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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를 찾는 한국인이라면 꼭 가봐야 할 곳이 있다. 그것은 원폭낙하중심지공원에서 원폭자료관으로 올라가는 길목 오른쪽 구석에 있는 '나가사키 원폭 희생자 추모비'다. 반기문 유엔사무총장도 지난 2010년 8월 5일 이곳을 다녀갔다.

나가사키 원폭 조선인 희생자 추모비.
 나가사키 원폭 조선인 희생자 추모비.
ⓒ 전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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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침략과 강제병합 그리고 식민지 수탈정책으로 인해 토지와 생계수단을 잃은 수많은 조선인이 일본 땅으로 흘러 들어갔다. 또 일제의 침략전쟁이 아시아 태평양지역으로 확대되면서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숱한 조선의 청년들이 일본으로 강제동원되기 시작했다. 일제말기 일본에 있던 조선인의 수는 약 236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내무성경보국).

나가사키현 전체에서도 약 7만 명의 조선인이 있었고, 그중 약 3만여 명이 나가사키시와 그 주변지역에서 혹독한 강제노역을 하며 살고 있었다. 사키토, 하시마(군함도), 다카시마 등으로 대표되는 미쓰비시 광업의 탄광과 미쓰비시조선소·제강소·전기·무기공장 등 미쓰비시의 사업소 외에 도로, 방공호, 매립공사 등에도 조선인 노동자가 동원되었고, 인근의 가와나미조선소에도 조선인 노동자가 많았다. 노동자뿐 아니라 나중에 남편을 찾아 나가사키에 오게 된 아내와 그 가족 등이 함께 사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과거 미쓰비시의 탄광섬으로 조선인 중국인 강제동원의 역사를 간직한 섬 하시마(군함도).
 과거 미쓰비시의 탄광섬으로 조선인 중국인 강제동원의 역사를 간직한 섬 하시마(군함도).
ⓒ 전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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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 상공에서 폭발한 원자폭탄에 의해 약 2만 명의 조선인이 피폭되고 그중 1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한국원폭피해자협회'의 추산 통계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대표 다카자네 야스노리, 이하 인권을 지키는 모임)이 원폭투하 당시의 조선인 기숙사나 숙소, 작업장과 명부 등을 조사하고, 나가사키에 사는 재일조선인 피해자만이 아니라 같은 작업장에 있던 일본인 청취조사까지 해서 치밀하게 계산해낸 숫자이기도 하다.

이를 총집약한 실태조사보고서가 바로 <나가사키 조선인 피폭자 실태조사보고서-원폭과 조선인>(1집~6집)이다. 이 보고서는 나가사키역 맞은편 니시자카 언덕 위에 있는 '오카마사하루 기념 나가사키 평화자료관'에 가면 구입할 수 있다. 일본정부도 한국정부도 조선인의 피해 숫자와 구체적인 진상을 파악하지 못하는 가운데, 일본의 시민들이 나서서 가장 정밀한 실태조사를 한 것이다.  

다시 조선인 희생자 추모비 이야기로 돌아오면, 이 추모비는 1967년에 나가사키시 오우라의 성효원 지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던 조선인 피폭자의 유골 153구를 오카 마사하루 목사가 발견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오카 마사하루 목사는 '인권을 지키는 모임'의 설립자이자 1994년 서거하기 전까지 모임의 대표였던 인물로, 나가사키 시의원도 지낸 바 있으며, 열혈 인권운동가였다.

성효원에서 발견된 조선인 유골은 본래 '조선인연맹'이 보관하던 것인데, 1949년에 단체규제법 등 규제령에 따라 이 단체가 해산되면서 그 뒤에 성효원으로 이관된 것이라 한다. 오카 목사는 1968년 '조선인 원폭 순난 납골당 건설위원회'를 결성하여 모금활동을 개시했다.

