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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아래 헌재)의 구성원 다양성 후퇴와 보수화에 대한 우려가 점점 현실화되고 있다. 공안검사 출신 헌법재판소장이 지명된데 이어 새로 지명된 헌법재판관은 '삼성 관리 판사' 의혹이 일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이후 네 번(중도 낙마한 이동흡 후보자 포함) 진행됐던 헌재 인선에서 한 명은 검사 출신(박한철)을, 세 명은 판사 출신(이동흡·서기석·조용호)을 지명했다. 박 대통령은 지난 21일 공석인 헌법재판소장에 임기가 약 4년 남은 박한철 헌법재판관을 끌어올렸고, 22일로 임기를 마치는 송두환 헌법재판관 후임까지 총 두 자리가 비는 곳에 서기석 서울중앙지법원장과 조영호 서울고법원장을 후보자로 세웠다.

이로써 아직 국회 인사청문회가 남아있기는 하지만, '박근혜 시대'를 관통할 5기 헌재의 진용이 모습을 드러냈다. 보수-공안 우위, 판검사 일색, 50~60대 남성 압도, 서울대 과점이 핵심적인 특징이다.

박한철 헌재소장 후보자, 미네르바 사건 등 공안 사건 지휘

헌법재판소장으로 내정된 박한철 헌법재판관이 지난 21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유신헌법 53조, 긴급조치 1·2·9호에 대한 선고를 내리기 위해 자리에 앉아 있다.
▲ 박한철 헌법재판소장 내정자 헌법재판소장으로 내정된 박한철 헌법재판관이 지난 21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유신헌법 53조, 긴급조치 1·2·9호에 대한 선고를 내리기 위해 자리에 앉아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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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철 헌법재판소장 후보자는 대검찰청 공안부장 출신이다. 지난 1988년 헌재가 생긴 이래 검사 출신, 그것도 공안검사 출신이 헌재소장에 지명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박 후보자는 재직 당시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와 미네르바 사건 등 주요 공안사건 수사를 지휘했다.

헌법재판관으로서는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울광장 추모 행사 당시 광장 전체를 전경버스로 에워싼 일에 대해 재판관 7-2로 헌재가 위헌 결정을 내릴 때, 이미 낙마했던 이동흡 헌법재판관과 함께 합헌 의견을 냈다. 소셜네트워크(SNS) 등 인터넷 매체를 이용한 선거운동을 금지하는 공직선거법 조항에 한정 위헌 판결이 내려질 때도 그는 합헌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에 등장한 서기석 후보자

지난 21일 헌법재판관으로 내정된 서기석 서울중앙지방법원 법원장.
 지난 21일 헌법재판관으로 내정된 서기석 서울중앙지방법원 법원장.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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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석 헌법재판관 후보자는 서울 형사지방법원 판사 시절인 1990년 9월 고 김근태 전 장관에게 징역 3년에 자격정지 1년을 선고했다. 당시 전민련 집행위원장이었던 김 전 장관은 민자당 창당 반대시위를 주도한 혐의(집시법 위반)로 7년을 구형받은 상태였다. 또한 서 후보자는 서울고법 부장판사 때인 2008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에버랜드 전환사채(CB) 편법증여 혐의와 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BW) 저가발행 혐의 2심 재판에서 모두 무죄 판결했다. 이 판결 중 삼성SDS BW 부분은 대법원에서 뒤집어졌다.

주목할 점은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 법무팀장 출신으로 삼성 비자금을 폭로했던 김용철 변호사가 낸 책 <삼성을 생각한다>에 서 후보자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김 변호사는 삼성 에버랜드가 운영하는 안양 베네스트 골프장에서 서기석 판사와 함께 골프를 쳤다고 증언했다. 국내 최고의 골프장으로 평가받는 안양 베네스트는 삼성 고위 임원의 초청이 없으면 라운딩을 할 수 없는 곳으로 '대한민국 1%'만 이용한다고 알려져 있다.

김 변호사는 책에서 당시 황백 제일모직 부사장이 서 판사를 관리했다며,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적시했다.

