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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9일 대선 결과는 정권교체를 열망했던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안겨줬다. 대선이 끝난 지 한 달이 지났지만 '멘붕(멘탈붕괴)'를 호소하는 목소리 또한 여전하다. 박근혜 시대 5년, 이 사회에서 진보를 고민하는 이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 <오마이뉴스>는 정치, 사회 각계의 다양한 목소리를 통해 진보의 길을 모색하는 기획을 수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편집자말]
지난 대선에서 진보진영은 맥을 못 췄다. 노동계는 특히 더했다. 과거 민주노동당을 만드는데 앞장섰던 민주노총은 누구를 지지할지 정하지 못했다. 전직 총연맹과 산별노조 위원장 등 일부 노동계 중진들은 문재인, 안철수 캠프에 합류했다. 김소연과 김순자, 두 비정규직 투쟁의 대표인물은 각자 '노동자후보'라 내세우며 따로 선거를 치러냈다.

결과도 처참했다. 진보정당을 등졌다는 욕을 먹으면서까지 "정권 교체에 힘쓰겠다"고 나섰던 노동인사들은 할 말이 없게 됐다. 두 노동자 대통령후보는 합쳐서 0.2%의 득표를 얻는데 그쳤다. 그 결과는 노동자들의 죽음으로 이어졌다. 대선 이후 한진중공업 복직자인 최강서, 현대중공업 하청노동자 이운남, 청년노동활동가 최경남, 한국외대노조 지부장 이호일, 한국외대노조 수석부지부장 이아무개씨, 그리고 지난 1월 28일 숨진 기아자동차 비정규직 해고자 윤주형씨까지 6명의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돌연사했다.

'진보의 갈 길'을 넘어 '노동의 살 길'을 찾아야 할 때다. 이 무거운 질문을 누구에게 던질지 고민하다 이남신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을 떠올렸다. 이랜드의 정규직노동자였던 그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요구한 이랜드-홈에버의 500일 넘는 투쟁 끝에 2007년 해고된 후 지금껏 비정규노동운동을 해오고 있다. 이랜드-홈에버 투쟁 중이던 2008년 4월 총선을 앞두고 민주노동당에서 분당한 진보신당의 비례국회의원 후보로 나섰다가 0.06%가 부족해 국회에 들어가지 못한 안타까운 전력도 있다.

문재인 캠프로 간 선배를 잡지 못한 이유

지난 1월 24일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마주앉아마자 그는 쉴 새 없이 말을 쏟아냈다. 발언도 거침이 없었다. 그만큼 현재의 노동과 진보진영의 상황이 많이 답답해보였던 것일까?

우선 그는 노동계 주요 인사들이 문재인․안철수 캠프로 간 이번 대선은 "민주노조운동의 막장"을 보여주는 것이자 "재앙"이라 평했다. 하지만 그 역시도 문 캠프로 가겠다고 한 비정규운동 선배를 붙잡지 못했다고 했다.

 "존경하는 형이 '남신아, 나도 처절한 싸움만 말고 한번은 이기고 싶다, 그럼 네가 대안을 말해 봐라'라면서 간다고 할 때, '형이 대안을 만들어야 돼'라고 답할 수밖에 없어서 마음이 아팠어요."

한진중공업 노동자 고 최강서씨의 관이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안에 놓여있다. 경찰은 시신 안치를 위해 냉동탑차의 반입을 허용해달라는 최강서열사대책위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한진중공업 노동자 고 최강서씨의 관이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안에 놓여있다. 경찰은 시신 안치를 위해 냉동탑차의 반입을 허용해달라는 최강서열사대책위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 정민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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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이후 스스로 목숨을 끊은 노동자들에 대해서도 그는 "그분들은 너무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진 거예요"라면서 "왜 그렇게 좌절했을까요? 문재인 후보가 당선됐다고 해도 문제가 즉각 해결되기는 쉽지 않았을 텐데…. 실제로는 그만큼 기대를 갖게 한 우리 책임이죠. 노조를 봐도, 진보정당을 봐도 어디 기댈 데가 없으니 보수정당에 대한 과잉기대로 쏠린 거죠. 그 노동자들을 죽인 건 어떻게 보면 우리 자신이에요. 주범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공범이죠"라는 뼈아픈 반성을 늘어놓았다.

그는 또한 대선에서의 진보진영의 모습을 "경기장을 잃어버린 플레이어"였다고 한 마디로 정리했다.

 "우리는 평론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하잖아요. 플레이어로 뛰는 걸 좋아하지. 정말 문제가 있으면 심판하고도 맞장 뜨는 게 우리의 결기고 운동의 핵심이었어요. 그런데 이번엔 아예 구장을 잃어버리고 평론도 잘 못했어요."