그러나 1973년 유골이 목포로 반환됨에 따라 납골당 건설 추진을 중단하는 대신, 1979년 '나가사키 원폭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 건설위원회'를 결성하여 모금활동을 재개하고 곧이어 1979년 8월 9일 오전 7시 30분에 제막식을 거행하게 된다. 그때로부터 매년 8월 9일 원폭의 날 아침 7시 30분이면, 이 추모비 앞에서는 조선인 희생자를 기리는 조조 추모집회가 '인권을 지키는 모임' 주최로 열린다.

추모비의 뒤쪽에는 "강제연행 및 징용으로 중노동에 종사하던 중 폭사한 조선인과 그 가족을 위해서"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비석 앞에 설치된 한국어 안내판에는 "우리들 이름 없는 일본 사람들이 얼마간의 돈을 모아, 이곳 나가사키에서 비참한 생애를 보낸 1만 여 명의 조선 사람들을 위하여 이 추모비를 건설하였다"라고 적혀 있다.

이 조선인 추모비를 세우는 운동의 중심이 되었던 '인권을 지키는 모임'의 오카 마사하루 목사는 나가사키에 평화자료관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994년 여름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그 꿈을 직접 이루지는 못했다. 그러나 오카 목사와 함께 활동하던 지인들이 목사의 유지를 이어, 1년 뒤인 1995년 10월 '오카마사하루 기념 나가사키 평화자료관'을 건립하고 개관한다.

오카마사하루 기념 나가사키 평화자료관.
 오카마사하루 기념 나가사키 평화자료관.
ⓒ 전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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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아시아 침략과 전쟁, 조선인 중국인 강제연행과 일본군 '위안부' 제도, 남경대학살과 피폭 조선인에 대한 자료 전시를 하고 있는 이 자료관은 나가사키 시립 원폭자료관과 대조하여 주의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는 필수 견학 코스이다. 이 자료관에 대한 자세한 소개는 과거의 기사에서 상세하게 적은 바 있기 때문에, 본 지면에서는 생략하기로 한다(관련기사 : 조선인과 중국인, 왜 일본까지 와서 죽어야 했나?).

나가사키에 오면, 조선인 원폭희생자 추모비 앞에 꽃 한 송이 바치고 각자의 마음 속에서 고요하게 평화의 기도를 올리면 어떨까. 또 추모비에 새겨진 글과 안내판도 꼼꼼이 읽어보기 바란다. 우리가 잊고 있던 조선인 원폭희생자의 넋이 비록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는 받지 못했지만, 나가사키 시민의 뜨거운 사랑으로 조금이나마 위로 받고 잠들어 있지는 않을까. 불어오는 바람결에 그 선조들의 넋을 느낀다.

나가사키의 악명높은 강제동원 3대 탄광 '다카시마' '하시마' '사키토'

일부러 나가사키까지 갔는데, 누구가 다 둘러보는 시립원폭자료관이나 평화공원, 원폭낙하중심지공원과 관광지만 둘러보고 온다면 안타까운 일이다. 시간을 조금 더 낼 수 있다면, 노면전차 '오우라카이간도오리(오우라 해변길)' 정류장에 정차해, 그곳 항구에서 출발하는 '군함도 크루즈'를 타보자.

