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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유채꽃 물결과 파아란 하늘은 말없이 아름답고 해맑다. 아름다운 슬픔이란 이런 것일까?
▲ 봉화산 입구에서 바라본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 주변 노란 유채꽃 물결과 파아란 하늘은 말없이 아름답고 해맑다. 아름다운 슬픔이란 이런 것일까?
ⓒ 윤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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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으로 가는 길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경남 김해시 진영읍에 있는 진영역에 내렸다. 역 구내는 조용하고 깨끗했다. 시간은 아침 8시. 동대구역에서 출발하는 무궁화호를 탄 뒤 꼭 1시간 만에 도착했다. 열차는 3칸짜리 미니열차로, 여행객의 정서에 가장 부합하는 소박하면서 아담한 분위기였다. 열차는 동대구→경산→청도→밀양→삼량진→한림정을 거쳐 진영에 도착했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광경은 대구에서 서울로 향하는 경부선 상행선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대구를 지나 경산 쪽으로 나오자 저 멀리 장중한 산줄기가 보이기 시작하더니, 이 산줄기는 계속 이어졌다. 경부선 상행선을 탔을 때라면, 추풍령 일원을 지날 때나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그래서인지 열차는 유독 터널을 많이 지났다. 봉우리가 뚜렷하고 높이 솟아 있는 차창 밖 산줄기는 때로는 멀어지다가 때로는 가까워지기를 반복하며 열차와 평행으로 달렸다. 산줄기가 멀어졌을 때는 평야가 비교적 넓어졌다. 산과 평야가 원근을 달리하며 우리 국토의 장중함을 실감케 했다. 여기에 5월의 신록과 곳곳에 피어있는 하얀 아카시아 꽃이 아기자기함을 더했다.

지금 창밖에 보이는 저 산은 오랜 역사의 시간 속에서 어떤 광경들을 목격했을까? 저 산은 훨씬 더 긴 세월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인간 역사를 굽어보고 있었을 것이 아닌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이 아름다운 국토에 도도히 흐르고 있는 비극적 역사가 스쳐지나갔다. 그렇다. 지금 열차가 지나가고 있는 이 길은, 역으로 따지면 임진왜란 시기 일본군의 북상로와 거의 일치하고 있었다. 새삼 우리 국토에 깃들어 있는 비극을 곱씹어보게 되자 차창 밖을 향한 시선은 더욱 떼려야 뗄 수 없었다.

경부선 상행선 주변 연로가 거의 대부분 논밭 일색이라면, 진영행 연로에서는 깻잎, 고추, 포도 등 다양한 작물들이 눈에 띄었다. 이윽고 열차는 밀양에 이르렀다. 밀양은 예전 도호부가 있던 곳이다. 여기서부터 열차는 양 옆의 낙동강 줄기와 평행을 이루며 달리기 시작했다. 강은 유유히, 열차는 여유롭게 함께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이 대목에서 옛 기록의 한 토막을 인용해본다.

(밀양의 형세는) 긴 내를 굽어 당기고 넓은 들을 평평히 머금고 있다. 큰 강이 비껴 흐르고 늘어 선 봉우리가 겹쳐 에워쌌다. 먼 봉우리는 하늘에 떠 있고, 긴 강은 뉘어 놓은 듯하다.(<신증동국여지승람>권26 경상도 밀양도호부)

이 말대로였다. 어느 덧 나타난 강이 산과 어우러지며 들판을 적시고 있었다. 이런 뒤 마침내 열차는 진영역에 이르렀다.