청년세대가 환호했던 '안철수 현상'에 대해서도 그는 "진보진영이 잘 돌아보지 않고, 안철수 별거 아냐, 그 사람은 보수인데, 뭐…"라고 폄하하면서 제3정치세력에서도 밀려났다고 잘라 말했다. 그 원인을 그는 진보정당의 분열도 컸지만 "앵무새처럼 무상의료, 무상교육 등 했던 얘기만 계속 되풀이하고, 그걸 뛰어넘는 대중적 의제를 만들지 못했던 무능함과 진보정당 출신의 정치인들이 기존 정당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등 일상의 실천에서 대중에게 신뢰를 주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진보의 살 길로 그는 "근본을 철저히 돌아보고 대중으로부터 '나도 쟤네들처럼 살고 싶다'는 감동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박근혜 당선자에 대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들고 나왔던 노동공약 모토가 '비정규직의 눈물을 닦아 드리겠습니다'였어요. 한 비정규노조 위원장은 노무현 정부 내내 '노무현이 언젠가는 할 거'라면서 그의 공약집을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들고 다녔어요. 하지만 노무현은 기가 꺾여서 못했죠. 반대로 박 당선자는 함께 나왔던 다른 후보들보다 비정규 공약이 가장 부실해요. 근데 그 공약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을 당사자인 비정규직 등 저소득층이 표를 가장 많이 줬어요. 박 당선인이 자신에게 표를 준 유권자들을 생각해서 낙선한 후보들의 좋은 노동공약을 갖고 와서 써먹었으면 좋겠어요. 그게 바로 내수 경제를 살리는 길이자 국민대통합을 실현하는 길 아니겠어요?"

다음은 3시간여에 걸쳐 진행했던 그와의 인터뷰 전문이다.

- 새해 들어서도 비정규직 투쟁에 많이 결합하고 있다. 어제도 함께일하는재단의 천막농성투쟁에 결합했다고 하던데 어떤 투쟁인가.

"함께일하는재단은 1998년 IMF 당시 금모으기운동에서 남았던 국민성금으로 만든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에서 바뀐 공익재단이다. 이사진에도 진보인사들이 많다. 그런데 일자리 창출을 지원하는 공익재단에서 수년 동안 직원들을 전부 비정규직으로 채용해왔다. 또, 2010년 현재의 사무국장이 취임하면서부터 상명하달식의 업무지시 등 내부 소통의 문제도 심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직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고 비정규직 직원이 계약 만료를 앞두면 정규직화를 논의하는 인사위원회를 구성하자고 '소박하게' 요구하고 있는데 사무국장은 '노조가 요구해서 안 된다'는 입장이란다.

노동을 잘 아는 사람들이 더 무서울 때가 있다. '우리는 다 활동가이고, 노동문제를 개선하려는 사람들인데 왜 이런 데서 너희들이 노조를 만들려고 하냐. 헌신하면 될 걸 왜 서로 부딪히게 하고, 나를 사용자로 만드느냐'는 거다. 노동인권 감수성에서 너무 유치한 수준인 거지. 지금 함께일하는재단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사무국장을 추천한 인사도 전태일기념사업회 이사장 출신이다. 전태일 정신을 이어갈 분이 비정규직 문제를 이렇게 꼬이게 하고 공익재단이 몸살을 앓게 만들었지 않은가. 우리가 이명박 정부에 대해 욕을 많이 했는데 진보진영 내부를 들여다보면 이렇게 부끄러운 부분들이 많다."

- 지난 대선에서도 진보진영이 맥을 못 추었다. 특히 노동운동의 경우, 지도급 인사들이 대거 문재인이나 안철수 후보 캠프로 가기도 했다.

"그때 우르르 몰려가는 걸 보면서 '아, 민주노조운동이 이렇게 무너지는 구나. 막장이구나' 싶어서 서글펐다. 그동안은 내부에서는 치고받고 싸우더라도 최소한 진보와 노동 독자적 정치세력화라는 우리의 가치가 있었다. 그건 아무리 상황과 조건이 어려워지더라도 놓지 말아야 할 궁극적 목표였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걸 저버리고 보수정치로 달려간 부분에서 이번 대선은 재앙이었다. 우리가 준비되지 못해서도 재앙이었고."

이남신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
 이남신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
ⓒ 신정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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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준비되지 못했다는 건 어떤 뜻인가.
"내가 비정규노동운동을 십 수 년 해오면서 굉장히 존경하는 선배가 한 분 계신다. 그 형님이 있던 현장이 조합원이 다치고 죽을 정도로 아주 처절하게 싸웠었다. 그런데 그런 투쟁을 이끌었던 형이 와서는 '문재인 캠프로 가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보더라. 말렸다. '딴 사람은 잘 모르겠다. 걔 중에는 언젠가 (보수정치로) 갈 줄 알았다는 사람도 있겠지만 형은 전혀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던 사람 아니냐. 형은 한국사회 비정규문제를 쟁점화한 당사자이자 상징이다. 그런데 민주당 캠프로 간다? 그건 정말 우리에겐 큰 손실이다. 안 된다'고 말렸다. 그 형도 처음엔 안 갔다. 다들 반대를 하니까. 그런데 두 번째 와서는 가기로 했다고 하더라. 싸우지도 못 했다. 형이 말했다. '남신아, 나도 한 번은 이기고 싶다'라고. 평생을 비정규직으로 살아온 형이다. 근속이 30년이다. 처절하게 싸웠지만 졌다. 이렇게 해도 안 되고 저렇게 해도 안 되니까 택한 선택이었다. 내가 하도 반대를 하니까 형이 '남신아, 그럼 대안을 얘기해봐'라고 하더라. 나는 말했다. '형이 대안이야. 형이 대안을 만들어야 돼. 대안 딴 데 없어, 형.'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을 때 마음이 아팠다. 비정규운동을 대표해왔던 사람이 문재인 캠프로 결국은 가겠다고 결심하면서 '이제는 결사항전이 아니라 뭐라도 좀 개선했으면 좋겠다, 이기고 싶다'고 말할 때, 진보정당이 이렇게 무너져 있고 민주노총이 저렇게 무기력한데 '형이 대안이 되어야 한다?' 참 가혹한 말이다. 그는 일개 비정규노동자일 뿐인데…." 

