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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2월 21일, 삼성SDI 울산공장에서 일했던 노동자 수십 명이 희귀질환을 앓고 있거나 이미 숨졌다는 사실이 당사자와 유족, 삼성일반노조, 반올림, 울산인권연대, 울산지역노동자건강권대책위 등의 기자회견으로 세상에 그 실체를 드러냈다.(관련기사 : <삼성SDI 울산공장, 암·백혈병 18명 확인... 6명은 사망>)

특히 발병자들 가운데 삼성SDI 울산공장 컬러브라운관 1공장에서 일한 경우가 많았다. 물론 이 발병자들은 용기를 내서 시민사회에 알려온 경우이며, 비슷한 환경인 2~3공장의 발병자 추가 여부도 앞으로 밝혀져야 할 사안이다.

삼성SDI 울산공장 노동자의 암·백혈병, 뇌질환 등 발병률은 우리나라 평균 암 발병률에 비해 상당히 높다. 지난 21일 기자회견에서 공개된 백혈병 등 희귀질환 발병자 18명 중 컬러브라운관 1공장 '봉착공정'과 그 뒷 공정인 'F-가공'에서 일한 노동자는 10명에 달했다. 당시 이 두 공정의 주야간 전체 인원은 100~120여 명이다('국가 암 등록 통계'에 따르면 2009년 기준 우리나라 암 발생자 수는 인구 10만 명당 387.8명이다. 2011년 1월 1일 현재 생존하고 있는 우리나라 암유병자는 인구 5000여만 명 중 96만654명이다).

특히 당사자들이 그동안 유해물질 속에서 오랜 기간, 장시간 노동에 노출돼 왔다는 점을 호소하면서 직업성 발병 가능성을 더욱 높이고 있다. 삼성 SDI 울산공장은 어떤 곳일까? 왜 이곳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의 희귀질환 발병이 이처럼 많은 것일까?

삼성SDI는 1970년대 초 일본 NEC와 합작해 우리나라에 브라운관 사업의 붐을 일으킨 주역이다. 처음 흑백브라운관으로 출발했으나 1980년대부터 컬러브라운관 생산을 본격화했다. 당시 브라운관 기술력이 부족했던 삼성은 이 분야 맹주인 NEC와 협력해 일본공장의 생산라인을 본떠 수원과 울산(당시는 '경남 양산공장')에 공장을 짓고 브라운관 생산을 시작했다. 삼성SDI는 1986년 울산공장에 컬러브라운관 1공장을 건설한 데 이어 폭발적인 수요에 힘입어 1987년에는 컬러브라운관 2~3공장을 증설하기에 이른다.

당시 삼성 측은 생산량 급증과 공장 증축에 따른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대규모로 고졸 생산직 직원을 채용했다. 그 소식을 듣고 일자리를 찾아 경남 함양, 경북 상주에 이르기까지 전국 각지에서 '삼성' 입사라는 청운의 꿈을 가진 20대 초반 남녀 젊은이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1980년대 말에는 울산공장 직원만 1만여 명에 이르렀다.

'컬러브라운관 세계 수출 1위', 화려한 금자탑 아래엔...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남면 가천리에 있는 삼성SDI 울산공장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남면 가천리에 있는 삼성SDI 울산공장
ⓒ 박석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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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브라운관의 퇴조에 따라 현재 컬러브라운관 생산공장은 현재 완전히 폐쇄되고, 삼성SDI 울산공장에는 PDP 생산, 2차전지 생산, 사무직 등 2000명이 채 안 되는 직원들만이 근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4년 컬러브라운관 2공장이, 2007년 1공장이, 2008년 3공장이 각각 폐쇄되면서 수천 명의 직원이 희망퇴직이란 이름으로 정리해고 됐다. 일부는 신형 사업인 PDP공장으로, 일부는 삼성 계열사인 삼성중공업 하청업체 등으로 이직해 직원 수가 급감했다.

하지만 구조조정은 이미 1998년 IMF 때 진행됐다. 컬러브라운관의 전성기가 지난데다 신형 사업인 LCD 공정이 삼성전자로 옮겨가면서 회사로서는 직원을 줄여야 할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회사 측은 희망퇴직을 받는 동시에 정규직 직원들을 부서 단위로 묶어 사내기업이라는 명목으로 외주화했다.

