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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돈으로 베팅하는 프로도박꾼의 배짱이 이와 같을까. 절대로 죽지 않는다는 신탁을 받고 전쟁터에 나선 용사의 무모함이 이와 같을까.

10일 서울 서초동 고등법원 302호실에서 열린 한명숙 전 총리에 대한 불법정치자금사건 항소심 3차공판장에 죽 늘어앉은 검사들이 영락없이 그랬다. 한 전 총리를 에워싸고 칼춤을 추어대는 이들에겐 이젠 조금의 사리분별력도 남아 있지 않은 듯했다. 오직 억지와 만용을 뽐낼 뿐이었다. 왜? 그들은 결코 자신들이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니까.

죽지 않는다는 신탁을 받은 검투사처럼...

 한명숙 전 총리. 사진은 지난해 1월 13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항소심 공판에 참석했을 때의 모습.
 한명숙 전 총리. 사진은 지난해 1월 13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항소심 공판에 참석했을 때의 모습.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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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들은 이날 느닷없이 한 전 총리에 대한 공소장 내용을 변경하겠다고 했다. 3년이나 끌어 온 사건의 막바지에, 그동안 집요하게 매달려 왔던 혐의내용을 바꾸겠다는 것이다. 그럼 지금까지 검찰은 1심 재판 포함 모두 25여 차례의 공판을 통해 도대체 뭘 입증하려 했고 뭘 갖고 재판을 해 온 건가?

그동안 한 전 총리에게 씌워진 주요 혐의는 한만호라는 건설업자로부터 2007년 4월 초, 5월 초, 9월 초 세 차례에 걸쳐 각각 3억 원씩, 총 9억 원을 불법정치자금으로 '직접' 전달받았다는 것이다. 당초 공소장에 따르면, 처음엔 한만호씨가 한 총리의 당시 고양시 풍동 자택 근처 길가에서 한 총리 차에 직접 실어주었고 나머지 두 번은 한 사장 혼자 한 총리 자택을 직접 방문해서 전달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날 검찰은 처음 전달한 3억 원은 한 전 총리가 직접 받았을 수도 있고, 비서 김아무개씨를 통해 받았을 수도 있는 것으로 공소내용을 바꾸겠다는 것이다.

왜 아니겠나. 그동안 검찰은, 1차 돈 전달장소로 찍었던 한 총리 자택 근처 길거리가 1심재판 현장검증을 통해 돈 전달장소로 부적합하다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난 이래 나름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음이 분명하다. 검찰 입장에서 이 재판은 돈을 준 것으로 되어 있는 결정적인 주요 증인(한만호)이 1심 2차공판에서 "그런 일이 없다. 한 총리님은 누명을 쓰고 계신 거다"라고 일찌감치 양심선언을 해 버리는 바람에 처음부터 꼬였다.

게다가 돈을 준 날짜도 특정하지 못하고, 돈을 줬다는 장소마저 터무니없는 것으로 드러나면서 1심에서 완벽한 무죄판결이 난 것인데, 검찰 입장에서는 이대로 아무 손도 쓰지 못한 채 항소심까지 끝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을 법 하다. 좀 창피하긴 하지만 지푸라기라도 잡아 보자, 뭐 그런 미련이겠다.

창피 무릅쓴 검찰의 미련 '공소장 변경'

 한명숙 민주통합당 의원
 한명숙 민주통합당 의원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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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헌 변호사의 설명처럼, 검찰은 이 사건의 수사를 제대로 마치고 기소한 것이 아니라 기소부터 해 놓고 재판과 수사를 병행해 왔다. 2010년 4월 이른바 '곽영욱 뇌물사건'이라고도 하는 1차사건에서 무죄판결이 확실시 되고 지방선거가 코앞에 닥치자 검찰이, 수감중에 있던 한만호 사장을 엮어 급히 별건으로 기획한 것이 이 사건인 것이다.

그렇게 3년을 수사해 온 결과가 "2007년 4월초 어느 날, 한 전 총리가 돈을 직접 받았을 수도 있고 비서에게 지시해 간접적으로 받았을 수도 있다"는 애매한 결론인 셈이다.

검찰이 더욱 비겁한 것은, (한만호 사장의 증언에 따르면, 그리고 1심판결에 따르면) 처음부터 있지도 않은 사실을 검찰과 한 사장이 그럴 듯 하게 짜맞추었기 때문에 자금수수의 시간·장소 등에서 엇박자가 난 것인데 이를 한 전 총리의 묵비권행사 때문이라고 우는 소리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피고인이 협조를 안 해서 혐의를 제대로 입증하지 못했다는 주장이다!

이 대목에서는 재판장까지 불쾌한 듯했다.

"그건 검찰이 너무 나가는 것 아닌가요? 형사소송에서 피고인의 증언거부나 묵비권 행사는 법적으로 보장된 피고인의 권리입니다. 피고인의 혐의를 입증하는 책임은 검찰에 있고, (검찰이) 입증에 성공하면 유죄가 되는 것이고 입증에 실패하면 무죄가 되는 것이고…."

최고의 베테랑이라 자부하고 있을 검사들이, 법학개론마저 떼지 못한 어리보기 법학도처럼 꾸중을 듣는 듯한 민망한 모습이었다. 그래도 부끄러움은 없다. 이익만 눈 앞에 어른거릴 뿐이다. 그동안 한 전 총리를 괴롭혀 왔던 검사들은 1차 사건이 1심 무죄, 2심 무죄, 대법원 무죄, 2차 사건 역시 1심에서 완벽한 무죄 등 참패를 거듭하는 와중에서도 승진과 영전대열에서 탈락한 경우가 없다고 한다. 신탁도 이런 신탁이 없다. 

한 전 총리에 대한 무모한 용기, 원세훈에게도 보여줘!

이젠 공식적으로는 아니라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검사집단이 동일체라고 믿고 있다. 한명숙 전 총리를 집요하게 물어 뜯고 있는 검사들과 원세훈 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검사들이 동일체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검찰이 한 전 총리 재판에서 보이고 있는 무모하기까지 한 용기를 원세훈의 국기문란사건에서도 보여주긴 어려울 것 같다. 한 전 총리에 대한 혐의는 결심을 코앞에 둔 지금도 모호하기 짝이 없고, 원세훈에 대한 수사는 이미 완결됐는데도 오히려 그렇다.

왜? 국정원 정치개입 사건에는 신탁이 없으니까. 신탁은커녕 잘못하면 크게 다칠 우려가 많으니까.

덧붙이는 글 | 한명숙 전 총리에 대한 두 건의 재판 중 한 건은 이미 대법원에서까지 무죄확정판결이 났고 나머지 한 건은 항소심 결심을 앞두고 있다.(7월8일) 이렇게 재판이 거의 끝나가고 있는 상황에서 검찰이 느닷없이 공소장 변경을 시도하고 있다. 기존 공소장으로는 무죄판결을 피할 수 없으니 마지막으로 꼼수를 부려 보는 것이다. 결국 3년을 끈 재판이 처음부터 혐의사실조차 확정짓지 못한 상태에서 진행되어온 셈이다.

* 강기석 기자는 전 경향신문 편집국장입니다.



#한명숙#항소심#검찰#원세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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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제 다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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