- 대선에서 이 소장은 어떤 선택을 했었나.
"난 기륭전자의 김소연 동지랑 좀 각별하다. 근데 그가 대선에 나간다고 했을 때 반대했다. 김소연 후보를 내세운 정치세력이 대중정치를 책임질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김순자 울산과학대지부장과도 아는 사이다. 김 지부장이 나온다고 했을 때는 정말 뜬금없었다. 그를 밀었던 옛사회당을 많이 비판했다. 현장 투쟁의 지도자를 그렇게 소모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다만 김소연 후보 같은 경우는 어쨌든 투쟁사업장 동지들이 전폭적으로 지지를 하지 않았나. 그게 큰 힘이 됐을 거다.

나도 김소연 후보를 찍기는 했다. 내 처음이자 마지막 비판적 지지가 될 것 같다. 그때 너무 괴로웠다. 세상에 선거에서 정치세력과 정책이 아니라 후보만을 보고 지지할 수밖에 없는 현실. 최악이 아닌 차악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런 최악의 구도에서 내 선택지가 없는 거다. 심각하게 기권까지 고민했다. 이런 지랄 맞은 선거 안 한다, 차라리 안철수가 사퇴하지 않았으면 안철수를 찍는 게 낫겠다는 심정이었다. 안철수에 기대를 한 게 아니라 낡은 정치구도 속에서 나온 후보들보다는 차라리 그게 신선하다는 거다.

물론 정책이나 구체적인 걸 보면 문재인 후보를 찍는 게 맞다는 생각은 했다. 문 캠프에서 비정규직 문제를 비롯해 굉장히 전향적인 제안들을 많이 받아들였으니까. 하지만 이번 대선에서는 다른 판단기준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선거당일 아침까지도 김소연, 문재인, 기권을 놓고 고민했지만 내가 내린 결론은 그랬다. 보수정당인 민주당, 그리고 노무현의 비서실장이었던 문재인은 비정규직이나 노동문제 관련해서 노무현 이상을 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문재인에게 주는 한 표는 사표가 되느냐 여부와 관계없이 실제로 노동문제 해결에 기여하기 쉽지 않은 표가 될 수 있다. 어쨌든 나는 내 자리를 지켜서 비정규직 당사자인 대선후보에게 표를 주는 게 맞다는 결론이었다."

"'유신독재의 부활'만 얘기한 민주개혁세력의 선거전략 완패"

- 문재인 후보와 박근혜 후보의 지지율이 근소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는데 정말로 사표가 될 거라는 불안함은 없었나.
"그건 별로 걱정 안 했다. 사실 문재인 후보와 박근혜 후보의 차이는 우리 생각보다 크지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투쟁사업장과 관련해서는 크다. 내가 문재인 후보가 이기길 바랐던 것은 노동정책이 바뀐다? 노(NO)! 투쟁사업장이나 비정규직, 정리해고 현안문제 관련해서는 중요한 청신호가 될 수 있겠다는 판단에서였다. 사람이 신호만 보고도 희망을 갖게 되지 않나. 설사 문제해결이 안 되더라도 와서 격려해주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나고 치유가 되는 거다. 문재인 후보가 되는 것만으로도 이명박 정부와 맞서면서 완전히 피폐화되고 무너져있던 투쟁사업장 노동자들에게 한 가닥 희망을 살릴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그의 당선을 기대했다. 나는 유신 공주가 당선됐다거나 수구보수세력이 다시 살아 돌아왔다고 평가하는 건 아니라고 본다. 박근혜 후보가 경제 민주화와 복지를 입에 올리는 순간 이미 박정희를 넘어섰다. 어떻게 보면 그쪽 선거전략이 치밀하고 영악한 거다. 그런 면에서 단순히 유신독재의 부활만을 얘기했던 민주개혁세력의 선거전략이 완패했다."

- 이운남, 최강서 등 박근혜의 당선으로 삶의 청신호를 보지 못한 노동자들이 대선 직후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이명박근혜와 문재인의 가장 큰 차이는 현재 고통받고 있는 당사자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갔느냐일 거다. 그런 면에서 아이러니다. 투쟁사업장 당사자들은 김소연 후보를 지지했으니까. 그리고선 문재인이 낙선하고 박근혜가 되는 순간 절망을 느낀 누군가는 목숨을 끊었다는 말이다. 이 아이러니는 도대체 어떻게 할지. 그런 부분에서 돌아가신 분들에게 정말 죄송하다.

왜 그렇게 좌절했을까. 문재인 후보가 됐다고 해도 문제가 즉각 해결되기는 쉽지 않았을 텐데…. 실제로는 그만큼 기대를 갖게 한 우리의 책임이다. 그리고 자기 노조나 산별노조, 민주노총을 봐도 그렇고 진보정당을 봐도 그렇고, 다른 데서 희망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 결국은 보수정당에 대한 과잉기대로 쏠렸던 거다.

그분들은 그냥 무너진 거다. 막 분노해서 자기 몸을 불사른 게 아니라 마음이 무너지고 너무 외로워서 최후의 선택을 한 거다. 그 노동자들을 죽인 것은 어떻게 보면 우리 자신이다. 주범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공범이다. 내내 침체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노동운동과 진보정당이 가장 큰 죄인이고, 그 양 날개가 꺾이게 만드는데 관여했던 모든 저 같은 사람들이 다 죄인이다. 그 죽음에 대한 뼈아픈 책임을 져야 한다."

