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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지진을 출발한 우리는 황산도를 거쳐 분오리돈대를 향해 가고 있는 중이었다. 물이 빠져나간 갯벌에는 발갛게 나문재가 돋아있었고 가끔씩 갈대가 숲을 이룬 채 우우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가천의과대학 맞은편에 있는 선두리 어판장에 도착했다. 항상 흥성하던 곳이었는데 오늘따라 한가롭다. 날이 추워서 사람들이 나다니질 않으니 여기도 한산한가 보았다.

줄을 지어 서있는 횟집들 중 한 곳에서 누가 나를 불렀다. 누구일까. 긴 머리에 몸에 딱 붙는 바지를 입어서 발랄해 보이는 그녀는 낯이 익은 듯 하면서도 낯선 얼굴이다. "사모님" 하면서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미녀였다. 웃을 때마다 살짝 드러나던 덧니는 여전했다.

선두 어판장 앞의 갯벌
 선두 어판장 앞의 갯벌
ⓒ 문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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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다며 내 손을 잡고 안으로 이끌던 미녀는 우리 식구들의 안부를 물었다. 우리 딸과 아들의 안부까지 챙기는 그녀가 반가웠다. 그러는 와중에도 사람이 오는 기척이 있으면 얼른 '어서 오세요'라고 소리를 치면서 손님을 불렀다. 몇 년 못 본 사이에 미녀는 좀 변한 듯 싶었다. 선머슴 같이 크게 웃고 행동하던 그녀였는데 조신한 모습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있었다. 그래도 여전한 건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활짝 웃는 얼굴이었다. 

덧니가 예뻤던 그녀

십여 년 전 봄이었다. 새 학교로 전근을 간 남편은 담임을 맡은 반 아이들을 매우 마음에 들어 했다. 되바라진 아이는 하나도 없고 모두 순박해 보이더라고 하며 아이들과 함께 할 날들에 기대를 했다. 남편이 담임을 맡은 반 아이들은 모두 20여 명이었는데, 남학생과 여학생의 비율이 엇비슷하다 했다. 그 중에서 특히 눈길을 끌었던 아이가 바로 미녀였다.

미녀가 있는 곳은 항상 시끌벅적했다. 호탕하게 웃고 걸걸하게 행동하는 그 아이 곁에는 친구도 많았다. 사람을 몰고 다니는 게 미녀의 특기요 또 장기였다. 그런 그 애에게 무슨 근심이 있고 아픔이 있으랴 싶었다. 그러나 가슴 속의 슬픔을 숨기기 위해 겉으로 그렇게 화통하게 행동했던 미녀였다.

미녀네 집에는 어머니의 자리가 비어있었다. 아이들이 어릴 때 집을 나간 어머니 대신 할머니가 살림을 돌봐주셨지만 거친 바닷 바람과 고달픈 생활에 치어서 그랬는지 할머니의 말씨는 부드럽지가 않았다. 또 어부였던 아버지는 돈을 벌면 챙길 줄을 모르고 금세 다 써버리기에 바빴다. 그래서 미녀는 방학 때마다 식당을 하는 친척을 도와주고 용돈을 벌며 자기 앞가림은 스스로 해나갔다. 

천둥벌거숭이처럼 뛰놀던 미녀가 어느 날부터 마음을 먹고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끊임없이 긍정의 눈길을 보내주는 선생님의 격려에 힘입어 장래를 계획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자신처럼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도와주는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그 애는 말했다. 아버지처럼 배를 모는 어부가 되겠다고 했던 섬 소녀가  더 큰 세상으로 나갈 꿈을 키우게 된 것이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읍내의 고등학교로 진학을 한 미녀는 간간이 우리에게 소식을 전하곤 했다. 어쩌다 길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반갑게 달려와서 큰 소리로 인사를 하곤 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호탕한 성격은 그대로였는지 그 아이의 곁에는 늘 친구들이 서넛 붙어 있었다.   

선두리는 '뱃머리를 돌려 들어가는 해안마을'이라는 의미로 선두동(船頭洞)으로 불렸다 한다.
 선두리는 '뱃머리를 돌려 들어가는 해안마을'이라는 의미로 선두동(船頭洞)으로 불렸다 한다.
ⓒ 박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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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있는 대학에도 갈 수 있을 정도로 미녀의 학교 성적은 괜찮았다. 하지만 장학금을 지급받는 조건으로 지방의 어느 대학으로 진학을 했다. 내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는 미녀의 아버지는 딸의 장래에 대해서도 대비를 해놓은 게 없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 했으니 어찌 보면 대학에 갔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인지도 몰랐다.

