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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대중가요의 역사를 잘 설명해주고 있는 두 권의 책. 왼쪽은 박찬호 저 <한국가요사> 1권, 오른쪽은 선성원 저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대중가요>이다. 이 기사는 두 권의 책을 '크게' 참조했다. 이 분야에 관심있는 분들이 꼭 읽어야 할 필독서라고 생각된다.
 우리나라 대중가요의 역사를 잘 설명해주고 있는 두 권의 책. 왼쪽은 박찬호 저 <한국가요사> 1권, 오른쪽은 선성원 저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대중가요>이다. 이 기사는 두 권의 책을 '크게' 참조했다. 이 분야에 관심있는 분들이 꼭 읽어야 할 필독서라고 생각된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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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노래 중에는 잠깐 불리다가 사라져버린 갈래가 있다. '1900년을 전후하여 애창된 서양 곡조의 우리나라 노래' 정도로 정의되는 창가(唱歌)가 바로 그 주인공. 그렇게 창가는 어느 날 갑자기 태어나 대중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지만 저녁노을처럼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창가는 한국문학사에 견주면 신체시와 신소설 정도의 운명을 지녔던 음악사적 존재인 셈이다.

창가는 '부를 창(唱)'에 '노래 가(歌)'로 이루어진 한자어이다. 그러나 창가가 '부르는 노래'라고 해서 '부를 수 없는 노래'인 금지곡의 반대어인 것은 아니다. 우리말로 나타내면 '노래'가 되지만 다른 노래들과 구별하기 위해 굳이 한자어로 표현했을 뿐 '창가' 두 글자에 특별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지는 않다는 말이다.

'창가'는 일본말 '쇼카'를 그대로 옮겨쓴 용어

불행하게도 창가는 일본의 음악용어를 그대로 옮겨와 쓴 국적불명의 단어이다. 1872년 당시 정부는 일본식 소학교를 세우면서 음악 교재에 <창가독본>이라는 이름을 붙여 보급했는데, 그것이 고유명사로 굳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는 19세기 후반 일본에서 쓰이기 시작한 '쇼카(唱歌)'를 그대로 우리땅에 적용한 행위였으므로 문화적 주체성을 잃은 사례의 하나였다.

하지만 당시 창가에는 식민지로 전락하기 직전 무렵에 많이 애창된 민족의식 고양 주제의 노래가 많았다. 즉, 독립, 애국, 자강 등을 갈망하는 우리 민중이 창가를 열창하는 모습은 역사적으로 볼 때 역설 그 자체였다. 머리와 몸은 민족주의를 부르짖고, 겉은 일본 옷으로 치장한 꼴이었다. 

당연히 창가의 곡조는, 신소설이 서양식 서사의 형식을 받아들인 것처럼, 서구의 악곡으로 이루어졌다. 내용을 이루는 노랫말은 예전부터 있던 가사를 줄인 것, 민요를 바꾼 것, 찬송가 등 다양했지만, 곡을 담는 형식은 한결같이 서구의 것이었다.

우리 대중가요의 중요한 뿌리 중 하나는 찬송가였다.
 우리 대중가요의 중요한 뿌리 중 하나는 찬송가였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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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가의 태동과 확산은 1880년대 후반부터 급속히 퍼지기 시작한 찬송가의 영향으로 흔히 이해된다. 그 탓에, 창가로 태동된 <애국가>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불린 장소도 교회로 알려지고 있다. <애국가>는 1896년 음력 7월 25일 고종 탄신일을 맞아 열린 새문안교회 경축예배에서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선을 보였다.

'새문안교회 <애국가>'가 만들어진 때는 1893년이었다. 시카고 박람회에 국악인들을 파견하게 되었는데 '국가' 없이는 곤란하였으므로 급조를 하였다. 그런 우여곡절 때문인지, 찬송가 468장 <피란처 있으니>의 곡에 맞춰 붙여진 당시 애국가의 노랫말을 지은 작사가는 누구인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높으신 상주(上主)님 / 자비론 상주님 / 긍휼히 보옵소서
이 나라 이 땅 / 지켜 주옵시고 / 오 주여 이 나라 / 보우하소서
우리의 대군주 폐하 / 만세 만세로다 / 만만세로다
복되신 오늘날 / 은혜를 내리샤 / 만수무강케 / 하여주소서

현행 <애국가>는 독일에서 처음 제창되었다. 사진은 베를린의 카이저빌헬름교회로, 세계대전에 비참하게 부서진 모습을 독일 정부가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정책'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 왼쪽 상단에 현대식으로 건축한 새 교회 건물의 일부가 보인다.
 현행 <애국가>는 독일에서 처음 제창되었다. 사진은 베를린의 카이저빌헬름교회로, 세계대전에 비참하게 부서진 모습을 독일 정부가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정책'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 왼쪽 상단에 현대식으로 건축한 새 교회 건물의 일부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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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아래아'가 붙어 있지만 대략 현대어로 옮겨본 <애국가>의 내용은 요즘 우리가 부르는 <애국가>와는 내용이 많이 다르다. 당연한 일이다. 그 이후 애국가는 40여 종류나 더 만들어져서 널리 애창되었는데,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한 선수들이 처음 부른 것으로 알려져 있는 안익태 작곡의 현행 <애국가>는 1935년에 태어났다. 하지만 이 애국가 역시 작사가가 윤치호, 안창호, 민영환 등등 여러 사람으로 추정될 뿐 정확하게 확인되지는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현행 <애국가>의 노랫말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 개인이 창작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고전소설에 판본이 다른 여러 작품이 존재하듯이 애국가도 그러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1899년 6월 29일자 <독립신문>에 실려 있는 <무궁화 노래>가 증언해준다.  배재학당 방학식 때 학생들이 부른 이 노래의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 /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가 현행 애국가와 너무나 동일하기 때문이다.