- 노동자 정치세력화 관련해서, 이번에 김소연, 김순자 후보가 나오긴 했지만 노동자 후보로서의 차별성이 돋보이진 않았다는 평이 많다.
"대중적으로 좀 더 주목받은 건 안식년, 기본소득 같은 김순자 후보의 공약이었다. 그런데 미조직,비정규직 노동자들 입장에서는 조금 거리가 있는, 먹물 공약 같은 느낌이 있었다. 김소연 후보는 투쟁사업장 현안들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조율되지 않은 자본주의 변혁 수준의 요구들을 거칠고 서툴게 펼쳐냈다고 본다. 사회주의체제 대안에 대한 강박관념이라고 할까. 그게 그쪽 정치세력의 한계라고 본다. 대중정치, 특히 선거공간에서 유권자의 심금을 울릴 공약을 고민하지 않고, 공약을 우리 주장의 선동수단으로만 여겼기에 두 후보의 활동이 반향을 불러일으키기 어려웠다.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가 내세웠던 노동공약 모토를 아직도 기억한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눈물을 닦아드리겠습니다'였다. 그 모토 아래 전국적인 차원의 차별시정위원회, 특수고용노동자의 노동3권 보장, 원청의 사용자성 인정 등 나중에 우리가 정식화한 비정규직 해법이 아주 쉬운 표현으로 다 들어가 있었다. 한 비정규노조 위원장은 참여정부 내내 노무현 후보가 냈던 공약집을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들고 다니더라. 노무현 대통령이 언젠가는 할 거라고. 그런 공약 때문에 노무현을 찍은 사람이 꽤 있었을 거다. 공약대로 안 해서 문제였지만….

김소연, 김순자 두 호보가 받은 표를 합해야 6만이 좀 넘는다. 그 중 그들이 위한다는 비정규직의 표는 얼마나 될까. 예전에 진보신당은 비정규직이나 중소영세자영인 등 '배제된 자'들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고 했다. 사실 선언에 불과하다. 그걸 얘기하는 사람들만큼 배제된 자들로부터 먼 사람들도 없지 않은가. 오히려 새누리당이나 민주당이 그 배제된 자들과 가깝지."

- 출구조사결과 투표율이 90%에 육박했던 50대의 62.5%가 박 당선인을 택한 거나 비정규직 등 월소득 200만원 이하의 유권자들이 문 후보보다 박 당선인을 갑절 이상 찍은 것도 주목해볼 부분이다.
"나는 50대가 박 당선인에게 표를 준 건 이해가 된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양극화가 더 심해졌다. 경제, 실제 생활과 관련해서 굉장히 무능했던 거다. 남북관계는 잘 했을지 몰라도…. 그때를 경험했던 4,50대가 민주개혁정부를 어떻게 평가할까? 좋은 점수를 줄 수가 없는 거지. 차라리 박정희 때는 정치적으로 말도 안 되는 탄압을 하고 사람을 죽여서 문제였지, 실업률이나 일자리 등은 더 나았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소위 우리가 민중이라고 통칭하는 유권자들이 박근혜에게 표를 던진 게 군부독재에 표를 던진 거겠나. 아니다. 언사로만 보면 박 당선인도 비정규직 문제도 그렇고 다른 문제들도 다 언급했다. 그러니 실제로는 누가 더 잘할 수 있을까를 기준으로 표를 던진 거다. 진보는 이미 아웃돼 버렸으니까 문재인이나 박근혜 중 누가 잘할 수 있을까에 있어서 4,50대에겐 '리틀 박정희'가 더 나을 수 있었던 거다. 저소득층도 비슷하고…. 나는 납득이 된다.

그런데 진보정치나 노동운동이 제대로 역할을 했다면 그렇게 됐을까? 안 그랬을 거다. 문재인 후보가 될 수 있었다. 예전에 권영길씨가 민주노동당 대선후보로 나와서 30만표(1997년), 98만표(2002년) 얻었을 때는 김대중, 노무현이 됐다. 묘하게도 늘 진보정당이 의미있는 득표를 할 때 오히려 중도보수가 승리했다."

"대선에서 진보정당은 경기장을 잃은 플레이어였다"

이남신 소장은 "'배제된 자'들을 위한 정치를 한다는 진보정당이 '배제된 자'들로부터 가장 먼 이유를 돌아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남신 소장은 "'배제된 자'들을 위한 정치를 한다는 진보정당이 '배제된 자'들로부터 가장 먼 이유를 돌아봐야 한다"고 말했다.
ⓒ 신정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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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대선에서는 진보정당이 그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지난 대선에서의 진보진영의 모습을 총체적으로 평가한다면.
"우리는 평론하는 걸 안 좋아하지 않나. 플레이어로 뛰는 걸 좋아하지. 정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 심판하고도 맞장을 뜨고. 이런 게 우리의 결기였고 그게 운동의 핵심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번엔 아예 경기장을 잃어버렸다. 평론도 잘 못했다.  진보진영이 완전히 기가 죽어버렸던 거다. 박근혜 후보 공약의 적실성을 따질 단위가 역량이나 살아온 삶으로 보나 진보진영일텐데 그 진보가 죽어버리니까 이게 검증이 안 된 거지. 그 상태에서 둘이 붙으니 일단 드러난 걸로만 봐서 박 당선인은 현실 가능한 대안세력으로 경제문제 관련해서 많은 점수를 얻었던 거다. 그런 점에서 이번 대선은 문재인과 민주당만의 패배가 아니라 진보세력의 패배도 된다."