이때 퇴직하거나 사내기업(하청)으로 옮겨간 정규직 직원이 4000여 명에 달한다. 당시 구조조정을 반대하다 해고되고 구속된 송수근씨는 "회사 측이 사내기업으로 정규직을 비정규직화하고 희망퇴직을 진행해 이에 반대해 노사합의를 요구하면서 노조 설립을 주창했다"며 "이후 회사 측이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등으로 고소해 구속된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SDI는 컬러브라운관 생산을 시작한 지 10년도 안 된 1988년, '1000만본 생산'을 기록할 정도로 급성장을 이뤘다. 당시는 공장 자동화가 진행되지 않았고, 반장치산업으로 사람의 손이 많이 필요한 공정이 대부분이라 많은 인원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 배경에는 당시 사회적으로 만연한 저임금 제도가 있었다. 이들은 12시간 주야간 맞교대와 특근·잔업을 이어갔고, 한 달 근무시간이 400~500시간을 넘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지난 21일 기자회견을 통해 직업병 산재신청을 한 여병운씨가 1987년 입사 후 몇 년간 받은 시급은 600~700원대였다. 여병운씨는 "한 달 500시간을 일하고 받은 월급이 고열수당, 중량수당 포함해 40여 만원이었다"고 밝혔다. 만일 이들이 하루 8시간 일했다면 그들의 급여 수준이 얼마 정도였을지 짐작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1988년부터 최저임금제를 시행했는데, 그해 최저임금은 487원, 1989년 600원, 1990년 690원이었다.

송수근씨는 "1987년 노동자대투쟁 때 삼성SDI 울산공장에서도 파업을 진행하며 노조 설립을 시도했으나 결국 무산됐다"며 "그 대가로 다음해 임금이 20% 올랐고, 12시간 맞교대와 특근을 통해 어느 정도 생활 임금을 가져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때 일부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며 노조 설립을 요구했지만 결국 노동자와 사측 대표단이 협의하는 노사협의회 구성에 만족해야 했다.

'1000만 본' 생산의 주역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울산산재추방운동연합 회원이 삼성SDI 울산공장앞에서 희귀질환 발병에 대해 회사측이 사과하고 산재를 인정할 것으로 요구하고 있다
 울산산재추방운동연합 회원이 삼성SDI 울산공장앞에서 희귀질환 발병에 대해 회사측이 사과하고 산재를 인정할 것으로 요구하고 있다
ⓒ 울산산재추방운동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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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SDI의 컬러브라운관 사업 호황은 전두환 정권이 12·12쿠데타에 성공한 후 정권의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내세운 대민 전략이 영향을 미쳤다. 전두환 정권은 1980년 12월부터 컬러TV 방송을 전격 시행했다. 그리고 이후 세계적으로도 컬러TV가 날개 돋친 듯 팔렸던 것. 여기다 1980년대 중반 전 세계적인 3저현상(저유가·저물가·저달러화)과 엔화강세는 컬러브라운관 수출에 날개를 달아줬다.

여기에다가 저임금 장시간 노동의 사회 풍토는 회사 측이 사세를 확장하기에 더 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또한 컬러브라운관은 별다른 홍보 없이도 완성TV 생산공장에 곧바로 내다 팔 수 있다는 제품의 특성에도 큰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부피가 크다는 단점 때문에 이후 두께가 얇은 평판 디스플레이 등에 밀리면서, 결국 삼성SDI의 컬러브라운관 1000만 본 생산 신화는 시대의 뒤켠으로 사라졌다.

삼성 SDI는 브라운관 사업의 퇴조 이후 지금은 벽걸이 TV로 불리는 PDP(기체방전 현상을 이용한 평판 표시장치)와 2차전지 신규 사업에 주력하고 있다. 그렇다면 컬러브라운관 생산의 주역인 1만여 명의 노동자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브라운관은 뒷면 뾰족한 부분인 전자총에서 음극 전자를 발사해 형광물질이 칠해진 화면쪽 유리면을 때리면 빛이 나는 원리다. 이 때문에 컬러브라운관 생산공장은 전자총을 조립하는 라인, 브라운관 유리를 부착하는 라인, 형광막을 입히는 라인, 검사하고 유리를 닦아 최종 출하하는 라인 등으로 나뉜다.

여병운씨의 경우 삼성SDI 울산공장의 비약적 발전 기간인 1987년 2월 입사해 화학약품으로 유리 브라운관 앞·뒷면을 부착하는 작업을 해왔다. 그는 "여름이면 40도가 넘는 고온에서 매캐한 냄새가 나는 약품으로 유리를 부착하는 작업을 해왔다"고 밝혔다.

