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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사진.
ⓒ 최지용

교육과학기술부(이하 교과부)가 지난 21일 발표한 '초중등교육법 일부개정법률(안) 입법예고'가 논란에 휩싸였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는 이 미묘한 시기에 '교과용 도서', 즉 '교과서'에 대한 내용을 다루는 법안이 제출된 것이다.

교과부는 이미 2010년, 2011년에 비슷한 내용의 입법예고안을 냈다가 입법에 실패한 바 있다. 그때도 교과부는 교과용 도서에 대한 규정이 미비해 이를 보완하려는 것이지, 다른 의도는 없다고 강변했다.

교과용도서에 대한 규정이 미비했던 것은 사실이다. 현행 초중등교육법에서 교과용 도서와 관련된 조항은 29조가 유일한데, 그 내용은 '① 학교에서는 ... 교과용 도서를 사용하여야 한다. ② 교과용 도서의 범위, 저작, 검정, 인정, 발행, 공급, 선정 및 가격 사정 등에 필요한 사항은 대통령령으로 정한다' 라고만 되어 있다.

교과부는 이렇게 대통령령에 포괄적으로 위임되어 있던 교과용 도서에 관한 규정 중 국민의 권리·의무와 관련된 내용을 법률에 직접 규정하고, 미비점을 보완·정비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런 설명은 일견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이런 해명을 그대로 믿기에는 의심스러운 대목이 많다. 왜 선의를 못 믿느냐고 항변하기에는 교과부가 저지른 원죄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교과부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이유

기억을 더듬어 보자. 이명박 정부는 5년 내내 역사와 전쟁을 벌인 정권이다. 2008년 금성 한국근현대사 사태가 있었고, 2009년 '미래형 교육과정'이란 이름으로 난데없이 교육과정을 뜯어고쳤다. 그러더니, 2010년과 2011년 연달아 개정 교육과정을 발표해 학교 현장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2008년 11월 17일 오후 보수단체인 반국가교육척결국민연합 회원들이 세종로 정부중앙청사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친북좌경 금성출판사 역사교과서 검정 취소'를 촉구했다.
ⓒ 권우성

그 시초가 된 2008년 금성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사태를 기억하는가? 7차 교육과정에 의해 2002년 검정을 통과해 5년간이나 문제없이 사용되던 금성출판사 한국근현대사 교과서가 난데없이 '좌편향' 교과서로 낙인찍혔다. 교육과정도 그대로이고 검정 기준도 그대로인데, 정권이 바뀌었다고 일어난, 정말 후진국적인 일이었다.

뉴라이트를 필두로 보수 세력이 총결집해 교과서 흠집내기에 나섰고, 정부는 이를 이용해 교과서 수정을 명령했다. 대통령령에 규정된 교과서 수정 조항이 실제로 행사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아직까지는) 마지막이었다. 필자들이 수정을 거부하자, 출판사를 압박해 필자의 동의도 받지 않고 마음대로 교과서를 고치도록 강요했다.

이런 몰상식한 처사에 맞서 필자들은 교과부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냈다. 2010년 9월에 나온 1심 판결은 상당히 주목할 만하다. 재판부는 보통교육에 대해 국가, 즉 교과부의 개입 권한은 인정했다. 그러나 이미 검정을 통과해 사용되고 있는 교과서에 대해, 단순 오기나 오식, 명백한 사실 관계 오류, 통계, 사진, 자료의 갱신이 아니라 내용을 수정하도록 한 것은 재검정에 해당하므로, 검정에 준하는 절차를 거치지 않은 수정 명령은 위법하다고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그러나 2011년 8월에 내려진 항소심 판결에서는 재판부가 교과부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여 패소했다. 현재는 대법원의 최종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자, 이제 교과부가 왜 굳이 대통령령에 이미 규정되어 있는 교과서 수정 권한을 법률화시키려 애쓰는지 짐작이 될 것이다. 금성 한국근현대사 행정소송과 같은 시비를 없애고, 수정 명령을 어긴 경우 처벌 규정까지 신설해 교과서에 대한 고삐를 더욱 죄려는 것으로 의심할 수밖에 없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이명박 정부 들어 반발을 무릅쓰고 교육과정도 고치고, 검정위원에 뉴라이트 인사도 참여시켜봤지만 마음먹은 대로 교과서가 고쳐지지 않으니, 이제 법률을 만들어 교과부가 직접 교과서를 손보겠다는 의도가 아닌가 의심된다. 이런 의심은 입법예고안을 살펴보면 더욱 커진다.

