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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보강 : 21일 오후 5시 21분]

헌법재판소장으로 내정된 박한철 헌법재판관(맨 왼쪽)을 비롯한 재판관들이 21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유신헌법 53조, 긴급조치 1·2·9호에 대한 선고를 내리기 위해 대심판정에 들어서고 있다.
▲ 헌법재판소, 유신헌법과 긴급조치 위헌 여부 선고 헌법재판소장으로 내정된 박한철 헌법재판관(맨 왼쪽)을 비롯한 재판관들이 21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유신헌법 53조, 긴급조치 1·2·9호에 대한 선고를 내리기 위해 대심판정에 들어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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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는 21일 박정희 전 대통령에 의해 공포됐던 긴급조치 제1호, 제2호, 제9호에 대해 전원일치로 위헌 결정을 내렸다. 지난 1974년과 75년에 걸쳐 차례로 긴급조치 1, 2, 9호가 공포된 지 약 40년만이다.

긴급조치에 의해 복역했던 오종상씨 등 5명이 지난 2010년 2월 헌법소원을 제기한 이후 헌법재판소가 결정을 내리기까지 3년이 걸렸다.

헌법재판소는 결정문을 통해 긴급조치 1, 2, 9호가 "입법목적의 정당성이나 방법의 적절성을 갖추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죄형법정주의에 위배되고, 헌법개정권력의 행사와 관련한 참정권, 표현의 자유, 영장주의 및 신체의 자유, 법관에 의한 재판을 받을 권리 등 국민의 기본권을 지나치게 제한하거나 침해하므로 헌법에 위반된다"고 판시했다.

다만 헌법재판소는 긴급조치의 근거규정이었던 유신헌법 제53조에 대해서는 "긴급조치를 발령할 수 있는 근거규정일 뿐 당해사건 재판에 직접 적용되는 규정이 아니"라면서 판단을 비켜갔다.

하지만 ▲헌재의 기능이 법률의 위헌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에 헌법 조항 자체에 대한 판단은 전례가 없다는 점 ▲이번 위헌 판결이 헌재판관 8명(1명은 궐석 상황) 전원의 판단이었다는 점 ▲위헌성 심사 기준을 이미 폐기된 당시의 헌법(유신헌법)이 아니라 현행 헌법으로 삼은 점 ▲위헌 판단의 이유가 헌법의 근본원리인 국민주권주의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국민의 기본권 등을 광범위하게 침해했기 때문이라고 본 점 등으로 볼 때, 이번 판결은 내용적으로 유신헌법 자체에 대해서도 사실상 공식적인 사법적 파산 선고를 내린 것으로 볼 수 있다.

대법원에 이어 헌법재판소 판단까지 나옴에 따라 국민의 기본권을 심각히 유린했던 긴급조치에 대한 사법적 공식 판단이 완전히 일단락됐다. 이에 따라 현재 법원에 계류된 많은 긴급조치 관련 재심 사건들이 무죄가 나올 가능성이 높아졌다. 또한 이미 재심 무죄를 받은 사건들도 국가배상법에 의해 배상 신청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긴급조치로 인한 피해자 규모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만으로도 1500여명에 이른다. 지난 2010년 12월 16일 대법원은 대법관 전원일치로 오씨의 모든 혐의가 무죄라고 선고하면서, 긴급조치 1호가 위헌이라고 선고한 바 있다.

