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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남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광주 양동시장.
호남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광주 양동시장. ⓒ 이주빈

광주천 천교에서 1km 남짓 걷다 보면 양동시장과 만난다. 해방 이후 한때는 '한강 이남에서 최고로 큰 시장'이란 평을 들었다. 지금도 6개 시장(양동시장·양동복개상가·닭전길시장·수산시장·건어물시장·공구시장) 1500여 개 점포가 함께 똬리 틀고 있는, 호남에서 제일 큰 시장이다.

원래 양동시장이 있었던 자리는 광주공원 인근 둔치. 일제는 광주를 식민지 근대도시로 탈바꿈시키겠다는 계획을 수립한다. '대광주 계획'이 바로 그것이다. 대광주 계획의 핵심은 반달 모양으로 굽이쳐 흐르던 광주천을 직강화 하천으로 만들고 광주천 주변에 근대식 공장과 운동장 그리고 시장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1932년 2월에 만들어진 시장이 '사정(지금의 사동)시장'이었다. '광주 이야기꾼' 박선홍은 <광주 1백년>에서 "(개장 이후) 사정시장은 호남 지역 최대의 시장으로 성장했는데 1938년 통계자료에 의하면 연간 거래액이 226만5871원에 달했다"며 "이는 남한 지역에서 천안장·남원장·대구의 서문시장·예천장·진주장·횡성장에 이어 일곱 번째 규모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사정 시장은 곧 쫓겨나고 만다. 다름 아닌 신사 때문이었다. 광주공원에는 조선총독부가 직할로 관리하는 신사가 있었다. 일제는 신사참배를 하는 신성한 곳 주변에 시끄럽고 냄새 나는 시장이 있어선 안 된다며 시장을 신사에서 약 2km 밖으로 내몬다. 그렇게 신사에 쫓겨와 1940년 4월 만들어진 시장이 지금의 양동시장이다.

이 별에 인류가 정착하고 산 이래로 시장처럼 독특한 공간이 있을까. 만들어져 사고 팔리는 물건과, 그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과, 그들이 모인 공간과, 그들이 함께하는 시간. 사람이든 물건이든 저마다의 사연으로, 저마다의 유통기한을 따지며 시장살이를 함께한다. 웃음만큼 눈물도 끊이지 않고 쌓인 사연만큼 강하게 서로에게 의지한다. 이게 바로 시장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우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뿐

 양동시장 전집의 풍경. 시장은 웃음과 눈물, 사연의 공동체다.
양동시장 전집의 풍경. 시장은 웃음과 눈물, 사연의 공동체다. ⓒ 이주빈

1980년 5월에도 마찬가지였다. 양동시장 상인 약 150명은 주먹밥과 김밥을 만들어 금남로와 광주공원에 있는 시민군들에게 나눠줬다. 언제 계엄군에게 보복당할지 모르는 이들이 언제 공수부대에게 죽임당할지 모르는 이들에게 나눠준 주먹밥. 광주가 무참히 살육당했지만 끝내 다시 살아난 까닭은 서로 지고지순한 주먹밥이 됐기 때문이다. '우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뿐'이었기 때문이었다.

들과 산은 온통 하얗구나, 눈은
펑펑 쏟아지는데
쌀값 비료값 얘기가 나오고
선생이 된 면장 딸 얘기가 나오고
서울로 식모살이 간 분이는
아기를 뱄다더라. 어떡할거나.
술에라도 취해 볼거나. 술집 색시
싸구려 분 냄새라도 맡아 볼거나.
우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뿐.
- 신경림<겨울 밤> 중에서

여전히 양동시장은 전라도 사람을 닮아 때때로 드세고, 때때로 곰살맞으며, 때때로 서럽고, 때때로 흥에 넘친다. 1980년대 군부독재가 레코드판마다 강제로 주입시킨 <시장에 가면>같은 검열 받은 건전성은 없다.

독립운동하다 포목장사를 할 수밖에 없었던 이의 이야기와 대통령 선거운동 기간에 국밥 한 그릇 먹고 가 그 집을 순식간에 명소로 만들어놓고 황망하게 세상을 떠나버린 이의 이야기가 한 치 꾸밈없이 좌판처럼 즐비하다. 그래서 시장은, 리얼리티의 전당이다.

무지개마을에 걸린 미소... "보믄 짠해 죽겄소"

 광주 양동시장 2층 옥상에 있는 '양동 문화센터'. 이곳에 다문화가족을 위한 무지개마을이 있다.
광주 양동시장 2층 옥상에 있는 '양동 문화센터'. 이곳에 다문화가족을 위한 무지개마을이 있다. ⓒ 양동 문화센터

양동시장 신용협동조합 옆 계단을 타고 2층으로 올라가면 '양동 문화센터'가 있다. 2010년 광주비엔날레 특별 프로젝트 <장삼이사>가 그대로 보존돼 있다. 그리고 다문화가족들이 즐겨 찾는 '무지개마을'이 있다.

무지개마을에는 여러 나라에서 온 다문화 가족 주부들을 위해 여러 나라의 물건을 파는 작은 가게와 음식점·공방이 있다. 둥지를 떠나와 둥지를 튼 이들의 작은 쉼터가 시장 옥상에 둥지를 튼 것이다.

팔순이 넘은 시어머니는 캄보디아에서 온 며느리의 한글 공부를 돕는다며 함께 나왔다. 하지만 장소를 잘못 알았다. 가벼운 성을 내며 여기저기 전화를 돌려 공부 장소를 물어보는 시어머니를 며느리는 미소를 머금은 채 바라봤다. 할머니가 말했다.

"말 안 통하는 짐승이야 삼시 세끼 밥만 챙겨줘도 되지만 사람끼리 어뜨께 그라고 산다요. 지도 팔자 사나와서 말 안 통하는 이역만리까지 시집 왔응께 여그서라도 말 배워 편하게 살아야지라. 보믄 짠해 죽겄소."

'죽을 정도로 짠한 존재', 가족은 서로에게 그런 존재다.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손을 잡고 시장 옥상을 내려갔다.

덧붙이는 글 | 광주천 따라 걷기 4-2 코스는 '천교-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양동시장'입니다.



#광주천 따라걷기#양동시장#주먹밥#신사#다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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