 단독 군장으로 나를 따르라우."

장 상사는 뙤약볕 속에 신병들을 도보로 인솔하는 게 미안한 듯 친절하게 그 까닭을 말했다. 두 전사는 소총만 메고 장 상사를 따라나섰다. 그들이 곧 구미시가지를 벗어나자 미루나무 가로수가 곧게 뻗은 도로가 나왔다. 도로 중간 중간에는 '대구 42Km' '대구 41Km'라는 이정표가 나왔다. 아마도 대구로 가는 국도인 모양이었다. 도로 곁 가로수 미루나무에 붙은 매미들이 발악을 하듯 울어댔다.

"이놈들은 여름 한철 울려구 십년 동안 땅속에서 산다디."
"기래요(그래요)? 몰랐습네다. 미리 알았다면 어린 시절 매미들을 기렇게(그렇게) 많이 잡디 않았을 건데…."

손만호 전사가 장 상사의 말에 대꾸했다.

"사실 이 세상에 귀티(귀하지) 않는 생명은 없디. 긴데(근데) 자본주의 아새끼들은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을 재화로 보는 거야. 기래 모든 걸 돈으로 환산하구 돈이 된다믄 벨딧(별짓) 다하디. 기래서 남아나는 게 없디."
"아. 거게(그게) 기러쿠만요."

줄곧 손만호 전사가 대꾸했다.

"긴데, 김준기 동무는 벙어리인가?"
"아니야요. 다 듣고 있습네다."
"하기는 사내자식은 입이 무거워야 돼. 사람이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믄 제 혓바닥에 휘감겨 뒈디기도(죽기도) 하디."

저물녘의 금오산
 저물녘의 금오산
ⓒ 구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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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군 중 오른 편 하늘에 우람한 산이 우뚝 서 있었다.

"데(저) 산 이름이 뭡네까?"

손 전사가 그 산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이 고당(고장) 인민들이 금오산이라구 하드만. 왼편 사다리꼴 모양으로 산 봉오리가 넙적한 데 산은 천생산이구, 거기서 오른쪽으로 조금 떨어진 산이 바로 유학산이야. 요즘 한창 데 고지를 두고 전투가 치열하디. 데 유학산 너머가 다부동이야."
"데 금오산 산세 한 번 좋네요."

"이 고당 인민들 이야기를 들으니까 데 산기슭에서 인물이 많이 나왔대. 우리가 야전병원으루 임시 쓰고 있는 기와집에서 조선 말기에 허위라는 훌눙한(훌륭한) 혁명렬사가 태어났다고 자랑하드만."

"산수가 좋은 고장에서 인물이 나온단 말이 틀린 말은 아니구먼요."
"혁명렬사가  진짜 인물이디."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들이 많이 메고 다녔던 총으로 일명 '딱콩 총, 또는 딱쿵 총'으로 불렸다. 이 총은 제정 러시아 때부터 사용하였던 소련제 소총으로 그 원명은 Mosin-Nagant M-1891이다. 이는 러시아의 병기관 모신과 벨기에 무기제작전문가 나강이 합작하여 만든 소총이라는 뜻이다.
▲ 아식장총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들이 많이 메고 다녔던 총으로 일명 '딱콩 총, 또는 딱쿵 총'으로 불렸다. 이 총은 제정 러시아 때부터 사용하였던 소련제 소총으로 그 원명은 Mosin-Nagant M-1891이다. 이는 러시아의 병기관 모신과 벨기에 무기제작전문가 나강이 합작하여 만든 소총이라는 뜻이다.
ⓒ 한 재미동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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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전선에 이르다

도로에는 자갈이 많았다. 그들은 발걸음을 떼어놓을 때마다 그 자갈로 발바닥이 아팠다. 곧 등줄기에서는 땀이 주르르 계속 흘러내렸다. 구미에서 대구로 가는 도로 언저리에는 드문드문 사과밭이 있었다. 사과밭 나무 사이에는 인민군 T-34 탱크와 122미리 곡사포, 120미리 박격포 등이 풋나무가 꽂힌 위장망을 잔뜩 뒤집어쓰고 포문을 남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늘에서 비행소리와 함께 미 폭격기 편대가 저공비행으로 도로 상공을 휘저으며 사라졌다. 그때 세 사람은 각자 도로에서 튀어 사과밭에 숨었다. 폭격기 소리가 멀어진 뒤에 세 사람은 다시 도로로 나왔다.

"동무들 환영 인사야. 앞으루 데 소리와 미국 놈 대포 소리를 아주 디겹게(지겹게) 들을 거야."

장 상사는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는 군복에 묻은 흙을 털고는 다시 앞장섰다. 무더운 날씨에다가 폭격기 출몰로 늦은 점심때에야 구미 임은동 낙동강 기슭 대나무 숲으로 가려진 인민군 제3사단 임시야전병원에 도착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이번 회에 아식장총의 이미지를 제공해 주신 분은 재미동포로 미국 워싱턴 근교 알렉산드리아 시에 사십니다. 이분은 제 글의 오랜 애독자입니다. 특히 이분은 한국전쟁 당시 무기에 대한 조예가 매우 깊습니다. 앞으로 이분이 제공한 이미지와 무기에 대한 이야기도 이따금 소개하겠습니다.



태그:#어떤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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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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