당시 해당 공정 노동자들에 따르면 브라운관 유리를 부착하는 데 쓰이는 화학물질을 프리트라 불렀고, 이물질을 닦아내는 와이퍼도 사용했다고 한다. 이들은 "프리트에는 납이 섞여 있고, 와이퍼는 석면이 들어있는 것으로 당시에 알고 있었다"며 "하지만 그때는 모두 20대로 팔팔한 몸이었고, 차후 어떤 병이 올지 모르고 생산량을 채우기에 급급했다"고 밝혔다.

여병운씨는 이곳에서 일한 지 24년이나 지난 2011년 급성골수성백혈병 발병 사실을 알았고, 현재 항암 치료 중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공정에서 일하던 노동자 몇 명이 간암에 걸렸거나 간암으로 이미 사망했다는 점이 이번 기자회견으로 알려졌다.

김아무개씨가 간암으로 1998년 사망한 것을 시작으로, 2008년 정아무개씨, 2010년 이아무개씨가 간암으로 사망했다. 그밖에도 컬러브라운관 1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에게는 림프종, 고환 림프종, 비인강암, 직장암, 위암 등 다양한 희귀질환이 발병했다. 전립선암을 앓던 이아무개씨는 1995년 사망했다.

개인 질병인가 직업병인가... "삼성, 화학물질 정보 공개해야"

삼성SDI 울산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이 발병한 피해자와 유족, 삼성일반노조, 반올림, 울산인권연대, 울산지역노동자건강권대책위가 21일 오전 11시 울산시청 프레스센터에서 실상을 알리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삼성SDI 울산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이 발병한 피해자와 유족, 삼성일반노조, 반올림, 울산인권연대, 울산지역노동자건강권대책위가 21일 오전 11시 울산시청 프레스센터에서 실상을 알리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박석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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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회사 측은 화학물질에 대한 정보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여병운씨의 경우 이번에 산재신청을 하기 위해 회사 측에 자료를 요구했지만 거부당했다. 1998년 정리해고 당시 노사협의회 노측 위원이었던 송수근씨는 "당시 유해물질이 노동자들의 몸에 좋지 않다는 점에서 개선을 요구하기 위해 회사 측에 자료 공개를 요구했지만 거절당했고, 노측 위원들이 수원공장에 가서 자료를 요구했지만 정문 앞에서 원천봉쇄당했다"고 말했다. 그는 "노조가 없어 자료 공개를 요구하는 공식적인 활동을 더 이상 진행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삼성SDI 울산공장 노동자들의 희귀질환은 직업성 발병 연관성이 높아 보이지만 그것을 증명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회사 측이 산재 인정을 하지 않는 이유도 그것이다. 삼성SDI 측은 "직업성 발병과의 연관 문제는 회사가 결정할 사안이 아니며 근로복지공단에서 판정할 문제"라고 밝혔다. 그리고 1998년 노사협의회가 유해물질 자료 공개를 요구한 것에 대해서는 "오래된 일이라 잘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여병운씨의 치료에 대해서 회사 측은 21일 <연합뉴스>를 통해 "병원 알선과 치료비, 위로금 지원 등 최대한 배려했고 올해 1월 담당의사가 일상생활이 가능하다는 소견에 따라 복직한 후에 근무강도가 약한 업무를 부여했다"며 "산재신청과 관련해서도 최대한 지원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이들의 직업성 발병 여부 규명에 회사가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요구하는 지적이 많다. 25일 고신대 김정원 교수는 "직업성 발병 여부를 알기 위해서는 어떤 물질로 작업을 했으냐 하는 사실이 먼저 공개되고 밝혀져야 한다"며 "암이나 백혈병 등 희귀질환 발병은 그 종류에 따라 다양한 원인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삼성일반노조 김성환 위원장은 "삼성SDI 노동자들이 그동안 발병사실이 알려지면 회사에서 쫓겨날 것을 우려해 암 발병 사실을 쉬쉬하며 숨겨왔다"며 "노조가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는 못하지만 만일 노조가 있다면 희귀질환 발병에서 보듯 노동자들의 건강을 살펴보는 등의 역할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그는 삼성의 무노조 원칙을 비판하며 "감시와 사찰 등으로 무노조를 고수하는 삼성이지만 이번 희귀병 대량 발병을 보면서 과연 누구를 위한 무노조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고 덧붙였다.


태그:#삼성S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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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지역 일간지 노조위원장을 지냄. 2005년 인터넷신문 <시사울산> 창간과 동시에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활동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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