"안양 베네스트 골프장에서 함께 골프를 친 판사 중에 서기석이 기억에 남는다. 2002년께 몇몇 검사들과 서기석 판사가 나와 함께 골프를 쳤다. 훗날 서기석은 내 양심고백을 계기로 열린 삼성 비리 사건 2심 재판을 맡아서 삼성에 면죄부를 줬다. 서기석과 자주 어울렸던 황백은 사장이 됐다." (<삼성을 생각한다> 175쪽)

9명 전원 고위 판검사 출신... 재야 법조인은 한 명도 없어

헌법재판소장으로 내정된 박한철 헌법재판관을 비롯한 재판관들이 지난 21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유신헌법 53조, 긴급조치 1·2·9호에 대한 선고를 내리기 위해 자리하고 있다.
▲ 헌법재판소, 유신헌법과 긴급조치 위헌 여부 선고 헌법재판소장으로 내정된 박한철 헌법재판관을 비롯한 재판관들이 지난 21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유신헌법 53조, 긴급조치 1·2·9호에 대한 선고를 내리기 위해 자리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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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회장을 지낸 재야 변호사 출신 송두환 재판관의 후임 자리에 박 대통령이 현직 판사 2명을 채움으로서 헌법재판관 9명은 변호사 출신은 한 명도 없이 전원 고위 판사·검사들로 채워지게 됐다. 검사 출신이 2명(박한철·안창호)이고 판사 출신이 7명(이정미·김이수·이진성·김창종·강일원·조용호·서기석)이다.

이는 15년 이상 경력의 판사·검사·변호사로 자격 요건을 제한하고 있는 헌법재판소법을 감안하더라도 명백히 퇴행이다. 지금까지는 헌재 구성의 다양화 측면에서 자격 요건에 학자 등도 포함시켜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는데, 이제는 그마저 배부른 소리가 됐다. 판사 출신은 대법관 추천(3명)으로 충분하고 대통령 몫(3명)은 능력있는 재야 법조인을 발굴해야 한다는 법조계와 학계·시민사회의 공감대도 간단히 무시된 상황이다.

또 박 대통령은 최초의 여성 대통령임에도 네 번의 선택에서 한 번도 여성을 지목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헌법재판관 중 여성은 여전히 한 명(이정미)뿐이다. 재판관 중 여성의 비중이 절대적으로 낮은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여성 대통령 시대여서 더욱 도드라지는 상황이다.

9명 중 6명이 서울대를 나왔다는 점, 5명의 출신지가 영남인 점도 다양성과는 거리가 멀다. 이념성향·성별·출신·지역·학교 등 어떤 기준으로 보더라도 사회의 주류·기득권층의 목소리를 넘어 소수자의 이익을 대변하고 다양한 의견을 결정에 반영하리라는 기대를 품기 힘든 인적 구성이다.

헌재 구성의 다양성 후퇴 우려는 이명박 정부 후반 5명의 헌법재판관이 교체되면서 제기된 바 있다. 이번 박 대통령의 인사는 그에 강력한 마침표를 찍었다는 평가다. 헌법재판소장으로 내정된 박한철 후보자도 이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그는 지난 21일 기자간담회를 통해 "헌법재판의 특성상 다양한 배경을 가진 분이 오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데 동감한다"며 "앞으로 그런 부분을 염두에 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인사청문회를 통과하면 현 구성은 2017~2018년이 돼야 변화가 가능하다.

시민사회에서는 "앞으로는 되도록 갈등 사안에 대해 헌재로 가져가지 말아야 한다, 가봐야 뻔하다"는 조소 섞인 탄식까지 나오고 있다. 점점 다양화되는 사회에서 더욱 동질해진 헌재가 넘어야 할 벽이다. 헌재 인사 발표가 난 지난 21일, 대법원에서는 이미 2010년 내린 긴급조치에 대한 위헌 판단을 헌재는 3년이나 지나서야 결정해 발표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태그:#헌법재판소, #박한철, #서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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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선임기자. 정신차리고 보니 기자 생활 20년이 훌쩍 넘었다. 언제쯤 세상이 좀 수월해질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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