군함도(軍艦島)는 그 모습이 군함을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별칭으로 본래 섬의 이름은 하시마(端島)다. 하시마는 본래 무인도였으나 1810년에 석탄이 발견되고 1890년 미쓰비시가 이곳을 인수하여 탄광섬으로 본격 개발하면서 사람들이 모여들고 번영하기 시작했다. 이곳을 주목해야 하는 까닭은 이 좁은 섬이 강제로 끌려온 조선인 500명과 중국인 240명 정도의 노동자가 강제노동에 시달려야 했던 역사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하시마는 석탄 중에서도 최상급의 제철용 원료탄을 생산하는 우수한 해저 탄광섬으로, 일본의 근대화와 번영을 이끌어온 것으로 평가받는다. 나가사키시는 이곳을 '규슈, 야마구치 근대화 산업유산군'의 하나로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고자 운동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일본의 근대화뿐 아니라, 침략전쟁을 위하여 강제연행된 조선인, 중국인 노동자의 눈물이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현재 섬은 1986년 폐광 후 무인도가 되었다가, 2009년부터 정비된 코스에 한정하여 일반 관광객의 상륙을 허용하는 관광코스가 되었다. 아쉬운 점은 섬에 들어가더라도 안전상의 이유로, 안내인을 따라 정해진 코스로만 다녀야 한다는 것. 때문에 실제 사람들이 살았던 주거지역에는 들어갈 수 없다.

혹시 시간이 더 있다면, 역시 미쓰비시광업이 운영하던 탄광섬 다카시마에 가보는 것도 좋다. 다카시마의 탄광은 1974년 폐광되어, 지금은 조용한 풍광의 시골 섬이 되었지만 석탄자료관과 미쓰비시 재벌의 창립자인 이와사키 야타로의 동상 등이 건립되어 있다. 또 석탄자료관 앞에는 하시마의 모형도도 전시되어 있으니 견학하면 좋을 곳이다.

또 혼자서 찾아가기는 어렵지만, 오카 마사하루 기념 나가사키 자료관에 연락하여 미리 안내자를 소개받으면 다카시마의 수풀 속에 숨겨진 무연고자 노동자들의 묘지를 방문할 수 있다. 이곳은 다카시마에서 탄광사고로 죽은 이들, 바다에서 조난 당한 이들, 하시마에서 나온 사망자들 중 무연고자를 묻은 묘지인데, 그중에는 조선인의 것도 섞여 있다(관련기사 : 센닌즈카의 유골은 고향에 돌아가고 싶다).

본격적으로 나가사키 일대의 강제동원 역사현장이나 탄광지역을 답사하고 싶다면, 시내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반 거리에 있는 사키토에 가보는 것도 좋다. 사키토 탄광 역시 미쓰비시가 운영하였으며, 1943년경 7192명의 노동자 중 40% 가까이가 조선인과 중국인 포로였다고 한다. 미쓰비시가 운영하던 탄광섬 다카시마, 하시마, 사키토는 모두 '귀신섬'으로 불릴 만큼 광부의 생활과 노동조건이 비참했다고 한다. 동네 곳곳에 탄광주택이 폐허가 되어 남아 있었으나, 최근 경관 정비사업을 진행해 옛 역사를 말해주는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사키토역사민속자료관에서 석탄으로 번영했던 시절의 자료 등이 전시되어 있다.  

하시마는 출항부터 귀항까지 약 2시간 반, 다카시마는 반나절, 사키토 역시 반나절 이상을 생각해야 하니, 세 섬을 모두 방문하려면 이틀은 할애해야 한다. 시간이 없다면, 시내의 미쓰비시 스미요시 터널(관련기사 : 일본 비밀 터널공장에도 조선인 강제동원 있었다 )이나 노모자키의 군함도 자료관에 들러보는 것도 좋다. 시내에서 자동차로 30분을 달리면 자료관에 도착하니 섬에 직접 찾아가는 것보다는 시간이 덜 걸린다. 물론 노모자키의 군함도 자료관에는 조선인 중국인 강제연행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그것은 미리 공부하고 가자. 군함도 자료관에 가서 전시물도 보고, 영상물도 시청하고 야외 테라스에 나와 보면 군함도가 멀리 육안으로 보인다. 쉽게 빠져 나올 수 없는 그 망망대해 속 탄광섬에서 지옥같은 노동에 시달렸을 조선인 노동자들을 떠올려 보자(관련기사 : '조센징' 흔적 지우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태그:#나가사키, #오카 마사하루 기념 나가사키 평화자료관, #조선인 원폭피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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