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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선 화순역은 1930년 12월 25일 보통역으로 영업을 시작했다.
 경전선 화순역은 1930년 12월 25일 보통역으로 영업을 시작했다.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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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화순하면 으레 고인돌이나 운주사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왠지 벽지 산촌일 것 같은 화순에 대한 짐작은 이 땅에 들어서는 순간 반신반의하게 된다. 골짜기로 들어가는 길이 궁벽한 곳으로 이어지면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이내 곳곳에 산재해 있는 수많은 유적들을 보고 있노라면 겉핥기로는 세상의 어떤 곳도 제대로 알 수 없음을 화순 땅에서 실감하게 된다.

처음 예상보다 여행이 속도를 내고 있었다. 능주에서 하룻밤을 자려는 계획은 수정해야 했고, 광주행 마지막 기차에 올랐다. 능주를 떠난 기차는 10분 만인 오후 7시 17분에 화순역에 도착했다. 어스름이 내리기 시작한 하늘에 붉은 노을이 구름 속을 물들이고 있을 즈음이었다. 막차여서 그런지 승객들은 다소 늘어진 자세로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지만, 역사에서 나온 역무원은 마감을 위해 부산을 떨었다.

내일 다시 이곳에서 남쪽으로 가는 기차를 탈 것이지만, 늘 마지막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역사 이곳저곳을 사진에 담았다. 해가 소나무에 가릴 즈음, 등으로 무언가가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역무원이었다. 중년인 그는 손사래를 치며 사진을 계속 찍으라고 했지만, 어차피 어둠도 내리기 시작해서 읍내로 가서 빨리 숙소를 잡아야 했기에 역사를 빠져나왔다.

화순역 앞 풍경
 화순역 앞 풍경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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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역, 1980년 5·18의 흔적

대합실에서 읍내 가는 버스시간을 물어보고 광장 끝으로 이어진 찻길로 향했다. 번듯한 역사와는 달리 골목은 아직 시간의 지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다시 역 건물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데 광장 구석으로 비석 같은 게 눈에 들어왔다.

5·18민주화운동 사적비였다. "여기 화순역 광장은 1980년 5·18민중항쟁 당시 화순군민들이 분연히 일어섰던 곳이며 5월 21일 계엄군의 발포 이후 우리도 더 이상 당할 수 없다면서 화순역전파출소에서 총기 750여 정, 실탄 600여 발이 최초로 시민들의 손에 들어간 곳이며 화순 군민들이 이들에게 빵과 음료수 등 식량을 제공한 현장이다"고 적고 있었다.

까만 대리석 비석에는 <화순 그대 영원한 참세상의 고향이여>라는 김준태의 시와 지도, 그림 등이 새겨져 그날을 기리고 있었다. '아, 그랬었지.' 한동안 잊고 있었던 부끄러운 그 무엇이 가슴 저 밑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일이 5·18이었군.

화순역 앞 광장에 있는 5?18민주화운동 사적비
 화순역 앞 광장에 있는 5?18민주화운동 사적비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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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에서 읍내로 가는 길이 막히기 시작했다. 계엄 상황 같았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순간 가슴이 답답해지고 숨이 막혔다. 한참이나 지난 후에 버스는 읍내에 이르렀다. 찻길이 시원스럽게 뚫리자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길이 막힌 건 화순운동장에서 '힐링푸드 페스티발'이 열렸기 때문이라고 누군가 큰소리를 쳤다.

버스 기사에게 모텔이 가까이 있는 곳이면 아무 정류장에나 내려달라고 했다. 딱히 정한 곳도 없어 기사의 말대로 버스를 내려서 모텔을 찾았다. 겉보기에 제법 근사한 모텔에 들어갔다. 방을 잡고 모텔 앞 식당에서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대충 해결하고 침대에 비스듬히 기댔다.

깊은 적막이 감돌았다. 그래, 여행 동선을 바꿔야겠지. 화순탄광, 5·18, 노동자, 학살, 너릿재... 온갖 단어들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밤새 뒤척이다 새벽녘에야 잠이 들었다. 5·18 현장을 답사하기로 마음을 먹고서야 겨우 잠이 든 모양이다.

화순역 앞 버스정류장에서 읍내로 가다
 화순역 앞 버스정류장에서 읍내로 가다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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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들고 너릿재나 갈 놈"

서늘한 공기에 선잠을 깼다. 세수를 하고 택시를 불렀다.

"걸어가도 멀지는 않은데... 인도가 없어요. 게다가 터널을 지나야 되니 걷는 것은 불가능할 게요."

아직 잠이 덜 깬 듯한 모텔 주인이 애써 말리지 않았다면 새벽 공기를 가르며 걸었을 것이다. 택시는 쏜살같이 도로를 달리더니 어느새 오르막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나타난 터널, 뻥 뚫린 4차선 도로에선 그 옛날 험했다는 재를 볼 수 없었다.

5월 18일, 아침 일찍 택시를 타고 너릿재를 갔다.
 5월 18일, 아침 일찍 택시를 타고 너릿재를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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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보이지요. 터널 옆 산허리로 예전 재를 넘나들던 길이 있지요. 지금이야 길이 뚫려 고개를 넘기 쉽지만, 예전엔 험하기 이를 데 없었지요. 터널이 생기기 전에는 큰 눈이 오면 한 달 넘게 길이 끊기기가 예사였고, 대낮에도 도적이 많았다고도 하네요. 오죽했으면 행실이 안 좋으면 '칼 들고 너릿재나 갈 놈'이라고 했겠어요."

