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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는 세계 평화를 기원하는 '세계 평화의 종'이 두 개 있다. 하나는 오키나와에 설치됐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직전 오키나와는 미군과 일본군의 최대 격전지중 하나였다. 1978년 오키나와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오키나와에 평화의 종이 설치됐다. 또 다른 하나는 1988년 일본 홋카이도 소야미사키 공원에 설치됐다. 첫 세계 평화의 종은 일본 유엔협회가 전쟁에서 패한 직후인 1954년 자성의 뜻으로 유엔본부에 기증한 것으로 전 세계 60개국의 동전을 모아 제작했다.

 

일본에 전쟁을 반대하는 알려 지지 않은 '진짜 평화의 종'은 따로 있었다. 일본 구마모토현 아소산 기슭 야마다(山田寺·구마모토현 아소산 기슭) 사찰. 지난 달 말 방문한 사찰은 팽팽한 마음을 금세 내려놓게 할 만큼 아늑했다. 300여 년 전 만들어진 산문을 지나 법당에 이르렀다. 그 곳에 작지만 범상치 않은 종(높이 85cm, 무게 약 50kg)이 다소곳이 놓여 있었다. 그 앞에 '반전 평화의 종'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유아사 주지스님(50)에게 '반전, 평화의 종'으로 불리게 된 연유를 물었다. 이 종이 만들어 진 때는 1847년 2월이다. 이후 100여 년 동안 종은 야마다 사찰입구에 걸려 아소산 기슭 사람들에게 법음을 전했다. 바깥세상과 멀리 떨어진 깊은 산골에 자리 잡은 이 사찰과 인근 마을은 내내 평화로웠다.

 

무기 만든다며 강제로 떼어단 종

 

하지만 일본이 저지른 2차 세계대전은 이 곳 두메산골도 피해갈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전쟁터로 향했다. 야마다 사찰도 예외는 아니었다. 군수물자를 만든다며 사찰의 종을 강제로 떼어갔다. 정토세상을 구현하기 위한 법구인 종까지 녹여 무기로 만들려 한 것이다. 

 

산문 앞에 매달려 세상을 깨우던 종은 이때부터 아무런 소리를 낼 수 없었다. 백여 년을 함께 한 종의 존재는 그렇게 잊히는 듯 했다. 그러던 중 1981년 어느 날이었다. 여러 사람들이 종을 들고 이 절을 찾아왔다. 사찰을 떠난 범종이 온전한 형태로 다시 절을 찾아온 것이다. 공출된 종은 쇳물이 되어 총알이 되고, 포탄이 되는 수모를 피했다.

 

전쟁이 끝난 후 이 종이 발견된 곳은 기타규슈에 있는 와카마쓰정(若松町)이었다. 와카마쓰정 소방당국은 이 종을 화재경보를 알리는 용도로 사용했다. 종소리는 인근 시내를 파고들어 오랫동안 사람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켰다.

 

고마움이 커지자 종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종을 유심히 살피자 표면에 새겨 있는  제작연도는 물론 만들어진 사찰 이름이 드러났다.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려주자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그렇게 종은 돌아왔다. 39년(전쟁이 끝난 지 36년) 만의 귀환이었다.    

 

39만에 되돌아 오다 "전쟁을 반대하는 종"

 

유아사 스님은 말한다.

 

"많은 곡절을 겪었지만 아름다운 음색은 소멸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반전과 평화의 정토세상을 알리는 종소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종은 이때부터 '반전, 평화의 종'으로 불렸다. 야마다 사찰과 종단에서는 종의 무사귀환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8월 16일 전몰자 추모제와 함께 반전 반핵(非戰非核)과 평화를 염원하는 법회를 열고 있다. 일 년에 단 한번 '반전, 평화의 종'이 아소산 기슭에 울려 퍼지는 날이기도 하다.

 

유아사 스님은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이하 생각하는 모임)의 회원이기도 하다. 그가 '생각하는 모임' 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것도 '반전 평화의 종소리'와 연관돼 있다. 

 

그는 긴장이 고조되는 한반도 주변 정세를 언급한 후 "평화의 종소리가 널리 퍼져 더 이상 전쟁의 공포가 없는 정토세상이 구현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태그:#반전평화의 종, #아소산, #구마모토, #山田寺, #명성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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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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