- 이번 대선에서 진보진영을 대신해 안철수씨가 제3의 정치세력으로 부각됐다. 안철수 현상에서 진보진영이 주목할 부분은 무엇이라고 보나.
"안철수 현상은 청년세대가 환호했던 거다. 출구가 없는, 가장 많은 사람들이 비정규직으로 취업하고 학자금 걱정하고 실업으로 고통 받는 그들 말이다. 그 청년세대에게 왜 진보진영은 출구가 되지 못했을까. 우리는 안철수씨보다 훨씬 진정성 있는 실천을 해왔는데, 여러 희생과 헌신 속에 한 평생을 바쳐온 사람들도 있고…. 그런데 왜 우리는 청년세대에게 희망, 비전을 주지 못했을까를 돌아봐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잘 돌아보지 못했다. 그냥 '안철수 별거 아냐, 그 사람은 보수인데, 뭐…' 그렇게 폄하하고 말았다. 나 역시 그랬다. 그리고선 '우리는 소수라도 우리 갈 길이 있어'식의 자기 위로 수준에서 정리하고 말았다. 굉장한 오판이었다. 안철수 현상에 대해 정면으로 분석했어야 한다. 그렇게 못했기 때문에 진보진영이 안철수에게 제3정치지대를 빼앗긴 거다. 원래 거기가 우리 판이었으니까 가져왔어야 한다. 당장 3자정립구조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가져오고, 거기에서도 양강 구도가 되기 위한 치열한 사투를 벌였어야 하는데 이건 3자정립구도로 가기도 전에 우리끼리 분열해서 엎어져버렸으니…."

- 진보정당의 분열이 진보진영이 제3정치세력의 지위까지 잃은 이유라고 보나.
"분열 이전에 일상의 실천에서 대중에게 신뢰를 주지 못했다. 과거 민주노동당이 10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하고 제3당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을 때는 민주노총의 일상 실천과 현장 조직이 살아있었다. 진보정당 활동가들도 지역에서 역동적으로 활동했고. 물론 정파 갈등의 폐해가 있긴 했지만 노동과 진보정치가 유기적으로 연결돼 한 방향으로 잘 정렬돼 힘을 모으는 과정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정반대로 사분오열했다.

또, 무상의료,무상교육 같은 대중적 의제를 만들지 못하는 무능함도 보였다. 오히려 복지나 재벌개혁 같은 의제를 민주당을 넘어 새누리당에게까지 빼앗겼다. 한국사회 자본주의가 얼마나 빠르게 변화하고 있나. 박근혜가 경제민주화,복지를 얘기할 정도로 변했는데 우리는 앵무새처럼 무상의료, 무상교육만 되풀이하고 있으니…. 그러면 유권자들에겐 먹물, 인텔리 운동 정도로밖에 더 보이겠나. '쟤들은 현실을 몰라'라면서 불신이 싹텄을 거다.

여기서 바로 통합진보당의 부정선거 사태나 분열이 뼈아픈 거다. 최소한 민주노동당은 꾸준히 민생문제를 제기했었다. 남북관계도 합리적 수준에서 평화, 자주의 문제로까지 접근하는 총체적 청사진을 갖고 있었다. 보수정당이 물어올 정도로 정책력도 가장 뛰어났다. 그런데 지금은 분열돼서 정책일꾼들이 다 떠나고 기존에 만들어놓은 정책만으로 승부해야 하는 판 아닌가. 새로운 정책을 기대하기 어렵고….

한편으론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진보정당이 지자체장을 비롯해 구의원, 시의원들을 내왔는데 그 활동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국민에게 진보정당이라고 썩 다르지 않다는 인식이 생긴 거다. 구체적인 대안을 만들지 못하고 일상적으로도 대중적인 의제로부터 멀어져 온 과정이 이번 대선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박근혜 정부의 비정규 정책은 '앙꼬 없는 찐빵'

- 이제 새정부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박 당선자가 비정규직 문제와 관련해서 2015년까지 공공부문의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공약이 잘 지켜질까.
"신뢰하긴 어렵다. 왜냐하면 일단 공공부문의 비정규직만 해도 굉장히 다종다양하다. 그렇게 많은 인원을 2년 후까지 정규직화하겠다는 건 시간상 불가능하다. 문 후보는 2017년까지라고 얘기했던 것 같은데 임기 전체를 놓고 본다면 가능할 수 있다.

또 박 당선자가 얘기했던 '공공부문의 상시지속업무의 비정규직'에는 직접고용 계약직만 해당되고 간접고용은 포함이 안 되는 걸로 알고 있다. 그렇게만 한다면 2015년까지 가능할 수도 있는데 공공부문에서 직접고용 비정규직은 소수다. 그건 서울시도 이미 작년에 했다. 서울시는 심지어 간접고용인 6천여명의 청소용역까지도 정규직화했다. 서울시가 했으면 중앙정부는 더 쉽게 할 수 있다.

간접고용을 뺀 공공부문 비정규직 문제는 사실은 '앙꼬 없는 찐빵'과 같다. 민간위탁, 간접고용까지를 포괄하는 총체적인 공공부문 비정규직 대책이 나와야 한다. 그 정도 수준은 노무현 정부 때가 더 전향적이었고 이명박 정부 때도 다 했던 얘기다. 2015년이라고 기한을 못 박은 거 외엔 새로운 게 없다.