너릿재에서 5·18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다만 터널 옆 산기슭에 조성된 공원의 몇몇 시비에서 당시 광주의 흔적을 애써 읽을 수 있었다(뒤에 안 사실이지만 2013년 5월 19일자 화순의 지역신문에는 5월 16일에 너릿재공원에서 5·18민주화운동 기념조형물을 설치하고 제막식을 가졌다는 기사를 보도했다).

너릿재공원
 너릿재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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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이 고개를 넘나들었다는 너릿재

"그때 제가 고등학교를 다녔는데요. 여기 화순에서 목포까지 걸어간 부모님들이 있었지요. 혹시나 자식들이 데모에 나갈까봐 걱정이 돼서 가봐야겠는데 계엄군에 의해 차가 모두 끊겨 버렸으니 걸어갈 수밖에요. 친구들 중 몇 명은 부모에게 끌려 이곳 화순 집까지 다시 먼 길을 걸어서 왔다가 5·18이 지나고 한참 후에나 학교에 다시 나왔었지요."

5·18 당시 목포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는 택시기사 황태근(51)씨는 당시를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제가 듣기로는 저 아래 마을에서 그 당시에 많이 죽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황씨는 끝내 말끝을 흐렸다.

광주로 넘나드는 길목인 너릿재. 5·18민주화운동 당시 화순 군민들이 도청사수를 위해 다이너마이트를 싣고 광주로 넘어가기 전 집결했던 장소였다. 예부터 광주에서 화순으로 오거나 화순에서 광주를 가려면 너릿재를 넘어야 했다. '너릿재'라는 이름은, 고개로 오르는 길은 구불구불하고 가파르지만 고갯마루는 제법 널찍하고 평평해서 '너른 재'라는 뜻에서 왔다. 한자로는 '판치(板峙)'라 했다. 동학농민군이 대규모로 처형된 곳으로 '널재'라고 불렸다는 설도 있다. 동학농민전쟁부터 한국전쟁까지 수많은 널, 즉 관이 이 고개를 넘나들었다는 데서 그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오죽했으면 그 이름이 죽음과 결부되는 너릿재였을까.

화순에서 광주로 넘나드는 너릿재는 1971년 터널이 생기기 전까지 험했던 고개였다.
 화순에서 광주로 넘나드는 너릿재는 1971년 터널이 생기기 전까지 험했던 고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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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인 1519년(중종 14) 11월에 정암 조광조도 능주 유배길에 이곳을 지나갔는데 결국 12월에 사약을 받고 목숨을 잃게 된다. 1895년에는 동학농민군이 이곳에서 무더기로 처형되었고, 1907년 능주 출신의 의병장 양회일이 이끄는 부대가 화순을 점령하고 광주를 공략하려 너릿재를 넘으려 했으나 매복한 관군에게 많은 희생자를 냈고 양회일은 체포됐다.

어디 이뿐이랴! 1946년 8월 15일 화순탄광의 광부들이 광주에서 열리는 해방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이 고개를 넘었다가 미군과 경찰의 총격을 받고 쓰러진 곳이기도 했다. 1950년 7월에는 국민보도연맹에 얽힌 이들이 너릿재 인근에서 학살됐고, 9월에는 광주형무소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끌려나와 너릿재를 넘어 화순읍 교리의 저수지 근처에서 영문도 모른 채 죽임을 당했다. 1980년 5월의 학살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우연의 비극이 아님을 역사는 말해주고 있다. 참 아이러니한 것은 2012년 너릿재 옛길이 '아름다운 숲'에 선정됐다는 것이다. 아름답고도 슬픈 일이다. 아니 슬퍼서 아름다운 것인가?

화순터미널 뒤에 있는 5?18민주화운동 기념비는 너무나 작고 초라했다.
 화순터미널 뒤에 있는 5?18민주화운동 기념비는 너무나 작고 초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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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동안 시위를 벌인 화순 경찰서 사거리

이쯤에서 그칠 수는 없었다. 5·18의 흔적을 더 찾아야 했다. 화순경찰서 앞 터미널에 작은 표지석이 하나 있다는 기사의 말에 다시 택시를 돌렸다.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에는 새벽부터 길을 나서서 그런지 아직 아침 8시가 되지도 않은 이른 시각이었다.

경찰서 앞 사거리는 시골의 소읍치곤 제법 번잡했다. 광주로 오가는 버스가 쉴 새 없이 터미널 앞을 지나갔다. 터미널 뒤 대한석탄공사 통근버스가 여러 대 서 있는 주차장 한 구석에서 비석을 겨우 찾을 수 있었다. "여기 화순 경찰서 사거리는 1980년 5·18 민주항쟁 당시에 계엄군의 폭압과 학살에 맞서 항쟁 10일 동안 줄곧 시위를 벌인 곳으로 특히 화순탄광에서 획득한 대량의 다이너마이트를 트럭에 싣고 전남도청을 향해 달려갔던 현장이다"고 적혀 있었다.

10일 동안 시위를 벌이고 다이너마이트를 트럭에 싣고 다녔다는 글에서 어떤 비장함과 결기가 느껴졌다. 그러나 작고 초라한 비석에 그 옛날의 함성이 점점 잊히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염려와 불안이 엄습해오는 건 왜일까? 화순을 더 알고 싶었다. 광주로 가는 버스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발길은 절로 터미널을 향하고 있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10여 일 동안 시위를 했던 화순 경찰서 사거리
 5?18민주화운동 당시 10여 일 동안 시위를 했던 화순 경찰서 사거리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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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전남 화순 여행은 5월 17~18일에 다녀왔습니다. 이 기사는 블로그 '김천령의 바람흔적'에 일부 실렸고, 코레일에 실릴 예정입니다.



태그:#5?18민주화운동 사적비, #너릿재, #화순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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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의 미식가이자 인문여행자. 여행 에세이 <지리산 암자 기행>, <남도여행법> 등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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