봉하마을의 평온함, 그리고 절절함

바위가 무너져 옆으로 누워있는 모습의 마애불을 본래의 모습대로 나오도록 촬영했다. 마애불은 고려시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 편안한 표정의 봉화산 마애불 바위가 무너져 옆으로 누워있는 모습의 마애불을 본래의 모습대로 나오도록 촬영했다. 마애불은 고려시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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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역에서 3, 40분 정도 기다려 봉하행 10번 버스를 탔다(8시 40분 출발). 버스는 2차선 도로를 계속 달렸다. 평범한 중소도시의 모습이 펼쳐졌다. 깨끗하고 조용해 잘 정비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공장지대를 지나 봉하입구에 들어서자 탁 트인 논과 산이 일자형으로 어우러진 전경으로 확 바뀌었다. 길가에 늘어서 있는 작은 노란 바람개비와 노무현 대통령을 그리는 현수막들이 이곳이 봉하마을임을 상징하고 있었다. 산 아래 논을 바라보며, 노 대통령이 논에서 일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 화면이 떠올랐다. 퇴임 후 농사를 지으며 소박한 삶을 살고자 마음먹고 또 그것을 실천한 분이 왜 그런 모욕과 비극을 당해야만 했을까. 역사가 너무 야속한 것이 아닌가. 우리는 언제쯤 이 야속한 역사의 고리를 끝낼 수 있을까.

아직도 잔인하다 싶을 정도로, 그의 반대세력들은 그에 대한 의도적인 폄훼를 멈추지 않고 있는 게 현실이다. 지난 대선 과정도 그랬다. 또 세상 사람들은 친노니 비노니 구별하는 편 가르기 식 논리에서 벗어날 줄 모른다. 하지만 이곳만큼은 너무나 평온했다. 슬픔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단지 숙연했다. 또 절절했다. 어쩌면 봉하마을은 너무나 비극적이기에 그 비극을 드러내지 않는 제의적 공간 그 자체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 4주기를 앞두고 마을 전체가 꽤 분주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차분한 분위기였다. 이곳 사람들에게 노무현 전 대통령을 향한 추도는 곧 일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마을을 상징하는 노란색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숙연함을 자아냈다.

가장 먼저 나오는 곳은 노무현 전 대통령 생가였다. 이 생가는 복원된 것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곳에서 태어나 8살까지 살았다고 했다. 생가 입구에는 이곳을 복원하게 된 경위와 함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생가 복원과 관련해 쓴 친필 서신이 표지판처럼 서 있다. 그 서신은 생가를 원형 그대로 복원하는 것보다 현재 보기에 아름답게 하는 것도 중요하며 그러므로 창조적으로 복원해줄 것을 부탁하고 있었다.

노 전 대통령의 사유방식을 엿볼 수 있는 작은 사례라 여겨졌다. 생가는 본채와 아래채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본채의 방이 매우 비좁아보였다. 가난한 살림을 말하는 듯했다. 또 눈길 닿는 곳곳마다 화분에 꽃과 화초를 심어두어 잘 꾸며져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본채 앞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일대기를 이야기 형식으로 재구성해 놓고 있었다.

그 중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중·고등학교 시절 부산지역 유지였던 김지태 선생이 세운 부일장학회의 도움을 학교를 다녔다는 대목이었다. 이는 지금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삶과 생애에 대한 공부가 현재의 권력에 대한 저항적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는 까닭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어쩌면 노무현의 삶 자체가 그런 것일 수 있겠다 싶었다. 부정의하고 비양심적인 권력과는 시간을 초월해 갈등하고 불화할 수밖에 없는 그런 삶 말이다.

생가를 나와 조금 걸어가자 묘역이 나왔다. 이 마을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묘역인 줄도 모르고 그냥 지나쳐버릴 지도 모르는 그런 곳이었다. 아이들, 어른들이 꾸준히 찾아오고 참배하고 있었다. 묘역은 국민 참여방식으로 조성되어 1만8천 명의 참여 및 기부로 이루어졌고, 추모의 글을 새겨 깔아놓은 박석이 총 1만5천 개라 했다. 박석마다 적힌 추모의 글들은 절절함이 오롯이 묻어났다. 여기에 새겨져 있는 글들은 그 자체로 뒷날 훌륭한 사료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조성된 슬픔의 바다에 깔려 있던 정서가 무엇인지, 또 왜 이곳을 찾는 참배객들이 꾸준히 지속되고 있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묘역은 '노무현다움'을 재현한 공간이었다.

