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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식 소반 2인분. 정확하게 한 젓가락 양만큼 나온다.
 한식 소반 2인분. 정확하게 한 젓가락 양만큼 나온다.
ⓒ 최육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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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7080세대예요? 386도 아니고, 도대체 우리는 뭐죠?"

1971년생 동갑내기 여자 실장이 묻는다. 뜬금없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 위 선배까지가 386이니까 우린 아니죠. 뭐, 386 끝줄에 살짝 걸쳤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근데 1970~80년대 초중고 시절을 보냈으니까 7080은 해당되지 않을까요?"

굳이 구분하자면 1971년생은 386세대도 7080세대도 아니다(그럼 1970년생은 어떻게 되는 거야?). 아무튼 1971년생인 우리는 1980년대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며 가슴 한편에 7080세대의 감수성을 간직하고 있다.

"실장님이나 나나 대학가요제 노래 좋아하고, 주윤발, 성룡 나오는 홍콩 영화 많이 보고 그랬잖아요. '요즘 노래' 별로 안 좋아하죠? 거 봐요, 영락없이 7080이라니까요."

1970~80년대는 암울하면서도 청춘의 소박한 낭만이 공존하던 시대로 기억된다. 통행금지, 장발단속, 미니스커트단속이 있었지만 군사독재에 맞서 민주화 시위를 하면서도 통기타와 팝송, 맥주, 소개팅, 기차여행이라는 낭만을 잊지 않았다.

10대 시절 빠졌던 <영웅본색>과 <천녀유혼> 그리고 소피 마르소

1971년생들은 한창 사춘기를 겪을 무렵에 장국영·주윤발의 <영웅본색>, 왕조현의 <천녀유혼>에 푹 빠졌고, MBC 대학가요제를 보며 <내가> <꿈의 대화> <바다에 누워> 등을 열창했다. 남자들은 세계미녀 3인방으로 불렸던 브룩 실즈, 피비 케이츠, 소피 마르소 중 한 명의 사진은 반드시 책받침으로 지니고 있었다. 나는 청순한 소피 마르소를 찜했었다.

가끔 이쑤시개 입에 물고 주윤발을 흉내 내던 그 시절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며칠 전 뜻하지 않은 곳에서 그런 추억에 잠겼다.

한식 소반은 봄향이 그윽한 꽃을 동무삼아 나온다.
 한식 소반은 봄향이 그윽한 꽃을 동무삼아 나온다.
ⓒ 최육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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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상차림이 꽃이에요, 꽃."

업무를 마치고 점심 식사를 위해 들린 경기도 파주의 한 음식점, 동갑내기 실장이 호들갑을 떤다. 아닌 게 아니라, 먹기 아까울 정도로 내오는 음식마다 깜찍하고 예쁘다. 한식은 한식인데 떡볶이 2개, 연근 2쪽, 떡 2조각, 전 2장… 2인분으로 내오는 음식은 정확하게 한 젓가락감이다. 한 입에 쏙, 꽃향기와 더불어 봄기운이 전해진다.

"그건 그렇고, 여기 주요리는 뭐예요?"
"보쌈하고 탕평채가 나오고 그 다음에 날치알 볶음밥하고 된장찌개가 나와요."

다양한 상차림에 이어 보쌈과 날치알 볶음밥(양은 많지 않다), 된장찌개로 식사를 마무리한다.
 다양한 상차림에 이어 보쌈과 날치알 볶음밥(양은 많지 않다), 된장찌개로 식사를 마무리한다.
ⓒ 최육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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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큼한 물김치와 구수한 누룽지로 입맛을 돋운 뒤 먹기 시작한 요리는 금방 동이 난다. 노란 때깔 물들인 배춧잎에 부드러운 돼지고기를 싸 먹으니 일품이다. 날치알 볶음밥과 조개젓갈을 구운 김에 싸 먹으면 날치알이 톡톡 터지면서 젓갈의 비릿한 바다 냄새를 입 안 가득 퍼뜨린다. 탕평채는 입에서 사르르 녹아내리며 자꾸 젓가락질을 재촉한다.

"식사하면 저기 건너편에서 원두커피를 무료로 마실 수 있어요. 호젓하게 분위기 한 번 잡아 볼래요?"

실장의 제안에 식당을 나와서 몇 걸음 걷자, '새마을상회'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호기심이 동해 가까이 다가가자마자, 웃음이 터진다.

과거를 추억하게 해 준 '새마을상회'
 과거를 추억하게 해 준 '새마을상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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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고 싶은 여자? 당신이 갖고 싶은 여자는? 제목이 상당히 자극적이네요. 아, <아파트를 갖고 싶은 여자>구나. 아파트를 못 봤네."

