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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구미에서 불산가스 누출사고가 발생한 이후 상주와 청주에 이어 화성 삼성공장에서도 화학물질 안전사고가 잇따랐다. 이처럼 전국에서 다양한 화학물질이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또 다른 사고는 언제든 발생할 수 있다. 체계적인 화학물질 관리·사고대응 시스템을 갖추는 일을 더욱 강조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오마이뉴스>는 ‘화학물질로부터 우리는 안전할까’라는 문제의식으로 4회에 걸쳐 기획보도를 진행한다. [편집자말]
구미국가산단4단지의 한 공장에서 지난해 9월 불산누출사고가 난 후 5개월이 지났지만 비닐하우스 안에서 말라죽은 포도나무 옆에 당시 일을 하던 농부가 벗어놓은 목장갑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구미국가산단4단지의 한 공장에서 지난해 9월 불산누출사고가 난 후 5개월이 지났지만 비닐하우스 안에서 말라죽은 포도나무 옆에 당시 일을 하던 농부가 벗어놓은 목장갑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 조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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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수정 : 13일 오전 10시 3분]

비닐하우스 안에는 쭈그러든 포도알과 만지면 부스러질 것처럼 말라버린 이파리, 닳아버린 목장갑뿐이었다. '그날' 장갑의 주인은 평소처럼 이곳을 나선 모양이었다. 이 목장갑을 끼고 탐스러운 포도송이를 만지는 날이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한 채.

'그날' 경상북도 구미시 산동면 봉산리에 사는 A씨(75, 여) 역시 평소처럼 비닐하우스에서 일하고 있었다. 멜론 작업을 마치고 밖으로 나온 그는 멀리서 뿌연 연기가 번져오는 것을 보고 '불이 났구나' 생각했다. 갑작스레 목 안쪽이 쓰라렸고, 숨쉬기가 불편했지만 연기 탓이려니 싶었다.

하지만 2012년 9월 27일, 봉산리와 이웃마을 임천리를 덮친 것은 연기가 아닌 불산이었다. 인근 구미 제4국가산업단지(이하 구미 4산단)의 휴브글로벌 공장에서 새어나온 농도 99%짜리 불산가스는 5명을 숨지게 했고, 논밭의 작물을 순식간에 말라 죽였다. 소들은 연신 침과 콧물을 흘려댔다. 사고 당시 공장 안에 있던 폐쇄회로(CCTV) 화면마저 녹아버릴 정도로 불산의 독성은 치명적이었다.

5개월이 지났지만, 봉산리 곳곳에는 아직 '그날'의 흔적이 남아있다. 지난 5일 오후 마을을 찾은 <오마이뉴스> 취재진이 처음 만난 것은, '주민생존권 차원에서 행정당국은 조속히 이주대책을 마련하라!'는 현수막이었다. 바로 옆 마을회관에는 사고 후 주민들에게 전해진 쌀, 라면, 휴지, 녹차 등이 그대로 쌓여 있었다. 불산에 노출된 텃밭의 파들은 허연 몸을 드러내고 있었고, 마찬가지로 누렇게 말라버린 멜론과 고추도 아직 비닐하우스 안에 가득했다.

김옥선씨(78)는 "옛날에 뭐 이런 일(화학물질 대량 누출사고)이 있었냐"며 "그러니까 (제대로) 막을 줄도 몰랐고… (언젠가) 또 터질까봐 걱정"이라고 말했다. 사고 수습을 위해 출동한 소방서에는 불산을 중화할 석회가 충분하지 않았다. 주민 대피명령은 사고 2시간 10분 후에, 1.3킬로미터 주변 지역 인접업체 대피명령은 4시간 40분 후에야 이뤄졌다. 함께 노인회관에 모여 심심풀이 화투를 치고 있던 다른 주민 7, 8명도 김씨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부는 괜찮다고 하지만... "불안해서 대구까지 간다"는 주민도

지난해 9월 구미국가산단4단지안에 있는 한 공장에서 일어난 불산누출사고로 5개월이 지난 지금도 말라죽은 형체가 그대로 남아있어 참혹했던 당시 상황을 보여준다.
 지난해 9월 구미국가산단4단지안에 있는 한 공장에서 일어난 불산누출사고로 5개월이 지난 지금도 말라죽은 형체가 그대로 남아있어 참혹했던 당시 상황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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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월 구미국가산단4단지의 한 공장에서 불산누출사고로 비닐하우스에서 말라죽은 고추가 5개월이 지났어도 원형대로 방치되어 있다.
 지난해 9월 구미국가산단4단지의 한 공장에서 불산누출사고로 비닐하우스에서 말라죽은 고추가 5개월이 지났어도 원형대로 방치되어 있다.
ⓒ 조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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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이야 되는데, 앞으로 살아봐야 알지…, (시에서) 정기검사는 해준다고 했는데 아직이야."
"다른 동네에서 사고 났다는 얘기 들으면 예전 사고 생각나지. 궁금하기도 해. 우리보다 덜 독하나, 더 독하나."
"그래도 (구미환경자원화시설에서) 동네 할배들하고 계속 한 방 쓸 때는 불편했어. 집에 오니까 좋냐고? 그걸 말이라고 할까."