헌법재판소 "헌법 개정은 주권자인 국민이 보유하는 가장 기본적 권리"

헌법재판소가 박정희 전 대통령에 의해 공포됐던 긴급조치 제1호, 제2호, 제9호에 대해 전원일치로 위헌 결정을 내린 가운데, 21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유신·긴급조치 피해자 대책위원회 소속 회원들이 헌재 판결에 대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날 이들은 헌재의 결정에 환영하면서도, 유신헌법 제53조에 대한 위헌을 가리지 않은 것은 유감이라고 밝혔다.
▲ 긴급조치 위헌 결정에 환영하는 유신 피해자 헌법재판소가 박정희 전 대통령에 의해 공포됐던 긴급조치 제1호, 제2호, 제9호에 대해 전원일치로 위헌 결정을 내린 가운데, 21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유신·긴급조치 피해자 대책위원회 소속 회원들이 헌재 판결에 대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날 이들은 헌재의 결정에 환영하면서도, 유신헌법 제53조에 대한 위헌을 가리지 않은 것은 유감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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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헌법재판소 판결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가 있는 부분은 긴급조치 1, 2, 9호에 대한 위헌성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을 72년 제정됐던 당시 유신헌법으로 본 것이 아니라 87년에 개정된 현행 헌법으로 본 점이다. 긴급조치의 헌법상 근거 조항이었던 유신헌법 제53조 제4항에는 "긴급조치는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아니한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따라서 유신헌법을 기준으로 긴급조치의 위헌성을 따지면 위헌 판단이 곤란해진다.

하지만 헌법재판소는 "이미 폐기된 유신헌법에 따라 이 사건 긴급조치들의 위헌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유신헌법 일부 조항과 긴급조치 등이 기본권을 과도하게 침해하고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를 훼손한다는 반성에 기초하여 헌법 개정을 결단한 주권자인 국민의 의사와 기본권 강화와 확대라는 헌법의 역사성에 반하는 것으로 허용할 수 없다"고 밝혔다.

헌법재판소는 "헌법을 개정하거나 폐지하고 다른 내용의 헌법을 모색하는 것은 주권자인 국민이 보유하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로서, 가장 강력하게 보호되어야 할 권리 중의 권리에 해당한다"면서 "헌법의 근본원리인 국민주권주의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비추어 볼 때 그 목적의 정당성을 인정할 수 없고, 기본권 제한에 있어서 준수되어야 할 방법의 적절성도 갖추지 못하였다"면서 긴급조치의 위헌 이유를 밝혔다.

헌법재판소 관계자는 "이번 판결에서 명시적으로 유신헌법에 대한 판단은 배제되어 있다"면서도 "내용적으로는 유신헌법에 대한 판단도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유신헌법 제53조와 긴급조치 1·2·9호는 무엇?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21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유신헌법 53조, 긴급조치 1·2·9호에 대한 위헌 결정을 지켜본 뒤 헌법재판소를 나서고 있다.
▲ 긴급조치 위헌 결정 지켜본 백기완 소장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21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유신헌법 53조, 긴급조치 1·2·9호에 대한 위헌 결정을 지켜본 뒤 헌법재판소를 나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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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헌법 제53조는 긴급조치에 대한 근거 규정으로, 대통령의 판단에 따라 헌법이 규정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잠정적으로 정지하거나 정부나 법원의 권한에 대해 긴급조치를 할 수 있으며, 이 긴급조치는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이에 기반해 긴급조치 1호와 2호가 1974년 1월 8일 공포됐는데, 유신헌법을 반대하거나 개정이나 폐지를 주장·발의·제안·청원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하고 이를 위반할 경우 일반 법원이 아닌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한다는 내용을 핵심으로 한다. 고 장준하 선생과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유신 헌법 개헌을 주장하다가 이 긴급조치로 인해 체포돼 징역 15년과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았다.

1975년 5월 13일 공포된 긴급조치 9호는 '긴급조치의 결정판'으로 불린다. 기존 유신헌법 반대 금지에 더해 학생들의 집회와 시위를 일체 금지하고 이를 위반할 경우 주무 장관이 교직원이나 학생을 해직 또는 제적할 수 있고, 더 나아가 휴업·휴교·정간·폐간·해산·폐쇄 조치를 취할 수 있게 했다.

또한 이 조치에 대한 비방행위도 금지하고, 금지 위반 내용을 방송·보도·기타의 방법으로 전파하거나 그 내용의 표현물을 제작·소지하는 행위도 금지했다. 금지에 금지를 덧씌운 이 조치는 해제될 때까지 4년여 동안 수백명의 구속자를 낳아 '전 국민의 죄수화'라는 유행어를 만들기도 했다.

