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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집필싱인 '유유재'에서 팬들과 대화하고 있다.
▲ 팬들과 대화중인 박범신 작가 자신의 집필싱인 '유유재'에서 팬들과 대화하고 있다.
ⓒ 이명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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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건방진 생각이었지만, 고전에 속하는 빼어난 단편들과 고전 소설을 읽은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서 소설에 별 관심을 갖지 않았다 한국문학 단편집이나 한국 문학 선집을 다 읽은 것, 조정래, 박경리의 대하 소설, 윤정모, 이청준, 이문구, 최인훈, 황석영, 이경자, 박영한 등과 젊은 날의 이문열, 이외수의 단편 등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요즘 이시백과 박범신 작가 때문에 생각이 바뀌고 있다. 소설이야말로 그 시대와 인간 삶의 본질을 낱낱이 해부해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을 깨우쳤기 때문이다 각각의 표현방식과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기에 경중을 논할 수 없음도 알게 됐다. 소설은 글로 표현된 인간 삶의 또 다른 현장이고 그 현장으로 부터 독자를 객관화시켜 제 삼자의 시선으로 관망하게 만든다. 소설은 자기 스스로 들여다보지 못하던 자기를 들여다보게 만드는 거울이다. 소설 속 자신의 실체를 자주 들여다볼 일이다.

나는 오랫동안 박범신 작가에 대한 그릇된 고정 관념을 지니고 있었다. 다작을 하며 통속 소설을 쓰는 대중 작가라는 고정관념이었다. 박범신 작가의 40년 창작 생활, 마흔 권째 작품으로 발간된 <소금>과  작가 자신이 이야기하는 문학을 하며 지향해온 두 가지 원칙을 들으면서 작가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내가 지녔던 편견의 잣대가 많이 부끄러웠다.

박범신 작가는 문학은 모든 정파를 초월 해 인간 삶의 본질을 풀어낼 수 있는 기제가 된다는 순전한 믿음을 신앙처럼 간직한 채 치열한 글쓰기를 하고 있었다. 그의 글쓰기는 순정과 인간사랑에 천착하는, 다시 말하면 인간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근간을 이룬다.

혹자는 말할 것이다. 문학에 인간에 대한 사랑이 근간을 이루지 않는 것이 있었느냐고 말이다. 박 작가가 관심을 갖는 인간들은 혁명적이거나 영웅적인 인물이 아니다. 온 존재를  그저 생존에 매달려 사느라 한 번도 이겨본 기억 없이 늘 패배와 체념 속에 자신을 방기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 그저 남자1, 여자 1로 불러도 좋을 익명의 인간들이다. 그는 <소금>에서 염부1, 염부2로 표현되는 무명의 아버지와 노동자들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작품 속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시켰다.

박범신 장편소설
▲ 소금 박범신 장편소설
ⓒ 한겨레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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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은 자본주의 세상의 소비지향적 욕망을 충족시켜주지 못하면 날로 어깨가 작아지고, 존재감이 없어지며 낡은 옷가지처럼 남루해져 가는 우리네 아버지의 자화상, 곧 스스로 소비지향 질주를 멈출 수 없는 우리 자신의 자화상을 만나게 만든다.

평생 소금밭을 떠나보지 않았던 염부1은 소금밭 대파질을 하다 소금밭에 고꾸라져 죽는다. 안 먹고 땀을 많이 흘려 몸 속의 소금기가 속속 빠져 달아나면서 죽음에 이른 것이다. 소금을 만들면서 자기 몸속의 소금을 챙기지 못해 죽어갔던 익명의 아버지인 염부1과 평생 가족이 꽂은 빨대에 소금기까지 쥐어짜듯 쥐어 짜이기만 하다 가출 후 비로소 자기의 삶을 정체성을 찾은 선명우, 아버지가 되고 싶지 않은 시인 등 자본주의 시대 가족 구성원으로 가족의 소비를 책임지면서도 그 존재감이 없어진 아버지1, 아버지2, 아버지10, 아버지1000, 자본의 틀에 갇혀 가정의 진정한 구성원이 되지 못하고 유랑하는 아버지들을 그려내고 있다.

어디 아버지만이랴. 자본주의 시대 자본이 부추기는 소비지향적 욕망을 따라 사는 도시의 대다수 노동자들과 그 노동자에 편입되기 위해 젊음을 저당잡힌 청춘들이 모두 진정한 자아를 잃어버린 청년1, 여자1, 혹은 남자1에 다름이 아닐 것이다.

작가는 <소금>에서 끝내는 씨를 뿌리고 달아났던, 혹은 가족의 굴레가 버거워 그 굴레를 박차고 달아났던 발걸음을 되돌려 아버지가 되고,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았던 여자는 자궁 안에서 생명을 품어 기를 것이라는 순전한 믿음을 생생한 언어로 형상화해냈다.

<소금>을 읽고 나면 작품 속 주인공처럼,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씻어내지 못한 정한과 오해의 앙금을 안고 사는 이들이 어느 지점에서 소통을 위한 말 걸기를 시도해야 하나, 언제 화해의 손을 내밀어야 할까 인간적인 고민을 시작할 것 같다.