봉하마을에서 살아 숨 쉬고 있는 노무현 정신

이 벽면에 게시되어 있는 대통령 생전의 사진과 언급들에서 우리는 노무현이 지향한 가치가 무엇인지 느낄 수 있다.
▲ 추모의집 앞에 세워진 노무현 대통령의 사진과 언급들 이 벽면에 게시되어 있는 대통령 생전의 사진과 언급들에서 우리는 노무현이 지향한 가치가 무엇인지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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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역 왼편으로 노란 유채꽃 물결을 곁으로 해 걸어가면 봉화산이 나온다. 봉화산의 여러 길 가운데 '대통령의 길'을 택해보았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다 한켠에 출현하는 평평한 작은 숲길이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뻐꾸기 소리, 그리고 어디선가 은은히 퍼져오는 찔레꽃과 여러 풀들의 향기. 그리고 소나무들. 이처럼 빛깔과 향기, 소리로 자연은 아름다움을 빚어내고 있을 뿐이었다.

아쉽게도 시간 관계상 산길을 다 걸어보지는 않은 채 중도에 돌아왔다. 그런 가운데 서산 마애불과 유사하다고 하는 봉화산 마애불을 볼 수 있었다. 바위가 무너져 왼쪽으로 누워있는 이 마애불은 오른손은 위를, 왼손은 아래를 향해 있는 형태로 중생의 두려움을 해소해주고, 소원을 들어주는 의미라 했다.

산을 내려와 묘역 건너에 있는 추모의집에 들렀다. 추모의집 앞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언급과 사진들을 게시한 벽면이 있어 찬찬히 읽어보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생각과 그의 정치역정이 무엇을 향해있었는지 짐작해 볼 수 있는 내용들이었다. 그리고 사진 가운데는 봉하마을 방문객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시민들에게 고개 숙이는 것이 이토록 자연스러웠던 대통령이 또 있을까 싶다. 그는 지도자가 시민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시민이 지도자를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진보의 가치를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우리 역사도 길게 보면 반드시 진보합니다. 진보의 가치는 연대라고 얘기하는데요, 그건 못난 사람끼리 연대도 있지만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의 연대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 저는 진보를 왕이 누리던 권리를 모든 시민이 함께 누리는 역사를 진보라고 생각합니다. 억압받던 사람이 자유를 누리게 되는 사회, 점차 그 자유가 모든 사람들에게 확산돼 나가는 사회의 변화를 저는 진보라고 생각하거든요. 사람을 중심에 놓고 생각해 보면 그렇습니다.

그런 면에서 그가 퇴임 후 마을을 가꾸며 "함께 사는 촌락공동체" 복원에 열중하리라 마음먹은 것은 어쩌면 가장 진보적인 길을 선택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태와 연대를 가치로 하는 공동체의 복원이야말로 그가 생각한 진보의 가치를 밑바닥에서부터 실현해나가는 과정일 수 있었다. 더욱이 대통령직 퇴임 뒤 이를 실천해나간다면 그 진보적 의미는 더욱 배가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추모의집 내부로 들어가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생애가 연도 별로 사진과 함께 정리되어 있었다. 그 중 1960년 초등학생 시절, 이승만 전 대통령 생일 기념 글짓기 때 백지를 냈다고 하는 일화가 눈길을 끌었다. 또 80년대라는 뜨거운 열정의 시기, 그 역시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의 변호를 맡고 부림사건의 변론을 맡으며, 그리고 노동운동에 참여하며 거리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른 열혈 투사였다. 또 생애 마지막 공개 강연의 제목이 '대북정책, 근본적 전환이 필요하다'였던 것도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적어도 노무현 전 대통령은 우리들의 마음을 울리는 게 있는 정치인이었고, 구체적인 비전과 주체적 신념이 있던 정치인이었다. 또 미래를 전망하며 고민하던 정치인이었다.

이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삶과 생애는 신화가 된 감마저 없지 않다. 물론 그의 시대에 대한 좀 더 냉철한 평가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지키려 했고 추구하려 했던 이상만큼은 세월이 꽤 지난 뒤에도 우리의 가슴을 울릴 것이다. 그것은 그가 가장 아름답고 절대적인 가치인 '인간'을 추구한, 수평적 인간주의자였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김해 여행은 17일에 다녀왔습니다.



태그:#김해, #진영 , #노무현 대통령, #봉하마을, #봉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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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시민. 사실에 충실하되, 반역적인 글쓰기. 불여세합(不與世合)을 두려워하지 않기. 부단히 읽고 쓰고 생각하기. 내 삶 속에 있는 우리 시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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