직접고용 계약직만이라도 제대로 정규직화 할까. 상시지속업무에 대한 기준도 우려된다. 최근 계약기간이 만료되는 국책연구기관의 비정규직 연구원들이 해고가 되는 걸로 봐서도 신뢰가 잘 안 간다. 박 당선자의 공약 때문에 정규직화 하기 전에 미리 계약만료되는 이들을 자르는 건데 그런 것부터 막아야 진정성이 있을 텐데 지금 아무런 대처가 없지 않나."

- 비정규직 정책과 관련해서 박근혜 정부에게 요구할 것들이 있다면.

"경제민주화와 복지를 논했던 언사에 비한다면 현재 박 당선자의 비정규 정책은 상당히 실망스런 수준이다.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광역지자체들에서도 기본 흐름으로 가고 있고, 선량한 사용자로서 대통령이나 지자체장이 마땅히 해야 될 일이다. 본인들이 진짜 사용자로서 제대로 기능을 해야 될 영역의 문제인 거다.

오히려 한국사회 비정규직 문제가 해결되기 어려운 건 민간부분의 비정규직 남용과 차별심화다. 특히 가장 중요한 건 현대차의 불법파견으로 쟁점이 된 간접고용 문제와 250만에 육박한 특수고용 노동자들의 문제다. 이 양대 최악질 비정규직 문제를 풀지 않으면 한국사회 양극화 구조는 개선되기 어렵다. 그 부분에 대해서 박근혜 정부가 안을 내놓아야 한다. 현재 새누리당이 사내하도급법 제정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건 처방이 되기 어렵다. 오히려 '정몽구법'으로 불릴 정도로 불법파견을 합법화하는 잘못된 방향으로 갈 가능성이 100퍼센트다. 그런 꼼수 말고 정책 전반에 대해서 정비하고 새로운 대안들을 내야 한다.

또한 최저임금 인상과 이주노동자의 노동기본권 보장,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의 근로조건 개선, 특히 돌봄노동을 위시한 여성노동의 인권 문제, 사각지대에 있는 청소년 노동자들의 문제해결 등과 병행되어야만 한국사회 비정규직 문제의 실마리가 풀린다. 그런데 지금 이야기한 부분들이 박 당선자의 공약에는 거의 없다. 그래서 못 믿겠다는 거다.

대안과 관련해서는 이미 많이 나와 있다. 문재인 후보도 그렇고, 심상정, 이정희 후보가 이야기했던 공약에도 거의 다 포괄돼 있기 때문에 정책 자체가 어려운 게 아니다. 얼마나 정치적 의지를 가지고 그걸 실현하느냐가 관건이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면 모쪼록 비정규직 문제와 관련해서 좀더 전향적인 대책을 냈으면 좋겠다. 그게 결과적으로 내수 경제를 살리는 길이자 국민대통합을 실제로 실현하는 길이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지난해 11월 16일 오전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사에서 경제민주화 공약 발표를 마치고 인사하고 있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지난해 11월 16일 오전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사에서 경제민주화 공약 발표를 마치고 인사하고 있다.
ⓒ 조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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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거 기간에도 노동공약들을 잘 다루지 않았는데 과연 박근혜 정부가 집권하는 동안 전향적인 정책들을 풀어낼 수 있을까.
"공약이나, 정책, 인수위원회 위원들을 보면 대략난감이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거에서 선출된 정부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표를 던진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생각했으면 좋겠다. 공약이 가장 적은 후보에게 그 공약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을 당사자들이 표를 줬다. 박 당선자는 그런 부분에서 마음을 열고 비록 낙선하거나 중도사퇴한 후보들이긴 하지만 문재인 후보와 진보정당 후보들의 좋은 노동공약들을 가져와서 써먹었으면 좋겠다. 그게 낙선한 후보를 지지한 유권자들을 책임지는 방향이기도 하다.

이건 단순한 기대이긴 한데 그가 가장 자본가들과 가깝지 않은가. 어떤 측면에서는 노동문제가 기득권층의 반발 때문에 풀기 힘든데 의지만 있다면 그들을 잘 설득할 수 있는 것도 박 당선자 아니겠나. 자기 네트워크를 활용해서 노동문제를 풀려고만 한다면 박근혜만한 사람이 없다. 예를 들어 사내하청문제는 조선소가 제일 심각하니까 전 새누리당 대표였던 정몽준(현대중공업 최대주주) 의원한테 가서 '사내하청 문제 해결하자'고 하면 제일 수월하지 않겠나. 물론 말처럼 쉬운 건 아니겠으나 박 당선자가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생각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그런 공약을 냈지만 기가 꺾여서 못했다. 근데 박 당선자는 그런 공약이 없거나 부실하긴 하지만 본인의 정치적 의지만 좀 있다면, 자신에게 표를 던진 유권자들에 대한 심사숙고만 있다면 나는 그거 했으면 좋겠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나는 박수 보내고 잘 하라고 응원할 수 있다. 선출된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조력을 하는 게 맞다. 다만 박 당선자가 그런 진정성과 정치적 의지를 보여야 한다."