위헌 결정 나오자 긴급조치 피해자들 '환호'

헌법재판소가 박정희 전 대통령에 의해 공포됐던 긴급조치 제1호, 제2호, 제9호에 대해 전원일치로 위헌 결정을 내린 가운데, 21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유신·긴급조치 피해자 대책위원회 소속 회원들이 기자회견을 열고 긴급조치로 희생된 이들을 위한 묵념을 하고 있다.
▲ '긴급조치' 희생자들을 위한 묵념 헌법재판소가 박정희 전 대통령에 의해 공포됐던 긴급조치 제1호, 제2호, 제9호에 대해 전원일치로 위헌 결정을 내린 가운데, 21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유신·긴급조치 피해자 대책위원회 소속 회원들이 기자회견을 열고 긴급조치로 희생된 이들을 위한 묵념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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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시대의 긴급조치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이번 결정이 주목을 받았던 이유 중에는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갈등도 한편에 자리잡고 있었다.

대법원은 지난 2010년 긴급조치 1호에 대해 위헌 판결을 하면서, 긴급조치가 국회의 입법권 행사라는 실질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으로 '법률'이 아니므로 대법원에 위헌심사의 관할권이 있다고 주장해, 헌법재판소와 미묘한 갈등을 빚었다.

하지만 헌법재판소는 이번 결정을 통해 "일정한 규범이 헌법소원심판의 대상이 돼는 '법률'인지 여부는 그 제정 형식이나 명칭이 아니라 그 규범의 효력을 기준으로 판단하여야 한다"면서 긴급조치나 국제 조약의 위헌 여부 심사 권한이 헌법재판소에 있다고 대법원의 논리를 반박했다.

어쨌든 대법원에 이어 헌법재판소까지 모두 위헌 판단을 내림으로써, 긴급조치와 그 근거규정이었던 유신헌법에 대한 사법적 판단은 더욱 확고해졌다. 특히 이번 헌법재판소 결정은 대법원과 비교할 때 보다 헌법적 관점에서 판단했다는 점과 대세적 효력이 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대법원 판결은 해당 사건 하나에 대해서만 효력이 있지만,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은 대세적 기속력을 가지고 있어 비슷한 모든 사건에 대해 효력을 발휘한다. 법원에 계류된 많은 긴급조치 재심 사건들이 헌법재판소를 바로 본 이유가 이 때문이다.

오후 2시가 조금 넘어 열린 헌법재판소 선고에서 "모두 헌법에 위반된다"는 주문이 낭독되자 방청석에 있던 긴급조치 피해자들의 박수와 환호가 터져나왔다.

헌법소원을 수행해온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이석태 변호사(법무법인 덕수)는 "이번 결정에서 유신헌법 53조 부분이 아쉽기는 하지만, 결정의 이념과 정신, 근거조항에 따르면 유신헌법에 대한 판단이 내려진 것"이라고 말했다.

선고 직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은 "똑똑히 기억하라, 유신과 긴급조치로 잡혀가서 얻은 육체적, 정신적 상처는 아직도 나아게 남아있어서 괴롭다"고 말했다. 또 한 명의 피해자는 "지금도 그때 당한 고문으로 인해 고생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다"면서 "그리 유쾌한 기분만은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사법부가 정말 성찰과 반성을 해야 한다"면서 "앞으로 어찌해야 하는 생각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들은 기자회견을 시작하기에 앞서 "벌써 유신헌법 제정 41년이다, 이미 많은 분들이 시대적 아픔을 온몸으로 겪고 돌아가셨다"면서 잠시 묵념을 했다.


태그:#긴급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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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선임기자. 정신차리고 보니 기자 생활 20년이 훌쩍 넘었다. 언제쯤 세상이 좀 수월해질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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