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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 입은 사람 이야기>
 <옷 입은 사람 이야기>
ⓒ 바다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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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와 가죽과 모피 등을 얻고자 인간들이 멸종시킨 동물들은 셀 수 없이 많다. 심지어는 집안을 치장하는 장식물로 희생당한 동물들도 많다. 분홍머리오리가 멸종된 이유는 분홍머리가 아름다워서다.

바이슨은 인간들에 의해 멸종 직전까지 갔다가 간신히 살아남은 동물 중 하나. 아메리카 대륙에는 약 3000만에서 7000만 마리의 야생 바이슨(들소)이 살고 있었는데 유럽인들이 상륙한 후 급격하게 줄기 시작, 1889년엔 미국 전체를 통틀어 285마리만 남았다고 한다. 이유는 하나, 바이슨의 털이 인간들을 위한 모피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버도 바이슨처럼 인간들의 사치 때문에 멸종 직전까지 갔던 동물 중 하나. 몸집이 작은 설치류인 비버는 한때 유럽인들의 체면을 세워주는 중요한 패션 중 하나였던 펠트 모자를 위해 그 대략의 숫자조차 셀 수 없을 정도로 희생됐던 동물이다. 다행히 멸종 직전까지 갔다가 우연한 계기로 멸종을 간신히 피할 수 있었지만.

비버의 수난은 곧 사람의 수난으로

언제부턴가 유럽인들은 외출 시 반드시 모자를 쓰곤 했다. 남자들의 경우 맨 머리를 드러낸 채 밖으로 나가는 일은 극히 드물었고, 여자들도 모자를 쓰거나 가발이나 장신구로 머리를 치장해야만 외출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1500년대 전후, 비버의 털을 압착해 만든 펠트모자가 가장 이상적인 탄력과 윤기를 보인다는 사실이 알려진다. 그리 오래지 않아 부유층의 외출 필수품이 되고 만다. 그리하여 부유층을 위주로 유럽 전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한 이 상품은 점차 좀 더 다양한 계층으로까지 확산되기에 이른다. 

동시에 이제까지 조금씩 잡히던 비버가 눈에 띄는 즉시 털이 벗겨져 돈이 된다. 그렇게 유럽의 비버들은 씨가 마른다. 이때 유럽인들이 눈을 돌린 곳은 동부 일부를 제외하곤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았던 아메리카라는 신대륙. 유럽인들은 아직은 비버가 많은 아메리카 곳곳을 누비며 눈에 보이는 족족 비버를 잡아 가죽을 벗겨버린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일이겠지만 비버의 비극은 누군가에겐 최고의 축복이었다. 그중 하나가 아메리칸 모피의 설립자 '존 에스터'다. (줄임) 그가 평생 동안 벌어들인 돈이 1800년대 중반 당시 2000만 달러 정도라고 한다. 이 돈을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11100억 달러(132조원)가 되는데, 이는 미국 최고 부자인 빌 게이츠 재산의 두 배에 해당하는 엄청난 금액이다. 살아 있을 당시 미국 최고의 부자가 그였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백수십 년이 지난 현재까지 그의 후손들은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귀족 혹은 갑부로서 최상위 계층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거의 멸종 직전까지 내몰렸던 비버의 피 값으로 말이다." - <옷 입은 사람 이야기>에서

얼마나 많은 비버들이 희생됐는지 정확한 숫자는 파악하지 못한다.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말을 최초로 사용한 '제임스 트러슬로 애덤스(역사학자)'는 "초창기 미국을 지탱했던 힘의 원천은 성경과 비버이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비버의 희생은 컸다. 그런데 펠트 모자를 위해 비버들만 희생된 것은 아니다. 가난한 노동자들 역시 무참하게 희생됐으니 말이다.

십자군 전쟁으로 이슬람의 땅에 처음 들어가게 된 유럽인들은 이슬람의 많은 문물들을 접하게 되는데, 터키에서 낙타털처럼 거친 털도 부드러운 펠트로 만들 수 있는 '오줌에 담그는 비법'을 알게 된다. 이 비법을 알기 전까지 유럽인들은 다른 털보다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양털에 천을 덮은 후 비눗물을 부어 문지르는 방법으로 펠트를 만들고 있었다. 

비버 털로 만든 다양한 펠트 모자
 비버 털로 만든 다양한 펠트 모자
ⓒ 바다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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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담금 비법'은 머잖아 프랑스 햇터(털을 가공하는 사람)들에게 소문나고, 프랑스의 모든 펠트 공장 한가운데에는 예전의 물통 대신 커다란 오줌통이 놓인다. 그리고 햇터들은 일을 하기에 앞서 오줌부터 갈기어 오줌통을 채운 후 당시 무척 인기를 끌었던 비버의 털을 담가 펠트를 만들고, 그 펠트는 모자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매독 치료중인 햇터가 오줌을 싸면 펠트의 품질이 유독 좋아진다는 것이 알려진다. 매독환자에게 의사들이 처방한 '수은' 덕분(?)이었다.

이에 모자 공장들은 오줌을 비우고 그에 물을 채운다. 그리고 질산과 혼합한 수은을 붓고 이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비버의 털을 넣고 치대고 빨아 왔다.