- 박 당선자가 노동문제에 대해 진정성을 보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반대하는 사람들은 많겠지만 당장은 쌍용차, 한진중공업, 현대차, 유성기업 등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노조파괴 문제로 현재 고공농성투쟁하고 있는 곳에 찾아갔으면 좋겠다. 무슨 대안을 가지고 가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직접 가서 몸으로 느끼는 게 또 다른 거다. 가서 뺨을 맞을지라도…. 그게 정치인 아닌가? 그것부터 시작하는 게 사회통합이고 본인이 얘기했던 전체 국민의 대통령이 되는 길이다. 대통령은 실권이 있지 않은가. 이제 자파 지지자들에게만 둘러싸일 시점은 지났다. 오히려 반대파들을 유념해 둬야 된다. 그러나 아예 발길을 하지 않는 건 다른 문제다. 그럼 무슨 정책을 내든 어떻게 진정성을 인정받겠나."

"박근혜 시대, 진보에거 더 절실함 던져줄 수 있다"

- 박근혜 정부 5년간 진보진영은 되살아날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비관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박근혜 정부의 집권이 그걸 더 절실하게 만든 거 아닌가. 오히려 문재인씨가 집권했다면 과연 그런 부분에서 얼마만큼 힘이 붙었을까? 아마 굉장히 상층중심의 흐름이 강화됐을 거다. 불 보듯 뻔하다. 전부 현안문제 해결로 달려가고 근본을 돌아보기보다는 실용적으로 판단했을 거다. 그러면서 이쪽의 혼란은 상당히 가속화됐겠지.

어떤 측면에서는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박근혜 정부 5년을 비관적으로만 볼 게 아니라 우리가 만들 희망의 근거로 볼 필요도 있겠다. 희망버스가 보여준 것처럼 어려울수록 사람들은 빛을 갈구한다. 희망은 오히려 그런 절망 속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 이 10년의 시간은 우리에게는 정말 가혹한 시련의 시기이자 통과하고 싶지 않은 시험대이긴 하다. 하지만 기왕에 맞닥뜨린 이상은 정면돌파하는 게 맞다. 특히 노동운동진영이 어떻게 재기하느냐가 관건이다. 이 기회를 놓친다면 노동진영은 굉장히 협소한 세력으로 쪼그라들 거다. 민주노총이 계속 헤매고 있긴 하지만 많이들 실의에서 벗어났다. 더 힘을 냈으면 좋겠다."

- 일부에서는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실패했다고 평하기도 한다. 노동정치도 다시 시작될 수 있을까.
"나 역시도 민주노총의 배타적 지지 방침에 기반해 민주노동당으로 시작된 노동자 정치세력화 운동의 1막은 끝났다고 생각한다. 처절한 패배로 막을 내렸다. 이제 2막을 준비할 때다. 넝마가 된 깃발은 버리고 새 깃발을 올려야 한다. 욕을 많이 얻어먹겠지만 개인적으로는 한국사회에서 진보정당이 추구해야할 지향은 사회민주주의(사민주의)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사민주의 수준보다 못한 정책을 갖고 진보정당을 운영해 왔다. 그런데도 활동가들에게 너의 정치지향이 뭐냐고 물으면 차마 사민주의라고 얘기를 못한다. 예전부터 사민주의라고 하면 개량주의, 수정주의 등으로 매도당해 왔기 때문이다.

근데 제도정치판에서 진보정당의 위상이나 정책정강은 딱 사민주의 수준이다. 거기서 더 나가면 사회주의, 공산주의로 명명할 수 있을지 몰라도 현 단계에서는 사민주의가 맞다고 본다. 많은 사람들이 북유럽식 사민주의를 얘기하는데 분단상태인 한국사회의 특성을 사민주의 틀 내에서 잘 정식화하는 게 필요하다.

복지국가나 경제민주화가 얼마나 중요한가. 근데 민주노총이 복지 담론을 제대로 얘기 못한다. 좌파 현장조직 등에서 민주노총을 개량으로 망가뜨리려고 하냐고 정치적 공격을 해올 게 뻔하니까. 그러면 치열하게 토론하면 될 거 아닌가. 그런데 그 한계를 잘 넘지 못한다. 결국 복지국가랑 경제민주화 담론을 보수 세력에게 빼앗기지 않았는가. 노동이 핵심이고, 거기에 비정규나 중소사업장 문제, 여성노동, 이주노동 등 우리 핏값이 거기 다 있는데 그걸 왜 빼앗기는지 정말 답답하다.

이제는 근본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변혁이라는 게 그렇게 한 번에 오지 않는 거 아닌가. 우리가 혁명을 총 들고 무력으로 할 건가. 그렇다면 차라리 이해라도 하겠지만 제도정치권 내로 간다면 당연히 개량과 개혁을 중심으로 해서 선거도 치러야 하는 것이다. 복지를 위시한 대중적 의제를 선점해 집권해서 바꾸어내고, 그와 연동해서 시민사회 등 진지가 강화되는 효과도 염두에 두면서 가야 되는 거 아닌가. 그런데 민주노조운동의 본산이라는 민주노총 내에서 그런 논의가 금기시 되고 있다니, 이 답답한 지형에서 벗어나야 한다."

"발목 잡는 정파구도에서 해방돼 헤쳐 모이자"

2008년 진보신당 비례후보 시절 이남신 소장의 모습. (자료사진)
 2008년 진보신당 비례후보 시절 이남신 소장의 모습. (자료사진)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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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보진영이 다시 제3의 정치세력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우선은 새로운 진보정치, 노동정치에 확신을 갖고 있는 주체들이 모여야 한다. 진보정치와 관련해서 새로운 기치를 내걸고 그 아래 헤쳐 모이자는 거다. 활동가들의 발목을 잡고 있는 정파구도에서 해방돼 정말로 우리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갖고, 새로운 정치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모이자. 더디지만 진정성을 가지고 한다면 가능하다.

