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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읍성 높은 성곽 길에서 내려다본 성내 초가들
 낙안읍성 높은 성곽 길에서 내려다본 성내 초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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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막의 고장 벌교를 뒤로하고 낙안읍성(민속마을)으로 차를 몰았다. 벌교에서 낙안읍성까지 소요시간은 15분 정도. 입장권을 구매하려니까 매표소 아저씨가 그냥 들어가라고 했다. 너무 늦었기 때문이라는 것. 시계를 보니 오후 4시 55분, 고개가 끄덕여졌다.

전남 순천시 낙안면 동내리, 남내리, 서내리 3개 마을로 이루어진 낙안읍성은 1983년 6월 14일 사적 제302호로 지정된 옛 지방도시. 사적지 지정과 함께 초가 120여 채와 관아 등 전통 고을을 재현하고, 다양한 민속 관련 자료를 갖춰놓아 관광지로 주목을 받고 있다.

낙안읍성은 <세종실록지리지>에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태조 6년(1397) 낙안 출신 절제사 김빈길이 흙으로 성(토성)을 쌓았고, 세종 6년(1424) 석성(石城)으로 개축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총 길이는 1410m, 높이 4~5m, 성벽 상단 폭 2~3m로 원형훼손이 가장 적은 읍성으로 알려진다.

지방의 정치·경제·문화·교육의 중심지요, 군사적 기능을 가진 읍성은 왜적 출몰이 잦은 충청·전라·경상도 해안 인접지역 58개소와 내륙의 요충지에 축조하였고, 전국에 179개소나 되었다. 그러나 경술국치(1910) 때 조선총독부령 제1호에 의해 관아와 함께 대부분 헐렸다고 한다.

수난의 역사 지닌 낙안읍성 '해자'

바닥이 꽁꽁 얼어붙은 동문(낙풍루) 앞 ‘해자’
 바닥이 꽁꽁 얼어붙은 동문(낙풍루) 앞 ‘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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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 앞에는 낙안의 '진산'으로 일컫는 금전산(670m) 자락에서 흘러내린 개천을 보완한 해자(垓字)가 있었다. 해자는 적의 침입을 1차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성곽주변 하천이나 개울 등을 이용한 '자연 해자'와 사람이 호수를 만들어 고랑을 낸 '인공 해자'로 나뉜다.

볼을 때리는 찬바람에 해자 바닥까지 꽁꽁 얼어붙어 있어 목을 움츠러들게 하였다. 해자는 외부의 침입에 방어는 물론이요, 지반 다지기와 수원(水源) 확보에도 중요한 시설로 알려진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성을 처음 축조할 당시에는 설치하지 않았다고 한다. 

넓이 3.5m~4m, 깊이 1.5m~2m로 규모가 작은 편에 속하는 낙안읍성 해자는 처음엔 성곽을 따라 서쪽으로 흘렀으나 당시 낙안 군수 애첩이 서문 쪽에 살았는데 비가 많이 내리면 집이 물에 잠기곤 해서 물길을 막아버렸다는 얘기가 내려온다. 현재 남아 있는 해자 길이는 동쪽, 남쪽 합해서 596m 정도.

낙안읍성 해자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아전들 기가 세지지 못하도록 물길을 돌려놓기도 하고 사라호 태풍(1959)으로 수해가 나기도 하는 등 수난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 해자는 삼국시대부터 도성과 읍성 등에서 자연 해자 위주로 널리 이용됐으며, 성내에 설치하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4계절 농사 관련 의미가 담긴 낙안읍성 누각들

낙안읍성 입구에서 바라본 낙풍루
 낙안읍성 입구에서 바라본 낙풍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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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마을 입구 동문(東門)에는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 낙풍루(樂豊樓)가 방문객을 맞고 있었다. 1995년에 발행된 <樂安邑城>(송갑득 편저)은 순조 4년(1834)에 성균관 진사 김호언이 사비 1400량을 들여 중건했다고 전하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문루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했다.

문헌에 따르면 낙안읍성에 4개의 성문이 있었다고 한다. 북문은 호환(虎患) 때문에 폐쇄했다는 구전이 전해오나 확인할 수 없고, 동쪽에 낙풍루, 남쪽에 쌍청루(雙淸樓), 서쪽에 낙추문(樂秋門) 3곳이 남아 있다. 고지도엔 쌍청루가 진남루(鎭南樓)로 표기돼 있는데, 남쪽의 왜구를 다스린다는 의미란다.

낙안은 농사의 고장으로 문루마다 4계절과 관련된 의미를 담고 있는데, 낙풍루는 씨앗을 뿌리면서 풍년을 염원하는 봄을, 쌍청루는 시원한 여름을, 낙추문은 수확의 가을을 상징한단다, 중건한 지 200여 년. 세월이 지나는 동안 일제강점기에 없어졌으나 1987년에 복원되었다고 한다. 서문도 일제강점기에 퇴락했으나 아직 복원을 못 하고 있단다.

