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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수정 : 18일 오후 3시 6분]

 명파리 가는 길가, 문을 닫은 한 건어물 가게.
 명파리 가는 길가, 문을 닫은 한 건어물 가게.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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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친 데 덮친 격이다. 새해에는 무슨 좋은 일이 생길까 기대했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호되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다. '미사일 발사'에서 '지하 핵실험'까지. 이런 상황에서 앞으로 더 이상 무엇을 기대해야 할지 알 수 없다.

최북단 마을인 강원도 고성군 '명파리'. 새 정부가 들어서면 남북관계에 일정한 변화가 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그곳 명파리의 주민들에게 북한 핵실험은 날벼락 같은 이야기다. 새해에는 무언가 좀 달라질까 싶었는데, 섣부른 기대였다.

지난 12일 북한 핵실험 이후, 남북관계가 도무지 걷잡을 수 없는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2008년 7월 금강산 관광객인 박왕자씨 피살 사건으로 금강산관광이 중단된 이후, 명파리에서 이날까지 오로지 금강산관광이 재개되기만을 기다려 온 상인들에겐 이보다 더 나쁜 소식이 없다.

그래서 이명박 정부 말기에, 남은 한 가닥 희망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지금 명파리는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래, 최악의 고비를 넘고 있다. 남북 관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거듭되는 핵실험 관련 보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출입국관리소, 길가에 '다시 가자 금강산'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출입국관리소, 길가에 '다시 가자 금강산'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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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관광 중단 이후 폐허가 돼가는 상점들

금강산관광이 중단된 지 5년째, 고성군은 아직도 '금강산'을 그리워하고 있다. 강원도 최북단 마을인 명파리로 가는 길에는 여전히 금강산 가던 길의 흔적이 남아 있다. 도로 주변 곳곳에서 '금강산'과 관련이 있는 글자들과 건물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단어들과 건물들 모두 지금은 단지 옛 영화를 말해줄 뿐이다.

5년이라는 세월을 버티다 못한 글자들은 윤곽이 점점 더 희미해져 가고 있다. 5년 전 금강산 가는 길에 들러 가는 손님들로 북적였던 상점들은 싸늘한 빈 집으로 남은 지 오래다. 그 풍경이 그야말로 '폭탄'을 맞고 난 뒤의 광경과 다르지 않다. '핵실험'은 이미 5년 전 금강산 가는 길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명파리 가는 길, 통일전망대 출입국관리소 앞을 지나는 고개를 오르고 나면, 한때 잘 나가던 건어물 가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무슨무슨 이름이 붙은 건어물 가게들이 길가에 죽 늘어서 있다. 이곳은 금강산관광 중단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곳이다. 그 가게들 대부분은 문을 닫고, 지금은 두세 집이 통일전망대를 오가는 관광객들을 상대로 영업을 계속하고 있다.

이 가게들은 그동안 금강산관광이 재개되기만을 기다려 왔다. 그러나 지금은 장사를 거의 포기한 상태다. 이곳에 진을 친 가게들은 그나마 장사를 계속 할 수 있는 날이 그리 얼마 남지 않았다. 조만간 통일전망대 가는 길로 새 도로가 뚫린다. 그렇게 되면 현재 가게 앞을 지나는 도로는 차들이 잘 지나다니지 않는 '옛날 도로'가 된다.

 명파리 가는 길 길가, 이제는 문을 닫은 건어물 가게들.
 명파리 가는 길 길가, 이제는 문을 닫은 건어물 가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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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가에서 아직도 영업 중인 한 건어물 가게. 금강산관광이 시작된 이래로 이곳에서 줄곧 장사를 해왔다는 가게 주인은 "이젠 어쩔 도리가 없다"며 깨끗이 마음을 비웠다. 금강산관광이 다시 시작되면 얼마간 더 돈을 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새 도로로 가게를 들어 옮길 수도 없는 상황"에서 그대로 문을 닫을 수밖에 없게 됐다.