봉산리 주민들은 지난 10월 6일 마을을 떠나 산동면 백현리 구미환경자원화시설에서 지냈다. 마을은 사고가 난 구미 4산단과 바로 붙어 있는 곳이라 생활 자체가 불가능했다. 임천리 주민들은 같은 기간 동안 해평면 청소년수련원에 머물렀다. 이들은 79일이 지난 뒤에야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상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사람, 농작물만 아니라 땅 역시 불산가스 노출사고의 피해자다.

환경부는 지난해 10월 23일 "토양 측정·관개용수 조사 결과 농작물 재배에 문제가 없다"고 발표했지만 사람들은 찝찝해했다. 서원석씨(72, 남)도 평소 가까운 장천면 5일장에 다녔지만 요즘은 1시간여 떨어진 대구까지 물건을 사러 간다. 봉산리에서 태어나 평생 땅을 일구며 살아온 그는 "내 것(농산물)을 못 먹고 사먹으려니 자괴감이 든다"고 말했다.

정부 발표를 반박하는 연구 결과도 있다. 원진직업병관리재단 노동환경건강연구소는 지난해 11월 7일 사고 지역 농작물 시료 28개를 채취해 분석, 새로 자라난 배춧잎에서 유럽연합(EU) 사료기준인 150㎎/㎏의 10배를 초과하는 불소 농도를 확인했다. 불소 농도가 EU 사료기준을 넘어선 것만 전체 시료의 67.9%였다.

같은 달 29일, 불산사고 민·관 합동환경영향조사단 2차 조사 결과 82개 지점 가운데 1곳이 토양오염 우려기준인 400㎎/㎏를 초과한 503㎎/㎏로 나왔다. 합동조사단은 "세 지점에선 기준치의 70%를 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며 "이 네 지점은 정밀조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추가조사 결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주민들은 다시 농기구를 들 준비를 하고 있다. 김용분씨(65)는 "얼마 전에 씨나락(볍씨) 가져가라는 (마을)방송이 나와서 우리도 신청했다"며 "구미시청에서 아직 (주민들의 농작물 수매요구에 대한) 명확한 얘기는 못 들었는데, 일단 (씨)나락은 할 것"이라고 말했다. 볍씨를 싹 틔워 올봄 모내기 준비를 하겠다는 뜻이다. 몇몇 주민들은 "(시에서 우리보고) 농사지으면 '시청직원들이 다 먹는다, 시장이 책임진다'고 했다"고 얘기했다.

"주민들 귀가, 잘못된 판단이라면 막는 게 행정당국 할 일 아닌가"

지난해 9월 구미불산누출사고가 난 후 인근 야산의 나무들을 모두 잘라내었다. 소나무를 잘라낸 흔적이 보인다.
 지난해 9월 구미불산누출사고가 난 후 인근 야산의 나무들을 모두 잘라내었다. 소나무를 잘라낸 흔적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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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불산누출사고가 났던 구미국가산업단지의 휴브글로벌 공장. 폐허가 된 모습이다.
 지난해 불산누출사고가 났던 구미국가산업단지의 휴브글로벌 공장. 폐허가 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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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호 주민대책위원회 부위원장은 주민들의 이런 이야기에 그저 한숨만 나올 뿐이다. 그는 "구미시청 선산출장소에서 만든 문서에 '(주민들이 시에게 향후 2~3년간 농작물 수매해달라고 한 것을) 강구 중'이라고 나온 게 전부"라며 "이 이야기를 들은 주민들이 '구미시가 수매를 약속했다'고 믿어버렸다"고 말했다.

그는 "시가 확답하지도 않은데다 설령 그쪽에서 사들인다고 해도 예산 확보나 수매 후 처리를 어떻게 할지 또렷한 안이 없다"고 했다. 또 농사를 짓더라도 '불산가스 사고지역 농작물'이란 낙인이 찍혀 판로가 생기지 않을 것을 우려했다. 이날 구미시청 홍보담당관실 관계자는 <오마이뉴스> 문의에 "농작물에 문제가 생기면 수매할 것"이라고 답했다.