그의 목을 껴안은 내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
부지불식간에 나온 말이었다. 나를 안은 사람은 과연 선명우, 그일까.
치사해, 치사해…라고 중얼거리는 아버지가 부둣가를 걸어 집으로 오고 있었다.
베트남전에서 다리가 잘린 채 성긴 안개 사이로 절름절름 걸어오는 어떤 아버지의 모습도 보였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라고 소리치는 아버지와, 소금을 안고 엎어지는 아버지와,  감옥에 간 아버지와, 사우디 모래바람 속에서 함마를 내두르는 아버지와,  빨대아버지와, 깔대기아버지와, 그리고 또 가족을 등지고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아버지도 보였다.

누가 됐든, 그런 건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이 내게 오고 있었다.
아버지들이 돌아오고 있다…고, 나는 느꼈다.

경이로운 느낌이었다. 등을 보이고 떠나는 아버지는 아무도 없었다.
어떻게 된 노릇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개야! 아무개야! 아무개야! 소리쳐 부르면서, 아버지들이 집으로, 집으로,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감동적인 귀가였다. - 박범신 <소금> 중

박범신 작가는 '고향초'를 팬들을 위해 불렀다.
▲ 노래하는 박범신 작가 박범신 작가는 '고향초'를 팬들을 위해 불렀다.
ⓒ 이명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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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신 작가는 이번 작품을 내고 몇 차례 독자와의 만남을 가졌다. 5월 25일에는 논산 가야곡면 조정리 탐정호가 내려다보이는 자신의 집필실 '유유재(흐르면서 머물러 있는 강 같은 존재)'에서 오픈하우스를 통해 독자 팬들과의 만남을 가졌다.

멀리 호주에서, 서울에서, 수원, 청주, 대전, 등 곳곳에서 찾아온 독자들은 연령층이 다양했다. 일흔셋이라고 나이를 밝힌 한 할머니는 얼마 전 독서모임에서 열댓 명이 모여 <소금>을 읽고 토론을 가졌다고 한다. 그분들은 다정히 손을 잡고 작가를 찾아와 직접 사인도 받고 박범신 작가가 독자들에게 불러준 <고향초>에 대한 화답송도 불렀다.

청주에서 온 한 여성 독자는 한 달 내내 박범신 작가의 작품만을 붙들고 있는 것을 본 딸이 엄마의 일탈에 그 어떤 이의도 달지 못하더라고 했다. 작가가 좋아하는 카라를 사려고 했는데 논산 꽃집서는 카라를 찾을 수 없었다며 장미 꽃다발에 <소금>에서 나오는 배롱나무에 대한 부분을 써 가지고 오는 열정을 보이기도 했다.

뜰에 심겨진 배롱나무는 <소금>에 나오는 폐교에 있던 나무다
▲ 배롱나무가 있는 뜰 뜰에 심겨진 배롱나무는 <소금>에 나오는 폐교에 있던 나무다
ⓒ 이명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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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작가가 논산에 집필실을 마련한 것은 2년 전이다. 그의 고향이며 <소금>의 주 배경인 강경에 머물 곳을 마련하려 했지만 여건이 마땅치 않았다. 강경과 가까운 탑정호 부근에 집필실을 마련하고 일 년 정도는 후회와 갈등의 시간이었다. 다시 서울로 돌아갈까 망설이기도 했다.

그 갈등의 시간이 지나고 나니 왜 자신이 논산으로 돌아왔는지 확실히 깨달아졌다. 황산벌 계백 장군을 비롯해 패배주의의 긴 역사 속 정한을 가득 지닌 곳이 자신이 머무르는 땅이었다. 한 번도 이겨보거나 밝은 햇살 아래 서보지 못한 음지식물처럼 그늘 속에서 그림자처럼 살아온 사람들, 이제 고향에서 패배의 역사 속 인물 중 누군가의 정강이 뼈, 혹 턱뼈 하나라도 찾는다면 그 뼈들을 찾아 살을 입히고 피가 도는 다시 살아나는 인물로 되살려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는 편협한 정파주의나 기껏해야 십 년을 넘지 못하는 정치권력을 초월하는 진정한 힘은 순수 문학에 있다고 힘주어 말한다. 세상을 보는 순정한 마음을 잃으면 이미 문학적 생명력이 없다고 믿는 순정파다. 때문에 발표할 곳조차 없던 무명의 젊은 날 밤새워 글을 쓰던 때가 행복했다는 그의 고백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가 또 다른 산고를 통해 어떤 인물을 세상 밖으로 끌어낼지 기대가 되는 것은 그의 글쓰기는 어쩌면 그에게 호흡과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그의 호흡이 수많은 익명의 생명에게 부활의 빛으로 비쳐져 수많은 이들이 햇살 아래 서는 날을 기다려본다.

박범신 작가가 자신의 집필실을 찾은 이들과 독자들에게 하트로 인사하고 있다.
▲ 독자들에게 보내는 사랑의 인사 박범신 작가가 자신의 집필실을 찾은 이들과 독자들에게 하트로 인사하고 있다.
ⓒ 이명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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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소금> 박범신 씀, 한겨레출판사 펴냄, 2013년 4월, 368쪽, 1만3000원



소금 - 박범신 장편소설

박범신 지음, 한겨레출판(2013)


태그:#소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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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교’ 비정규직 없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애인 노동자입니다. <인생학교> 를 통해 전환기 인생에 희망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옮긴 책<오프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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