아릿한 추억을 되새겨주는 '새마을상회'

새마을상회 안에는 추억을 자극하는 물건들이 가득하다. 나도 남자라서 그런가.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눈이 간 것은 삼촌 몰래 훔쳐보곤 했던 <선데이서울>. 그 시절 여배우들은 <선데이서울> 표지를 장식해야 톱스타로 인정을 받았다. 잡지를 흔들면 수영복을 입고 찍은 화보가 주르륵 펼쳐졌었다. 표지를 보니 간통, 불륜, 스캔들, 결별 등 자극적인 것 투성이다.

어른들은 1주일에 한 번 <선데이서울>에, 아이들은 한 달에 한 번 <어깨동무>에 빠졌었다.
 어른들은 1주일에 한 번 <선데이서울>에, 아이들은 한 달에 한 번 <어깨동무>에 빠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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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동무>는 놀 거리가 별로 없던 시절, 큰 기쁨을 준 고마운 존재다. 물론 연재만화를 보기 위해서는 무려 한 달을 참아야 했지만. 스마트폰으로 다양한 웹툰과 게임을 쉽고 빨리 즐기는 요즘 아이들은 그 기다림의 고통을 절대 모른다.

분유통에 새겨진 익숙한 아기 얼굴, '아름다운 메리너' 도시락통, 세월의 때가 그대로 묻어나는 학생 가방과 초등학교 교과서, 주사위 하나만 있으면 몇 시간이고 놀 수 있던 뱀주사위 놀이, 많이 따면 친구들에게 팔곤 했던 딱지, 누구나 왕자님으로 만들어주던 왕자파스, 어느 집이고 텔레비전 위에 놓였을 법한 못난이 3형제 인형 등 새마을상회는 잠시 시간을 거스른다.

남양분유와 새마을상회 내부.
 남양분유와 새마을상회 내부.
ⓒ 최육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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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프던 시절 누군가 따뜻한 밥을 지어먹었을 유니버셜 밥통과 추운 겨울 자신의 심지를 살라 온기를 전해줬을 우주석유풍로 역시 세월의 찌든 때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1978년 발매된 심수봉의 <그때 그 사람> 앨범과 1981년 나온 조용필의 <미워 미워 미워> 앨범 속 사진을 보니 세월의 무상함이 느껴진다. 이제는 두 사람 모두 국민 가수 반열에 올랐으니 말이다.

앙증맞은 이용 수칙과 훈훈한 인심이 느껴지는 양심 계산대

새마을상회 이용 수칙과 양심계산대. 주인장의 익살과 훈훈한 인심이 느껴진다.
 새마을상회 이용 수칙과 양심계산대. 주인장의 익살과 훈훈한 인심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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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상회 안에는 주인장이 없다. 대신 "씨씨티비가 있다, 지켜보고 있다(물론 거짓말)"는 앙증맞은 이용 수칙이 붙어 있고, 훈훈한 인심이 느껴지는 "가격표가 있는 것만 구매 가능하다"는 양심 계산대가 있을 뿐이다.  

새마을상회도 그렇지만 '메주꽃 소반'이라는 음식점 이름이 무척 정겹다. 차림표 한쪽, 메주꽃에 대한 설명이 있다.

"메주꽃은 메주를 건조시키는 과정에서 흰색 또는 회색의 곰팡이가 핀 상태를 말하는데 흔히 잘 익은 메주를 '메주꽃이 피었다'고 말합니다."

곰팡이는 메주를 만난 탓에 꽃이 되었다. 참으로 행복한 곰팡이가 아닐 수 없다. 그나저나 이런 감상에 빠지는 걸 보면, 나는 분명히 7080세대와 정서가 통하는 것 같다.

정갈한 한식 한 상 차림에 추억의 과거 여행까지 필요한 경비는 1인당 1만5000원. 이 정도면 몸과 마음이 모두 만족스런 음식 여행이다. 둘러보니 이날 이곳을 찾은 손님은 99%가 여자들이다. 평일 오후, 누군가는 한가롭다고 부러움과 시샘 어린 눈초리를 보낼지 모른다. 하지만 '빠름~빠름~빠름'의 시대, 가끔은 삶에 작은 쉼표를 찍으며 과거를 추억하는 것도 좋다. 맛있는 음식과 함께라면 말할 필요도 없다.

곰팡이는 메주를 만나 꽃이 되었다.
 곰팡이는 메주를 만나 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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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메주꽃, #새마을상회, #7080, #선데이서울,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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