여름을 시원스레 보낸다는 뜻의 쌍청루(남문)는 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 문루에 오르면 간장이 녹아내릴 듯 시원하다고. 또한, 읍성 모든 골목이 남문과 연결돼 있고, 성내에서 초상이 나면 상여가 남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고 한다. 이러한 정황으로 볼 때 동문은 이곳을 찾는 손님과 관료가, 남문은 읍성 내외에 사는 일반 주민이 이용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주민들 의로운 마음도 함께 느꼈던 임경업 장군 비각

임경업 장군 비각(지방문화재자료 47호)
 임경업 장군 비각(지방문화재자료 4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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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을 지나 조금 들어가니 조선 인조 6년(1628)에 군민이 세웠다는 임경업 장군 선정 비각(지방문화재자료 47호)이 나타났다. 임 장군이 인조 4년(1626)부터 3년 동안 낙안 군수로 봉직하면서 선정을 베풀었을 뿐만 아니라, 정묘호란(1627) 때도 큰 공을 세워 매년 음력 정월 보름이면 주민이 모여 민속놀이 경연대회와 함께 제향을 모신다고 한다.

낙안군 주민들은 임경업 장군을 낙안읍성의 터주신처럼 받들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와 관련된 전설과 구전이 많았다. 특히 임 장군이 군수시절 하룻밤 만에 성을 쌓았다는 '축성 이야기'와 '임경업 장군과 별량 천마산(天馬山)', '임경업 장군과 박(朴)씨 집, 여자 하인', '덜커덩 다리' 등은 흥미를 끌었다.

낙안읍성 동문 밖 낙안 향교 입구에 임경업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忠民祠)이 있는데 이처럼 같은 지역에 사당과 비각이 함께하기란 드문 일로 여겨진다. 임 장군의 선정도 높이 사지만, 고마움을 잊지 않는 낙안군 주민들의 의로운 마음도 함께 새겨졌다.    

시간여행의 즐거움과 선인들 채취를 함께 느꼈던 돌담길

바람막이 역할을 해주는 돌담과 고즈넉한 고샅
 바람막이 역할을 해주는 돌담과 고즈넉한 고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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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겹게 느껴지는 눈사람. 스무 살 넘은 학생이 만들었다고.
 정겹게 느껴지는 눈사람. 스무 살 넘은 학생이 만들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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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업 장군 비각에서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니 어깨를 맞댄 올망졸망한 초가들 사이로 돌담길이 보였다. 고즈넉한 고샅에 돌담 간격이 좁아 더욱 정겹게 느껴졌다. 눈사람 만들기, 눈싸움, 얼음 썰매타기, 철사로 스케이트 만들기 등 코흘리개 시절 부스러기 추억들이 꽁꽁 언 길바닥에 뿌려졌다.

머리에 흰 수건을 쓴 어머니가 떡과 부침개가 담긴 쟁반을 이웃에게 넘겨주는 모습. 저녁때면 밥하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굴뚝,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깔깔대며 술래잡기 하는 아이들, 돌담 밑에서 건넛마을 총각 흉보면서 히죽대는 거시기와 저시기 누님 모습 등이 스크린 영상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다.

돌담길은 시공(時空)을 반세기 전으로 돌려놓았다. 돌담 위로 솟은 앙상한 나뭇가지에서 느끼는 스산함도, 볼을 스치는 찬바람도 예전과 달리 느껴졌다. 동상에 걸린 손등을 입으로 호호 불면서 눈밭에서, 얼음판에서 뛰놀던 추억여행의 소품이 되어 친근한 동무가 되어주었기 때문이었다.

외가 동네를 떠오르게 하는 연자매(연자방아)
 외가 동네를 떠오르게 하는 연자매(연자방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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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기구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도 목격했다. 재연해놓은 것으로, 소가 연자매(연자방아)를 돌리는 모습이었다. 종일 가도 제자리. 문득 초등학교 놀이시간에 급우들과 하던 수수께끼가 떠올랐다. "하루 종일 걸어도 제자리인 것은 뭐게?" 하고 물으면 정답을 맞히는 아이가 드물었다. 시내여서 그런지 50년 전인데도 쟁기도 모르는 아이가 많았다.

돌담이 바람을 막아주어 안옥했다. 찬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여 마실 때마다 기분이 상쾌해지면서 초가도, 돌담도 새롭게 보였다. 황토, 돌(石), 볏짚 등 자연을 가까이했던 선인들의 체취가 흠뻑 묻어났다. 눈 쌓인 돌담 밑에서 뭔가를 찾던 고양이가 얼음을 깨는 발소리에 놀랐는지 줄행랑을 쳤다. 마음도, 돌담길도, 읍성도 모두 평화로웠다.

파란 안내판에 새겨진 글이 발길을 붙잡았다. 매표소에서 그냥 들어가라고 했던 김도수(58)씨가 조선 시대 향리(이방)가 살던 가옥으로 읍성에서 가장 멋을 부린 집이라고 귀띔했다. 호기심 동하는 설명이었다. 잠시 돌아보고 나오려던 계획을 바꿔 이방(吏房)이 살던 집에서 하룻밤 묵어가기로 했다. 아내도 "그럼 내일은 '소록도'에 가면 되겠다!"며 좋아했다.

조선 시대 이방이 살았다는 초가집 마당
 조선 시대 이방이 살았다는 초가집 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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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2012년 12월 28일~29일에 다녀왔습니다.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낙안읍성, #돌담길, #임경업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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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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