<학도가>를 애국가로 생각한 대중들

그런가 하면 당시에는, <애국가>라는 이름으로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내용상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져 널리 애창된 노래들도 많았다. 그 중의 하나가 <학도가>로, 최남선이 쓴 시를 일본노래 <철도창가> 곡조에 얹어 불렀다.

학도야 학도야 청년 학도야
벽상의 괘종을 들어 보시오
한 소래 두 소래 가고 못 오니
인생 백년 가기 주마(走馬) 같도다 (중략)

학도야 학도야 생각하여라
우리의 할 일이 그 무엇인가
자나 깨나 쉬지 말고 학문 넓혀서
좋은 사람 되는 것이 이것 아닌가

서울역. 일제 때 동경유학생들은 이곳 역사 앞에서 <학도가>를 부르며 애국의 의지를 되새겼다.
 서울역. 일제 때 동경유학생들은 이곳 역사 앞에서 <학도가>를 부르며 애국의 의지를 되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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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래를 널리 퍼뜨린 사람들은 동경 유학생들로, 방학이 끝난 뒤 일본으로 돌아갈 때 남대문역(현 서울역) 광장에서 목이 터져라 합창했다. 그런데 남대문역 동경유학생들이 목놓아 부를 때든, 뒷날 국민적 애창곡이 되어 삼천리 방방곡곡에 널리 열창될 때든, 부르는 이들의 심정은 다들 애국가를 제창하는 마음이었다. <학도가> 역시 역설적이기는 창가의 일반적 신세와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이후 창가는 1926년에 나온 <사의 찬미> 등 세칭 '유행가'에 밀려 음악계를 떠났다. 현대시와 현대소설이 신체시와 신소설의 등을 떠밀어 내었듯이, '레코드'를 타고 흐르는 서양 음악의 공세는 창가의 목숨을 끊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애국가, 학도가, 사의 찬미, 모두 외국곡 차용

1926년 7월 중순, 윤심덕은 이바노비치의 <도나우 강의 푸른 물결>에 직접 우리말 가사를 붙이고 노래까지 불렀다. 그렇게 만들어진 <사의 찬미>는 뒷날 '우리나라 최초의 인기 유행가'라는 평을 얻게 되지만 정작 윤심덕 본인은 그것을 알지 못한 채 죽었다. 그녀는 이 노래가 '대히트'를 하기 이전인 8월 4일, 극작가 김우진과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한탄하면서 현해탄에 몸을 던져 동반 정사했다. 그 사건 탓에 <사의 찬미>는 더 더욱 유명해졌다.

광막한 황야에 달니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대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차즈려 가느냐

'검은 물'이 흐른다고 해서 현해탄이라는 이름을 얻은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의 바다에 윤심덕은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비관하여 애인과 동반 자살하였다. 사진은 대마도가 보이는 현해탄의 검은 물결.
 '검은 물'이 흐른다고 해서 현해탄이라는 이름을 얻은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의 바다에 윤심덕은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비관하여 애인과 동반 자살하였다. 사진은 대마도가 보이는 현해탄의 검은 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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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들은 그녀의 죽음을 대서특필했다. 그렇지 않아도 현대과학문명의 이기인 레코드의 위력을 등에 업고 있었고, 기미년 독립운동의 실패 이후 사회 전체에 음울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는데다, 통속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극단적 정사(情死)까지 겹치자 <사의 찬미>는 더 더욱 엄청난 인기몰이를 했다.

창가도 유행가도 같은 대중음악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사의 찬미>를 비롯한 유행가의 발로는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우리는 전진하다'면서 호기롭게 소리를 치는 기세였다. 하지만 이미 시대에 맞지 않는 창가는 대중들로부터 외면을 받아 잊혀지는 '불우'한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의 찬미> 역시 외국곡에 우리말 가사를 붙인 노래였다. 찬송가류의 초기 애국가들, <학도가> <사의 찬미> 등등 초창기 대중적 노래들은 태생적으로 우리의 정체성을 지켜낼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렇게 우리의 대중음악이 찬송가와 외국 민요로 시작된 것은 참으로 민족사적 불행이었다.  

일본말 '유행가'를 여전히 사용하고 있는 우리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가? 우리는 지금 세계적으로 경제력 10위권을 자랑하는 나라에 살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일본말인 '유행가'를 그냥 사용하고 있다. 어째서 그럴까? 답을 알 수가 없다.


태그:#대중가요, #유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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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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