어부를 꿈꿨던 소녀, 어부의 아내가 되다

부모가 대주는 돈으로 편하게 생활하는 애들과 달리 미녀는 학비며 생활비까지 다 스스로 벌어서 썼다. 외국으로 어학연수를 갈 때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남동생의 반 년 치 용돈까지 만들어놓고 간 아이였다. 그렇게 열심히 살던 미녀였는데 언젠가부터 소식이 뜸해지더니 재작년에는 아예 연락이 되지를 않았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궁금해 하던 남편에게 미녀에 대한 소식이 날아왔다. 아기를 낳고 살림을 차렸다는 소문이었다. 선두리어판장에서 남편과 함께 횟집을 한다고 했다.

어부가 되고 싶다고 했던 소녀가 어부의 아내가 되었다. 크게 될 테니 지켜봐 달라고 했던 미녀였는데, 어부의 아내는 그 애가 꿈꾸었던 장래의 모습이었을까. 미녀에게는 몰라도 그 아이를 가르쳤던 선생님에게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남편은 내내 아쉬워했다. 공부를 마치기를 바랐는데 중도에 그만 둔 게 안타까웠던 모양이었다.

점심은 드셨느냐면서 안에 들어가서 요기라도 하라고 미녀는 권했다. 말만으로도 고맙다며 손사래를 치는 내게 선생님께 구워드리라면서 말린 생선을 또 한 꾸러미 안겨주었다. 늘 어리게만 봤는데, 못 본 사이에 어른이 되어 있었다. 챙겨주는 건어물들을 다시 제 자리에 놓아두며 이 다음에는 선생님과 같이 한 번 놀러 오마고 했더니 그제야 시름을 벗은 듯 환하게 웃는다. 남편에게 미녀가 특별한 제자였듯이 미녀에게도 선생님은 남달랐던 모양이었다. 선생님에게 인정을 받고 싶은 듯 "저, 장사 잘 해요. 장사로 최고가 될 거예요. 선생님에게 꼭 그리 전해주세요"라고 내게 그리 말했다.

물이 빠지면 드넓은 갯벌이 눈 앞에 펼쳐지는 강화군 길상면 선두5리 어판장.
 물이 빠지면 드넓은 갯벌이 눈 앞에 펼쳐지는 강화군 길상면 선두5리 어판장.
ⓒ 이종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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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를 보여주겠다며 가게 안으로 들어간 미녀는 좀 있다 아기를 안고 나왔다. 그 뒤를 따라나온 사람은 처음 보는 사람이 아니었다. 두어 해 전 여름에 나들길을 걸을 때 우리에게 찬물을 건네주었던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그 분이었다.

미녀의 길이 평탄대로이길

여름에는 그늘이 있는 산길을 주로 걷지만 그날은 갯벌을 따라 걷는 나들길 8코스를 걸었다. 동검도를 지나서 선두리 어판장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모두 더위에 지쳐 있었다. 그늘 한 점 없는 바닷가 길을 걸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한창 더운 한낮이어서 그런지 어판장에는 사람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수족관에 있는 물고기들만 살아 움직이는 듯하던 그런 한낮이었다. 그때 누가 물병과 컵을 들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방금 냉장고에서 꺼낸 듯 물병의 겉에는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연달아서 두어 컵씩 마셨다. 목을 타고 내려가던 그 청량감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감로수가 따로 없었다. 

길을 걷는 나그네에게 물을 나눠주었던 마음 넉넉한 그 분이 미녀를 며느리로 거두어 주셨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남편의 마음 한 편에 늘 애잔하게 자리를 잡고있던 미녀를 이제는 넉넉하게 지켜볼 수 있을 것 같다.

장사로 최고가 될 거라는 미녀의 말은 빈 말이 아닐 것이다. 항상 열심히 살았듯이 장사도 살림도 잘 해낼 것이다. 나중에 혼례식을 올릴 때 주례는 꼭 선생님이 서주셔야 한다며 내게 당부하는 그녀가 예뻤다. 분오리 돈대까지 가는 발걸음이 날아갈듯이 가벼웠다. 

덧붙이는 글 | 강화나들길 8코스는 초지진에서 출발해서 분오리돈대까지 가는 17.2 킬로미터의 길입니다. 바다와 갯벌, 마니산과 드넓은 들을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길입니다. 겨울철이면 동검도 근처 갯벌에서 먹이 활동을 하는 재두루미를 볼 수도 있는 강화 남단의 해안길입니다.



태그:#강화나들길, #나들길, #선두어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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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을 '놀이'처럼 합니다. 신명나게 살다보면 내 삶의 키도 따라서 클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뭐 재미있는 일이 없나 살핍니다. 이웃과 함께 재미있게 사는 게 목표입니다. 아침이 반갑고 저녁은 평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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