입법예고안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들

우선 이제껏 공고, 혹은 내규 수준에서 제시하던 교과서 검정 및 인정 기준을 법에 명시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교육과정의 내용을 충실히 반영할 것
2. 헌법의 정신에 부합하는 내용일 것
3.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을 준수할 것
4. 지식재산권을 존중할 것
5. 그 밖에 대통령령이나 공고로 정하는 교과목별 세부기준을 준수할 것

이런 규정은 그 자체로는 문제가 없어 보인다. 다만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개념은 원래 정부나 권력의 부당한 개입을 막기 위해 마련된 개념인데, 언젠가부터 그 의미가 변질되어 정부 정책에 비판적인 내용에 '좌편향' 딱지를 붙이는데 악용되고 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교과부가 의뢰해 교육의 정치적 중립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고 하는데, 이와 맞물려 이 조항이 비판적인 교과서에 대한 재갈물리기에 악용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또 이제껏 없던 '감수' 조항이 새로 생겼다. '교과부장관은 교과용도서의 편찬, 검정, 인정 단계에서 필요한 경우에는 감수를 할 수 있다'고 하면서, '감수기관을 지정할 수 있으며, 감수의 대상, 범위, 절차 등은 대통령령으로 정한다'고 규정했다.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공식적인 법적 절차인 검정 절차 이외에 감수 절차를 따로 두도록 한 이유가 무얼까? 교과부 장관이 자신의 영향력 아래 있는 임의의 감수 기관을 지정해 특정 목적을 위해 감수를 진행하고 이를 근거로 교과서 내용을 고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2008년 금성 한국근현대사 사태 때도, 역사 연구단체가 아닌 상공회의소나 국방부 혹은 뉴 라이트 단체인 '교과서포럼' 같은 곳에서 교과서를 분석해 좌편향이라고 아우성을 치고, 교과부가 이를 받아들여 수정을 명령한 전례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가장 핵심적인 내용으로, 교과부장관이 수정을 요청할 수 있는 사항은 아래와 같다. 이는 2011년의 입법예고안이 교과부장관의 수정 권한을 포괄적으로 규정한 것에 대한 비판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1. 오기, 오식 기타 객관적으로 명백한 잘못을 발견한 경우
2. 통계, 사진, 삽화의 갱신이 필요한 경우
3. 학계에서의 객관적인 학설 상황이나 교육 상황에 비추어 학문적인 정확성이나 교육적인 타당성을 결여한 경우
4. 교육과정의 부분 개정 등 사정변경이 발생한 경우
5. 검인정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내용을 발견한 경우 등

1, 2의 경우는 받아들일 만 하나, 3의 경우는 문제가 다르다. 역사를 비롯해 가치판단이 개입하는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에서 명백히 '객관적 학설'이 존재할 수 있는지 의문이며, '교육적인 타당성'이라는 규정도 매우 자의적이다.

2008년 금성 한국근현대사 사태 때 학계를 대표하는 수십 개의 역사연구단체들이 이에 반대하는 성명서를 여러 차례 발표했다. 2009, 2010, 2011년 교육과정 개정 과정에서도 수많은 역사연구단체들이 반대 의견을 여러 차례 내놓았다.

이런 '학계의 중론'을 무시하고, 수정 명령이 내려졌고 교육과정 개정이 이루어졌다. 특히 교육과정 개정 과정에서는 뉴라이트 역사단체로 의심되는 '한국현대사학회'라는 신생 역사연구단체의 의견이 수많은 다른 역사연구단체의 의견을 압도했다. 이런 상황에서 3 항목은 자의적, 주관적, 정치적 판단에 의해 악용될 가능성이 너무 크다.

5 항목도 문제가 있다. 검인정 기준에 부합되지 않는 내용이 있으면 검인정 과정에서 걸러내야지, 검인정을 통과시켜놓고 나중에 다시 그런 내용이 발견되었으니 수정하라고 하는 것은 억지에 가깝다. 검정에 참가한 전문가가 발견하지 못한 내용을 교과부장관이 나중에 발견한다는 것은, 발견이 아니라 꼬투리 잡기가 될 가능성이 크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교과서를 바꾼다?

전문가들의 검정을 거쳐 학교 현장에서 사용되는 교과서는 최소한의 안정성과 지속성을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정말 피치 못할 사정, 즉 오기, 오식, 명백한 사실 오류가 발견된 경우나 통계, 사진, 삽화의 교체가 필요한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수정이 인정되어야 한다. 대통령에 의해 임명된 정치인이자 관료인 교과부 장관이 자의적 판단으로 교과서를 수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져서는 안 된다.

이 정도 합의는 보수, 진보를 떠나 상식을 가진 시민이라면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닌가? 정권은 유한하며 바뀔 수 있다. 그때마다 교과서가 고쳐져야 한다면 그 사회는 어떻게 되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우리 헌법은 '교육의 자주성, 전문성, 정치적 중립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 후보는 '100% 대한민국' '국민 대통합'을 내걸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일부 국민들은 여전히 그에게서 '유신'의 그림자를 연상하고 불안해한다. 암울했던 과거로 회귀하는 것은 아닌가 의구심이 큰 것도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교과부가 이렇게 민감한 입법예고안을 내놓은 것은 거의 도발에 가깝다. 만약 이 입법예고안이 강행된다면 새 정부는 '유신'을 복권시키려 역사와 전쟁을 벌이려는 정부로 낙인찍힐 것이다.

새 정부의 성공적 출범을 위해서라도 이번 입법예고안은 마땅히 철회되어야 한다. 아울러 현행 대통령령을 대체해 교과서의 자주성, 전문성, 정치적 중립성을 담보할 수 있는 새로운 법률안을 만드는데, 보수와 진보를 떠나 상식적인 시민들이 모두 머리를 맞대어야 한다. 정권은 짧고, 역사는 영원하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이성호 기자는 역사 교사이며, 전국역사교과모임 회장입니다.



태그:#금성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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