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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존 하퍼 (톰 크루즈 분)
▲ '망각'에 대한 도전 주인공 존 하퍼 (톰 크루즈 분)
ⓒ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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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가끔씩 '잊고 사는 게 더 낫다'고 하셨다. 살다보면 언젠가 당신 하신 말씀이 이해될 거라 했는데 서른 넘어보니 알겠다. 잊고 살아야할 것들이 자꾸만 쌓여간다. 지난 23일, 오랜 시간 준비했던 시험에서 '아쉽지만 통과하지 못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리고 영화 <오블리비언>(2013)을 봤다. 오블리비언(Oblivion), '망각'이란 뜻에 이끌려 이 영화를 선택했는데, 평일 오후 텅 빈 극장에 홀로 앉아 깨달았다.

'잊으려고 잊을 수 있는 게 아니구나.'

영화 <오블리비언>, 60년 뒤 지구는?

한마디로 폐허였다. 외계 세력의 침공으로 달이 파괴됐고, 핵전쟁이 일어났다. 지구는 더 이상 인류가 살 수 없는 땅이 됐다. 생존자들은 토성의 두 번째 달인 타이탄으로 이주했다. 지구엔 잭 하퍼(톰 크루즈 분)와 그의 파트너 빅토리아(안드레아 라이즈보로 분)만 남아 잔존 외계 세력을 제거하는 무인 정찰기(드론)를 관리했다. 이들 또한 보름 뒤면 지구를 떠난다.

그러던 어느 날, 잭 하퍼 앞에 정체불명의 우주선이 추락한다. 그 곳엔 지난 5년 동안 '모두 죽었거나 떠났다고 믿었던' 인간들이 잠들어 있었다. 문제는 그 중 하나가 매일 밤 꿈에서 만났던 묘령의 여인 줄리아(올가 쿠릴렌코 분)였다. 잭 하퍼는 그녀를 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잊어야만 하는' 과거에 대한 반기였다. 그가 믿어온 상식은 지구엔 더 이상 인간이 존재할 수도 존재해서도 안 되는 세계였다.

60년 뒤 지구는?
▲ 폐허가 된 지구 60년 뒤 지구는?
ⓒ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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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사건은 빠르게 흐른다. 잔잔했던 호수에 어디선가 날아온 돌멩이 하나가 큰 파장을 일으키듯, 잭 하퍼의 갈등은 시작됐다. 침략자라 믿었던 외계 세력이 살아남은 인류였고, 지구를 버려야 한다 말했던 사령부가 외계생명체로 드러났다. 잊었던 과거가 실제론 정반대의 현실이었다. 2077년 지구는 거짓과 왜곡이 진실을 덮고 있었다.

'망각'에 대한 거부

영화의 제목 '오블리비언(망각)'은 그 자체로 중요한 기준이 된다. 살아남은 인류는 망각하지 않은 기억이 삶의 이유다. 그래서 한 사람이라도 더, '함께' 기억해줄 사람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과거를 망각한 사람, 존 하퍼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남은 인류가 끊임없이 도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반면 망각한 자, 빅토리아는 지금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애초에 거부란 없다. 이들 뒤엔 지구를 침공한 거대한 세력이 있다. 이들이 옳다고 하면 그 자체로 진실인 것이다. 그래서 같은 모습, 같은 생각으로 재생산 된 존재만이 유일하게 허락 된 지구인이다.

존재의 이유가 된 '기억'
▲ 망각 속에도 기억은 핀다 존재의 이유가 된 '기억'
ⓒ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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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끝났지만, 쉽게 일어서지 못했다.  '다음 기회에 인연 이어갔으면 좋겠다'는 메시지가 다시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버지 말처럼 '잊고 사는 게 낫다'는 생각이 스쳤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기억을 지웠던 빨간 알약이 있었다면 당장 목구멍에 밀어 넣고 싶었다. 하지만 영화 <오블리비언>은 끝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두 명의 존 하퍼를 등장시키는 무리를 해가며,  절대 '망각해선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버지를 위한 변명

그렇다면 아버지는 왜 '잊고 사는 게 낫다'는 말씀을 하셨을까. 1951년 생 아버지는 6·25동란 중에 태어났다. 아래위로 8남매 중 딱 중간이다. 전쟁 속에 큰누이를 잃었고, 가난 속에 기술을 배워 평생을 기름때 묻히며 노동자로 살아왔다. 그러면서 깨달은 사실 하나는 시대의 거대한 흐름보단 가족의 안녕이 우선이라는 신념이었다.

그러니 '잊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아들을 보며 때론 '잊어도 된다' 말씀하신 거다. 가족과 행복하게 사는 게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나의 아버지, 동시대를 살았던 우리들의 부모세대는, 그렇게 아픔을 묻음으로써 잊고 살았을 거다. 감히 왜 잊고 사냐고 따져 물을 수 없었다.

그런데 재밌는 사실이 있다. 2013년 대한민국을 보고 있으면, 아버지 말씀과 비슷한 이야기가 들린다. '잊을 건 잊으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의혹에 대해선 '여직원 감금 논란'을 갖다붙인다. 초중고생이 즐겨찾는 온라인 커뮤니티 '오늘의 유머'는 종북집단이라 매도하고 있다. 이것이 진실이니 믿으라 강요하고 있다. 한 편의 희극을 보며, 영화 <오블리비언>의 외계 세력이 떠오르는 건 비단 나뿐일까.

하루하루 살기 너무 버거워 눈감고, 귀막고, 입닫으려 했다. 그런데 '잊으라'는 아버지의 말씀이 자꾸 역설처럼 들린다. 끝까지 살아남아 기억하라는 <오블리비언>의 존 하퍼가 떠오른다. 왜일까? '망각'하는 순간, 끝이라는 걸 알고 있다. 영화 <오블리비언>이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기억하라'고 말한 이유와 같다.


태그:#오블리비언, #톰 크루즈, #국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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