또한 '노동중심'을 얘기하지만 그게 꼭 노동조합으로 표상되는 조직된 노동운동 중심은 아니다. 생태나 평화, 여러 소수자 운동, 여성이나 인권 등을 포괄하고 대등한 운동으로 받아들이는, 성숙한 의미의 노동중심의 정치세력화를 많은 사람들이 갈구하고 있다. 현재의 지리멸렬함에서 벗어나 새로운 노동 중심의 진보적 대중정당을 만들어야 한다.

근본적인 반성들 속에서 완전히 새로운 주체들로 형성된 운동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희망버스가 일단을 보여주긴 했지만 희망버스 그 자체가 대안은 아니다. 그런 올바르고 역동적인 흐름들을 매개로 현실을 바꿀 수 있는 대안주체를 만드는 과정이 시작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비정규노동운동 중심의 역동적인 흐름을 다시 형성해내는 게 중요하다.

당장의 현실이 갑갑하긴 하다. 쉽지는 않을 거다. 그렇더라도 나는 진보정치가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확신한다. 여전히 민주노총이라는 중요한 근거가 있고 역동적으로 싸우고 있는 비정규노동자들이 있다. 지난 몇 년 간 조직된 학교비정규직노동자가 4만 명에 가깝다. 이렇게 새롭게 조직화되고 있는 이들이 꽤 많다. 이들 민중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할 정치세력은 새누리당과 민주당은 될 수가 없다. 민주당이 완전히 환골탈태하더라도, 안철수씨가 신당을 만든다고 해도 왼쪽으로 아무리 가도 중도보수, 합리적 보수 이상은 될 수 없다. 나는 그것도 의미 있다고 보고 안철수씨가 그 역할을 잘 해줬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민주노동당이 외쳤던 '일하는 사람들의 정당'의 지위를 되찾을 수 있는 건 우리밖에 없다. 우리가 무능해서 못한다면 기회도 주어지지 않겠지만 우리가 애쓴다면 제3정치 세력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노동이 독자적으로 그런 정치세력을 구축할 수 있느냐의 부분은 만만치 않은 과정일 거다. 이미 대선 과정에서 한 차례 핵분열을 해버렸기 때문에 그걸 모아내는 과정이 더딜 수는 있겠다."

- 긴 시간 말씀 감사드린다. 마지막으로 올해의 사자성어로 삼은 게 있다면.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로 본다면 역지사지고, 지향해야 할 방향으로 본다면 실사구시다. 선거공간이라는 것이 앙금이 생긴다. 헤어진 가족이 의기투합하기 힘들듯이 비슷한 놈들끼리 앙금이 생기면 같이하기 힘들어한다. 상대의 입장에 서서 역지사지하는 마음으로 그런 어려움을 잘 극복했으면 좋겠다. 또 요즘 비정규노동운동에 대해서도 비정규 실학파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다니는데 사실에 기초해서 진리를 탐구하는 실사구시 정신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제는 투쟁 만능주의나 철폐 담론에서 벗어나서 실제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구체적인 로드맵을 만들어야 한다는 거다. 그러려면 철저하게 조사하고 연구하고, 현장에서 실천하는 3박자로 가야 한다. 올 한 해는 몸으로 많이 뛰고 발품 팔면서 극복하는 한 해로 만들고 싶다.

그런 진정성 어린 노력을 통해서 마음이 모아지면 그때부터는 굉장히 가속도가 붙을 거라는 확신이 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 스스로가 한국사회와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일터, 지역을 바꿀 새로운 동력과 비전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거다. 일하는 사람들의 정당 민주노동당이 만들어졌을 때의 감동, 내 사랑 민주노조의 그 감동. 이게 박근혜 정부 5년 동안 우리가 만들어야 될 목표 아닌가 생각한다."

이남신 소장은 인터뷰 중 진보가 다시 일어설 수 있고, 일어서야 한다는 이야기를 계속 강조했다.

"올해 내 나이가 50입니다. 개인적으론 억울해서라도 포기할 수 없어요. 나름대로 노동운동이나 진보정치운동에 청춘을 바쳤는데 이대로 끝낸다면 내 아들놈한테 내 삶을 어떤 평가로 물려줄 수 있겠어요? 무엇보다도 비정규노동자들을 비롯해서 너무도 고통받는 분들이 많아요. 그분들의 눈물, 고통, 설움 등이 있는 한 진보는 포기할 수도 없고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 그는 "외곽에서 조직노동과 진보정당 울타리에 갇혀 있던 진보가 울타리를 넘어서 삶의 현장으로 뛰어 들어가야 한다"면서 "거기서 같이 어울리고 고락을 같이 하고 같이 책임지면서 대중들로부터 '나도 쟤네를 닮고 싶고, 쟤네처럼 살고 싶다'는 감동을 만들어 한다"고 말했다. 앞으로 5년간 진보진영이 삶의 현장에서 만들어내는 감동의 농도가 얼마나 될지 지켜볼 일이다.


태그:#이남신, #한국비정규노동센터 , #진보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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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삶엔 이야기가 있다는 믿음으로 삶의 이야기를 찾아 기록하는 기록자. 스키마언어교육연구소 연구원으로 아이들과 즐겁게 책을 읽고 글쓰는 법도 찾고 있다. 제21회 전태일문학상 생활/기록문 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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