김 부위원장은 주민들의 귀가도 "순서가 안 맞는 일이었다"고 지적했다. 교사인 자신과 달리 주민 대부분 농사를 짓기 때문에 다른 곳에 집을 구할 형편이 못 된다는 점은 알고 있다. 하지만 아직 환경영향조사 최종 결과가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마을로 돌아가기에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초반 10일 정도 여관에서 생활하던 김 부위원장과 가족들은 이후 장천면 쪽에 집을 구했다.

"주민들이 귀가 여부를 찬반 투표한 결과, 4대 3꼴로 찬성이 더 많았다. 근데 (아직 환경영향조사  최종 결과도 나오지 않았는데) 벌써 귀가하는 건 잘못된 판단 아니냐. 사건 종결도 안 됐는데, (안전하지 않은) 현장에 되돌아가서 자는 일과 같다. 사람이 지뢰밭에 들어가려고 하면 막는 게 행정당국이 할 일이다. 근데 안 했다. 환경부라도 '그러면 안 된다'고 나서야 하는데… 일반 상식으로 문제가 매듭지어져야 하는데, 제 판단으론 그렇지 않았다.

주민대책위원회와 시청이 아주 협조적인 분위기라, 주민들만 속고 있다. 올해 1월 말에 휴브글로벌이 남아 있는 불산(사고탱크에는 농도 99% 불산이 약 13톤 남아 있다)을 55%짜리로 희석해 판다는 얘기를 들었다. 구미시에 '왜 주민들에게 공개를 안 하느냐, 주민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문제 처리 방식이 다르다'고 항의했더니 '위원장한테는 말했다, 다 알면 부담스럽다'더라."

현재 휴브글로벌은 멈춰 있지만, 구미 4산단 내 다른 공장은 계속 돌아가고 있다. 산단 입구에는 '플루오르(불소, 이것과 수소가 결합한 불화수소의 수용액이 불산)'란 단어가 이름에 들어간 업체도 있었다. 오늘도 구미시에서는 136개 업체가 유해화학물질을 취급 중이다. 이 가운데 20곳은 매년 165톤가량의 불산을 쓰고 있다.

지난해 9월 불산가스누출사고가 났던 구미국가산단4단지 안의 휴브글로벌 공장. 조업이 중단된 공장은 출입문이 굳게 닫혀 있다.
 지난해 9월 불산가스누출사고가 났던 구미국가산단4단지 안의 휴브글로벌 공장. 조업이 중단된 공장은 출입문이 굳게 닫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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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불감증'이 낳은 사고, '허술한 대응'이 피해 키워
발암물질은 아니지만 독성이 강한 불산은 유리와 금속을 녹이는 성질이 있어 유리 가공이나 반도체 산업에 주로 쓰인다. 2008년 들어선 휴브글로벌 구미공장은 이 불산을 이용해 각종 불산제품을 만드는 곳으로, 20톤급 탱크로리 5개를 보유하고 있다.

그런데 2012년 9월 27일 한 탱크로리에 있는 불산을 다른 쪽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사고가 났다. 농도 99%짜리 불산은 당시 작업 중이던 노동자 다섯 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인근 봉천리와 임천리를 덮쳤다. 구미시의 지난해 11월 7일 브리핑자료에 따르면 농작물 212헥타르(ha), 축산물 3944두, 차량 1962대가 피해를 입었고, 건강검진은 1만 2243회 이뤄졌다. 피해보상금 규모만 364억 2700만 원이다.

사고 원인은 '안전 수칙' 위반이었다. 경찰의 CCTV 화면 분석 결과, 작업자들이 에어밸브가 잠긴 상태에서 연료밸브 위 상판 볼트를 조이는 플랜지를 제거한 후 에어호스로 연결해야 하는 과정을 어겼다.

하지만 당국의 허술한 대응은 피해를 키웠다. '폭발사고'로 알고 출동한 소방서는 필요한 장비를 충분히 갖추지 않은 상태였고, 환경부는 불과 하루 만에 위험경보 '심각'단계를 해제했다. 사고 당일 스스로 대피한 주민들도 귀가하게 했다. 고용노동부는 이날 현장에 직원 8명을 파견한 것 외에는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또 2009년 작업환경 실태조사를 바탕으로 작성한 구미지역 불산취급업체 목록에는 휴브글로벌이 빠져 있었다.

지난해 12월 국무총리실은 '유해화학물질 안전관리 개선 대책'을 확정해 발표했다. ▲ 환경부에 사고 전담조직 신설 추진 ▲ 위험물 운송추적 시스템 도입 ▲ 모든 사업장에 공정안전관리 적용 ▲ 적용대상 물질, 21종에서 40종으로 확대 등 눈여겨볼 내용도 있었다. 하지만 관리 대상 물질과 역할에 따라 소관부처가 구분돼 있는 관리 시스템의 기본 틀은 그대로였다.



태그:#화학물질, #구미 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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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정치부. sost38@oh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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