그 길가 휴게소 역할을 했던 한 건물은 문을 닫은 채 그대로 방치돼 있다. 녹이 슨 건물 외관이 몹시 흉물스럽다. 건물 앞마당 주차장은 군데 군데 시든 잡초가 자리를 잡고 있다. 건물 전면에 '임대'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하지만 이 건물이 다시 누군가의 손에 넘어가 불을 밝히게 되는 날은 쉽게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통일전망대를 가는 도로 위로 새 도로를 건설하고 있다. 새 도로 터널 벽면에 '금강산이 있는곳, 고성'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통일전망대를 가는 도로 위로 새 도로를 건설하고 있다. 새 도로 터널 벽면에 '금강산이 있는곳, 고성'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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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된 지 60년, 되살아나는 상처들

건어물 가게 거리에서 명파리로 가려면, 다시 긴 고갯길을 하나 더 넘어가야 한다. 잠시 바다가 보이더니, 그 이후로는 산길을 더듬어 오르는 고갯길이다. 중간 중간 대전차장애물과 도로 공사 현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 팍팍하기 그지없는 고개 정상에 공터가 있어 잠시 쉬어 간다. 공터 한쪽에 가판대용 천막이 하나 서 있지만, 오가는 관광객들이 적은 탓인지 지금은 장사를 하고 있지 않다.

그 곁에 키 높이 푯말이 하나 서 있는 게 보인다. 그 푯말에 이곳이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에 부역한 사실이 있거나 혐의가 있는 고성 지역 주민 수십 명을 국군이 집단 학살한 장소(추정지)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집단 학살 과정에는 심지어 그 가족들까지 희생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런데 이곳에 아직도 그들의 주검이 묻혀 있다. 가슴이 무거워지는 이야기다.

 명파리 가는 길, 쑥고개 위 '고성 부역 혐의 희생사건 희생지' 푯말.
 명파리 가는 길, 쑥고개 위 '고성 부역 혐의 희생사건 희생지' 푯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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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된 지 60년이 흘렀다. '전쟁'이 남긴 상처를 다 지우고도 남을 세월이다. 그런데도 이곳에서는 오히려 그때 입은 상처에 상처를 덧내는 일이 계속되고 있다. 그 상처들 중에, 고성군처럼 접경지대 인근에 사는 주민들이 입은 상처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깊다. 지금도 남북 간 대립 국면이 그들의 일상에 미치는 영향은 다른 지역 사람들이 상상하기 힘들다. 그 영향이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거의 그들의 삶을 위협하는 단계에까지 접어들었다.

고개 정상을 내려가면 바로 명파리다. 명파리는 강원도 바닷가에 위치한 여느 마을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마을이다. 마을 입구에 마을 이름이 적힌 표지석과 안내판들이 서 있다. 다른 게 하나 있다면, 도로가에 죽 늘어서 있는 파란색 입간판들이다. 그 간판들의 크기가 건물 크기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크다.

 도로가 '지뢰지대' 위험 표시판.
 도로가 '지뢰지대' 위험 표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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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시선을 확 잡아끄는 효과가 있다. 그 간판들은 확실히 제 구실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진짜 제 역할을 해야 하는 식당은 정작 아무 일도 못하고 있다. 그 간판을 따라 식당 마당으로 들어선다. 하지만 그 간판이 안내하는 첫 번째 식당은 문을 안쪽에서 걸어 잠갔다. 유리문에는 영업 중이라는 팻말이 걸려 있지만, 식당 안은 텅 비어 있다. 불이 꺼진 상태다.

두 번째 집은 문까지 걸어 잠그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이 집은 이미 1년 넘게 장사를 그만두고 있다. 지금은 주인 최영자(74) 할머니가 이 추운 겨울날 혼자 집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할머니는 장사를 그만둔 이후로 "각종 공과금 내는 데도 부족한" 노령연금 등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할머니는 요즘은 금강산관광 말만 들어도 한숨이 나온다. 금강산관광은, "이제는 늙어서 힘도 없고 그저 다시 좋아지는 것 보고서 살다 죽어야 하는데 (금강산 가는 길이) 이렇게 막혔으니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할머니는 최근에 북한 핵실험 소식이 전해진 뒤로는 완전히 맥을 놓은 상태다. 지금 할머니는 "올겨울 방이나마 따뜻하게 데우고 사는" 게 소원이다.

