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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때 인민군들이 사용했던 따발총(소련제 단기관총)
 한국전쟁 때 인민군들이 사용했던 따발총(소련제 단기관총)
ⓒ 한 재미동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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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발총 화약 냄새

한국전쟁 발발 당시 최순희는 18세로 서울적십자간호고등기술학교 졸업반이었다. 그는 사남매 가운데 맏딸로 서울 창덕궁 옆 원서동에 살았다. 그의 아버지 최두칠은 이발사로 남의 집 문간방을 사글세로 빌려 한편에다 무허가 간이이발소를 차려 운영했고, 어머니 오금례는 이따금 이웃 집 허드렛일로 품삯을 받아 살림에 보탰다.

1950년 6월 28일 아침, 최순희는 밤새 북쪽에서 들려오는 대포소리를 듣고 조금 두려웠지만 평소처럼 서대문 네거리에 있는 적십자 병원인 학교로 갔다. 그날 다소 어수선한 가운데 수업을 마칠 무렵 비상종을 울리며 전교생을 병원 뒤 운동장에 모이게 했다. 그 시각 어디선가 '두두두…' 하는 따발총소리가 울렸고, 적십자병원 일대에는 매캐한 화약 냄새도 났다. 교감 선생님은 단상에서 다소 떨리는 목소리로 말씀했다.

"당국의 긴급 지시로 오늘 이 시간부터 임시 휴교한다. 모든 학생들은 이 시간 이후 즉각 학교를 떠나라. 등교 날짜는 비상연락망을 통해 알려주겠다."

그날 순희가 집으로 돌아오는데 벌써 중앙청 국기게양대에는 태극기 대신에 인공기가 펄럭거렸다. 중앙청 광장에도 난생 처음 보는 소련제 T-34 탱크가 풋나무를 잔뜩 꽂은 채 요란한 엔진소리를 내며 줄이어 들어가고 있었다. 순희가 안국동 네거리에 이르자 그새 인공기를 들고 거리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를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한국전쟁 무렵의 서울 경복궁 일대.
 한국전쟁 무렵의 서울 경복궁 일대.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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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완장

순희가 재동 네거리를 지나 원서동 어귀 돈화문에 이르자 몇 청년들이 붉은 완장을 차고 거리를 바삐 오갔다. 이튿날 저녁에는 '인민위원회'라고 쓴 붉은 완장을 두른 그 청년들이 총을 메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식량 보유량을 조사한 뒤 쌀을 거둬갔다.

"매국역적 리승만 괴뢰도당의 학정으로 선량한 인민이 굶어죽을 지경에 놓여 있습니다.  우선 가진 것을 다 같이 나눠먹어야 합니다. 인민공화국에서는 1주일 안으로 식량을 넉넉히 배급해 줄 것입니다."

순희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쌀뒤주에 남은 쌀 가운데 절반을 청년들이 끌고 온 리어카 쌀가마니에 부어주었다. 그들이 쌀을 거둬간 지 일주일이 지나도 식량배급 소식은 꿩 구워 먹은 소식이었다.

대한민국 시절 서울시민들은 쌀 한 가마니 값이 2천 원을 넘겼다고 행정 당국에 아우성을 쳤다. 그런데 인민군이 들어온 뒤 쌀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아 일주일 만에 한 가마니에 일만 원에 이르렀다. 그래도 어디에다 드러내놓고 불평하는 사람은 누구 하나 없었다.

서울시민들은 전쟁 중이니까 모두가 그럴 것이라고 체념한 채 장롱 속 갖가지 패물이나 옷가지를 들고 나가 서울 근교 시골에서 양식을 구해오는 집들이 늘어났다. 그도 저도 형편이 안 된 집들은 서울 밖 여기저기서 푸성귀를 구해다가 쌀이나 보리를 한 줌 넣고 멀건 나물죽을 끓여 배를 채웠다.

미처 피난하지 못한 대부분 서울시민들은 새로운 생존법칙에 순응하고 있었다. 거리에는 이따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 "조선인민군 만세!" "김일성 장군 만세!" "박헌영 선생 만세!"와 같은 군중 외침이 울렸고, 인도에 늘어선 사람 가운데는 급하게 만든 인공기를 흔드는 사람도 있었다.

각종 대회가 자주 열렸던 시청 옆 전 경성 부민관의 한국전쟁 당시 모습(해방 후 국회의사당, 서울시공관, 국가재건최고회의 등으로, 현재는 서울시의회로 쓰이고 있다. 1951. 4. 29.)
 각종 대회가 자주 열렸던 시청 옆 전 경성 부민관의 한국전쟁 당시 모습(해방 후 국회의사당, 서울시공관, 국가재건최고회의 등으로, 현재는 서울시의회로 쓰이고 있다. 1951. 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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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민 인민군환영대회

서울시청 광장과 전 국회의사당에서는 사회 각계 인사들이 참여한 가운데 서울시민 인민군환영대회가 열리고, 서울시내 거리에는 스탈린과 김일성 사진이 날로 늘어만 갔다. 서울 곳곳에 갑자기 세워진 인민위원회는 무소불위의 힘으로 이른 바 '반동' 즉 친일파, 민족반역자, 경찰, 군인, 관료를 찾아내 연일 인민재판에 회부했다. 대부분 서울시민들은 이런 변혁에도 입을 닫은 채 새로운 세상에 숨죽이며 살아갔다.

인공치하 서울에는 거리마다, 집집마다 인민공화국기가 나부꼈다. 최순희도 집 앞에 인민공화국 국기를 달고자 문방구점에서 붉은 잉크를 사온 뒤 집에 있는 푸른 잉크를 꺼내놓고 흰 천에다 인공기를 그렸다. 순희는 혹시나 잘못 그릴까 동 인민위원회에 걸린 인공기를 눈여겨보고 온 뒤 그대로 그렸다.

그 무렵 서울시내 집집마다 대문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 "영명한 지도자 김일성 장군 만세!"와 같은 구호가 덕지덕지 붙었다. 거리마다 동네마다 붉은 완장을 차고 다니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 완장에는 '인민 자치대' 등 뭐라고 쓴 것도 있었으나 그저 붉은 헝겊조각을 팔에 두르고 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그 시절 '붉은 완장'은 권력의 상징으로 일반시민들은 그 붉은 완장에 잔뜩 주눅이 들었다. 

최순희는 임시휴교 닷새 만에 비상연락을 받고 등교했다. 그날 학교 교문에는 따발총을 멘 인민군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며칠 만에 만난 친구들은 얘깃거리도 많았을 테지만 인민군 보초병 탓인지 모두들 표정이 굳은 채 좀체 입을 열지 않았다.

학교는 다시 문을 열었으나 어딘지 모르게 싸늘했다. 어느 대학교나 중학교에서 몇 백 명, 심지어 동덕이나 숙명, 이화 같은 여학교에서조차도 수백 명 학생들이 인민의용군에 지원했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한국전쟁 중 한산한 서울거리(1951. 4. 29. 을지로 입구)
 한국전쟁 중 한산한 서울거리(1951. 4. 29. 을지로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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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태그:#어떤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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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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