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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은 참 이상하다. 예쁘게 깎고는 돈 대신 나무 부스러기만 주고 간다"? 이건 비유가 아닙니다.
 "연필은 참 이상하다. 예쁘게 깎고는 돈 대신 나무 부스러기만 주고 간다"? 이건 비유가 아닙니다.
ⓒ sx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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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23일) 아침 지역 어린이신문에 나온 시를 읽었다. '이번 주 우수작'으로 뽑힌 4학년 아이의 작품을 보면서 이 시가 정말 잘 쓴 시인가 싶어 내 생각을 말해 보려고 한다. 우수작은 말 그대로 여럿 가운데 빼어나게 잘 쓴 작품이라는 뜻. 그런데 정말 그런가. 더욱이 신문에 실린 시는 어른이고 아이고 훌륭한 본보기글로 보는 까닭에 교육에 미칠 영향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연필은 참 이상하다 /머리카락처럼 /검은 심이 다 닳아버리면 /이발소에 간다 // 기계 속에 몇 번 /빙글빙글 돌고 나오면 /깨끗하게 이발이 되어서 /예뻐진다 // 연필은 참 이상하다 /예쁘게 깎고는 /돈 대신 나무 부스러기만 /주고 간다. ('연필' 전문, 초등 4년)

'연필이 이상해'가 전부... 이게 낮설게 보여주기?

연필을 머리 깎는 아이로 빗대어 썼다. 이 시를 고른 분은 '낯설게 보여주기'를 잘한 작품이라고 칭찬하며 우수작 선정 까닭을 밝혔다. 그러나 심이 뭉툭해진 연필을 깎으면서 이발소를 떠올린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게 전부다. 4학년이나 된 아이 생각지고는 너무 어리다. 이 시를 유치원쯤 다니는 아이가 썼다면 '아, 새로운 발견으로 쓴 시구나'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4학년 아이가 이렇게 쓴 것은 '퇴행'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낯설게 보여주기'는 일상하고는 다르다는 느낌을 넘어 거기에 무슨 새로운 발견이나 남다른 감동이 있어야 하는데, 이 시는 그저 이상하다고 생각한 게 전부다. 어쩌면 아이는 시란 이상한 것을 쓰는 것으로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연필은 참 이상하다."

이렇게 시작해서 새삼스럽게 아주 어린 아이가 되돌아간 것처럼 군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일부러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쓴 것이리라. 더구나 연필은 자꾸 닳아 없어지는데 '머리카락처럼 /검은 심이 다 닳아버리면'이라고 쓴 것이나 '돈 대신 나무 부스러기만 /주고 간다'는 게 제대로 된 비유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하지만 이런 유치한 발상으로 쓴 시가 이것뿐이겠는가.

같은 제목으로 쓴 시 두 편을 읽어보자.

빨강 연필을 사려고 보면
노랑 연필이 더 예쁜 것 같고
노랑 연필을 사려고 보면
파랑 연필이 더 예쁜 것 같아서
연필은 다 사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노랑 연필을 샀다.
('연필' 전문, 황금순·문경 김룡국 6년·1972년)

연필이 일을 하다가
따뜻한 엄마 품에
가만히 누워 있다.
('연필' 전문, 김순규·안동 길산국 4년·1976년)

필통을 엄마 품으로... 참 따뜻하다

문방구에서 연필을 이것도 사고 싶고 저것도 사고 싶지만 '돈이 없어서' 흔들리는 마음이 잘 드러나 있지 않은가. 김순규의 시는 또 어떤가. 연필을 쓰고 난 뒤 필통에 가지런히 놓아둔 것을 보면서 '엄마 품'을 생각해낸 마음이 따뜻하다. 별다른 손재주나 머리로 쓴 시가 아니라 일상에서 겪을 만한 일을 썼을 뿐이다.

여기서 어른들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어린이신문에 실리는 글들이 하나같이 재미가 없고 비슷한 발상을 끊임없이 복제하는가'를 깊이 반성해야 한다. 어린이 시 교육이 가야 할 방향이 '동시' 흉내 내기인가? 아니다. 동시는 어른이 동심을 흉내를 내 쓴 시이기 때문이다. 어른이 어린이 마음으로 돌아가 어린이인 것처럼 쓴 시를 어린이한테 읽히고, 그 시를 본받아 쓰라고 해서는 안 된다. 더욱이 이런 시를 잘 쓴 시로 뽑아 신문에 실으면 아이들은 '이렇게 써야 뽑히는구나, 상을 받더라'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교사든 부모든 어떤 까닭으로 어린이 글을 읽는 사람이든 어떤 글이 좋은 글이고 어떤 글이 좋지 않은 글인가를 또렷이 해야만 한다. 그래서 아이들이 '동시'가 아니라 '어린이시'를 쓰도록 가르쳐야 한다. 서투르게 썼더라도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시여야 그게 진짜 어린이시다. 아이다운 마음을 지켜주는 일만이 희망이다.


태그:#어린이시, #어린이신문, #연필, #황금순, #김순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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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말과 글쓰기 교육, 어린이문학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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