세 번째 집은 유리문에 '잠시 휴업'을 내붙였다. 지금 이 길가에서 문을 열고 있는 가게는 길가 슈퍼 두 군데와 건어물 가게 한 군데이다. 하지만 그 시간 그 가게들을 찾는 손님은 아무도 없다. 그곳 건어물 가게 주인은 '금강산관광'이라는 말을 꺼내는 것조차 거부했다. 그 말에 넌더리를 내더니, "마을 이장을 찾아가 보라"며 손사래를 치고 만다.

 강원도 고성군 명파리 마을 입구.
 강원도 고성군 명파리 마을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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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관광 재개를 '학수고대'하는 상인들

이 마을, 김영복(56) 이장은 북한 핵실험 소식을 접하고 나서는 "두렵다는 생각보다는 안타깝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고 말했다. 25일 대통령 취임식 후, 새 정부가 들어서면 남북관계에 무언가 좀 달라지는 게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 앞에 또 다른 난관이 가로놓인 데 안타까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는 얘기다.

그래도 그는 "금강산관광 재개를 학수고대"하고 있다. 그는 "고성군 주민들은 물론이고, 명파리 주민들은 (금강산관광 재개를) 절대적으로 바라고 있다"면서 "(박근혜 대통령이) 북한하고 빨리 대화를 시작해서 금강산관광을 재개하고 (지역경제가) 옛날처럼 원활하게 돌아가야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명파리 길가에 늘어선 식당 간판들.
 명파리 길가에 늘어선 식당 간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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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파리는 지금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상황이다. 김영복 이장 말에 따르면, 금강산관광 중단 전에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던 가게가 명파리에서만 15곳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겨우 3곳 정도 남아 "살아가는 게 형편이 말이 아닌" 생활을 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명파리를 떠날 사람은 이미 다 떠났고, 남아 있는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별다른 희망도 없이 살아가고 있다.

그러다 보니 북한이 핵실험을 감행했다는 소식에도 냉정한 모습이다. 길에서 만난 명파리 주민들은 "그 사람들(북한)이 하지 말란다고 안할 사람들도 아니고 우리가 뭐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거나, "(이런 상황에서도) 금강산관광이 재개되면 좋지만 그것도 그때 가봐야 아는 일"이라며 체념한 모습이 대부분이다.

그래도 명파리 주민들은 여전히 남북관계가 개선될 거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명파리는 물론이고, 강원도 고성군 전체에서 '금강산관광 재개'는 여전히 중요한 문제이다. 남북관계가 어떻게 변화하느냐에 따라, 고성군처럼 접경지대에 사는 주민들의 삶 역시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명파리 가는 길, 바닷가 대진등대.
 명파리 가는 길, 바닷가 대진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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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문순 강원도지사는 지난해 <오마이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남북관계가 접경지대 주민들뿐만 아니라 지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절대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접경지 주민들에게 평화는 구호가 아니라 삶의 문제"이며 "남북관계가 왜곡되면 지역경제가 안 돌아간다"고 주장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남북관계는 강원도뿐만 아니라 국가 경제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최 지사는 최근까지 도 차원에서 남북관계를 개선하는 일에 역점을 두고, 상당히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지난 달 24일 중국 하이난섬에서 남북 간 여자청소년축구 시합을 개최한 것이 그 한 예다. 하지만 그 축구시합도 북한이 장거리 로켓을 발사하면서, 시합을 며칠 남겨 두지 않은 시점에서 통일부로부터 대회 개최를 재고하라는 말이 나와 파행을 겪어야 했다.

지금은 북한 핵실험으로, 강원도에서 추진해온 남북교류사업 전체가 안개 속을 걷고 있다. 박근혜 정부가 남북문제에 어떻게 대처할지 알 수 없다. 이런 마당에 금강산관광 중단으로 피해를 입은 주민들의 삶은 돌보는 건 더욱 더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다.

금강산관광 중단 이후, 남북관계가 최악의 길을 걷고 있다. 악감정이 쌓이다 보니, 이제는 무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깊이 생각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명파리에서 일어난 일이 결코 남의 나라, 남의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아니다.


#북한핵실험#명파리#금강산관광#고성군#남북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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