얼마 전까지 암모니아 냄새가 가득했던 모자 공장의 좁은 공간엔 기화된 수은이 가득 찼고, 그 안의 모두는 입으로 코로 하루 종일 그걸 마셔댔다.

사실 수은을 이용한 매독 치료과정에서 적지 않은 수의 환자가 죽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만들기만 하면 판매된 것과 다름없을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미쳐있는 모자를 만드는데, 즉 돈에 미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노동자들은 진짜로 미쳐가기 시작한다. 활기찬 청년들이 어느 날부터인가 손을 바들바들 떨기 시작하더니 말을 더듬고 어제의 일조차 기억을 하지 못하게 되어 버린 것. 게다가 피부에는 물집이 생겨 부풀어 오르고 머리카락과 손톱이 빠지는 등 흉측한 몰골로 변해 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 위험한 물질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다만 술을 너무 많이 마셨기 때문이라며 공장에서는 이들을 해고했고, 수많은 노동자들은 원인조치 모르는 극심한 통증으로 죽어갔다. 그럼에도 수은 용제에 비버의 털을 담가 제조하는 이 캐로팅 제조 방식은 1900년대 중반에야 사라졌다고 한다.

패션의 사회문화사, 흥미롭네

멸종 위기에 처했다가 간신히 살아남은 비버와 수은에 중독되어 죽어간 수많은 노동자들의 죽음 그 비극은, 몇 백 년 동안 유럽과 아메리카 사람들 사이에 유행한 펠트 모자가 부른 것이었다. 남들보다 잘나 보이거나 절대 뒤처지지 않으려고 맹목적으로 유행을 쫓는 사치심과 허영, 걷잡을 수 없는 욕망이 부른. 

<옷 입은 사람 이야기>(바다 출판사 펴냄)는 이처럼 우리들이 입고 걸치는 모든 것들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통해 옷, 즉 패션과 관련된 인류의 역사와 풍습, 사회제도 등을 알 수 있는 책이다. 

책이 담고 있는 주제는 모두 19가지, 인간과 함께 해오며 인간들의 오만가지 욕망을 담은 패션 그 숨겨진 이야기들을 패션 때문에 희생된 동물들과 사람들, 어떤 패션들의 시작, 특별한 종교의 종교를 위한 패션, 정상과 비정상 그 기준을 혼란스럽게 하는 일련의 패션들, 금기와 자유를 위한 목소리가 된 패션 등 5장으로 나눠 들려준다.

외에도 ▲온몸을 남들이 볼 수 없게 가리는 고유복장과 달리 전구를 달거나 리모컨을 누르거나 박수를 치면 팬티의 후크가 풀리며 개방되는 속옷까지 있을 정도로 기발하고 화려한 시리아여성들의 속옷 문화 ▲몸과 속옷 사이에 아무것도 입을 수 없기 때문에 브래지어는 물론 생리대까지 착용해선 안 되는 몰몬교의 속옷 ▲시대와 여건에 따라 지금과 달리 눈에 잘 잘 띄도록 만들어진 군복 ▲처음에는 하층민 자녀의 상징이었던 교복 ▲한 여왕의 기호로 시작된 순백의 웨딩드레스 그 진실 ▲새가 자라는 새장부터 1미터 50센티미터에 이르는 머리장식을 했던 프랑스 여인들의 헤어 ▲여성들에게 상체에 아무것도 입지 않을 권리를 달라는 탑 프리와 정반대로 여성들에게 제발 상체에 옷을 입게 해달라고 벌였던 대규모 시위 등을 통해 인간의 역사와 함께 해오며 인간들의 오만가지 욕망을 가장 절실하게 담은 옷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전국 가슴골의 날!' 우리말로 바꿔 놓으니 어색하긴 하다. 내셔널 클리 비지 데이(National Cleavage Day)는 2002년부터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요하네스버그에서 시작된 행사인데, 3월 말이나 4월 초의 따뜻한 날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가슴골을 자랑하고 보는 일종의 여성 운동이란다. 이제는 전 세계적으로 확대되어 여성들에게 자기 몸에 대한 자부심을 표출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고 한다. 그런데 한 가지 입맛이 쓴 이유는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한 운동이 아니었다는 거다. 세계적인 브래지어 제조회사인 원더브라에 의해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탑 프리는 아니되 가슴골만 강조해 보여 주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당연히 여자들은 가슴골을 힘 있게 모아 준 브라를 착용하고 있다. 여성운동일까? 아니면 마케팅일까?" - <옷 입은 사람 이야기>에서

책이 담고 있는 이야기들은 오늘날 우리의 이성으로 쉽게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우스꽝스럽거나 기묘하거나 의아하기도 하다. 이런지라 옷과 패션에 얽힌 수많은 에피소드들을 읽는 그런 재미가 남다른 책이기도 하다. 그러나 마냥 재미로만 읽을 수 없는 것은 당시 사람들의 삶과 생활을 담고 있는 동시에 이처럼 뭔가 생각하고 어떤 자각을 하게 하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옷 입은 사람 이야기>| 이민정 (지은이) | 바다출판사 | 2013-04-08 | 정가 12,800원



옷 입은 사람 이야기 - 입고 걸치는 모든 것들에 숨겨진 역사

이민정 지음, 바다출판사(2013)


태그:#펠트, #헷터, #탑 프리, #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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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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